104화: 결승전 (1)
시몬이 승리를 거두고, 아크튜러스 가문의 승계전은 최종전만 남겨 둔 상황이 되었다.
“마지막 경기! 시몬 아크튜러스 공자와 케나드 아크튜러스 공자의 결승전은 지금부터 한 시간 뒤에 열릴 예정이오!”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만큼 4강 경기가 치열하게 벌어졌기 때문에 쉬지 않고 결승전까지 달려온 참가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였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드뇌브 후작은 승계전에 참석한 귀빈들을 위해 작은 연회를 베풀었다. 한쪽에서 고급스러운 술과 음식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과연 아크튜러스 가문이군. 이렇게 완벽한 승계전은 처음이야. 경기는 물론이고 음식도 아주 기가 막히는군!”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 밀튼 공작께서 하신 말씀 들었나?”
“무슨?”
“따님과 케나드 공자와의 혼인을 좀 앞당기신다고 하는군. 으음, 그렇게 된다면 남부와 서부의 협력이 강화되겠지.”
많은 귀족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주판을 두드려야 이익이 많이 남을지에 대해 생각해야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는 건 누가 되려나? 정말 궁금하네.”
“만약 케나드 공자가 승리하게 된다면 카펠라 공작가와 연합해서 아주 큰 세력을 만들 공산이 크지. 혈연관계가 되는 거니까.”
“시몬 공자가 승리하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흥미롭지 않겠나? 오크를 설득해 협약을 이끈 게 케나드 공자가 아니라 시몬 공자였다는 소문이 있더군. 아크튜러스의 이종족 포용 정책도 시몬 공자의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있다네.”
“허어, 그런가?”
“시몬 공자가 이기는 그림도 썩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인가?”
“나도 동감하네. 남부에 아주 신선한 바람이 불어올 수도 있겠지.”
승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고위 귀족들은 웃으며 떠들었다.
그러나 귀빈석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모두가 파티를 즐기기 위해 자리를 떠났고, 황태자와 메르세데스 황녀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군.”
황태자는 불만 가득한 속내를 애써 숨기고 있었다. 곁에서 호위하던 오토 경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황태자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잔혹한 사람.
이번 계획에 연루된 인사들, 특히 로데론에서 밀수품 운송을 책임지는 사람들과 승계전 관련 인사들은 엄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뜻하지 않은 일이 너무 연이어 일어났어.”
로데론에서 건너온 밀수품이 사라진 것은 사고라고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치밀하게 준비한 승계전이 너무나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크튜러스 가문의 적자 두 명이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 것.
결국 카펙 공자는 버리는 패가 되었고, 로버츠 공자는 서클이 망가져 폐인이 되고 말았다.
그거까지만이라면 괜찮다.
사람이 세우는 계획이라는 게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황실의 보물인 ‘템페스트’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시몬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바로 황도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래도 결승전까지는 지켜보고 가는 게 좋겠지? 빌어먹을 체면이란 게 있으니.”
지나가듯 던져진 말들이었으나 오토 경은 그것이 진심임을 눈치챘다.
“전하.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기회는 또 있을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래. 기회야 얼마든지 있겠지. 하지만 이 지독히도 더러운 기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단 말이야. 내가 지배하는 세계에 반란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군.”
카인 태자가 술을 단번에 비웠다.
그러자 따뜻하고 작은 손이 카인 태자의 손을 감쌌다. 메르세데스 황녀였다.
황녀는 애달픈 눈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오토 경의 말이 맞아요. 기회는 또 만들면 되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결국 모든 것은 오라버니의 것이 될 거랍니다.”
“으음.”
“그보다 안에 들어가서 좀 쉬시겠어요?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그러지.”
묘한 분위기를 풍긴 태자와 황녀가 저택 안으로 자리를 떠났다.
시몬은 실눈을 뜬 채 그 장면을 바라보는 중이다.
한편으로는 오러 심법을 일으켜 준결승전에서 소모한 오러를 다시금 채워 넣고 있었다.
템페스트에 손을 대는 것으로 많은 양의 오러를 회수하긴 했으나, 손실이 좀 있어 가득 채우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보다 그리 날뛰진 않는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판이 뜻대로 깔리지 않았기 때문에 태자와 황녀가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황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
“몸은 좀 어떠냐?”
드뇌브 후작이 다가왔다. 그는 양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었고, 그중 하나를 시몬에게 건넸다.
시몬은 심법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받았다.
“아주 멀쩡합니다.”
“오러는?”
경기를 참관한 익스퍼트급 이상의 오러 유저들은, 방금 펼쳐진 경기에서 엄청난 오러가 소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은 것이다.
“결승전이 열리기 전까지는 다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주 멋진 결승전이 될 겁니다. 마음 같아서는 부상당한 척하고 기권하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크게 혼날 것 같아서 말이죠.”
시몬은 농담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드뇌브 후작은 참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는 깊은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나 이터에 있던 오러를 다시 회수한 게냐?”
“맞습니다.”
“마나 이터를 이렇게나 간단히 제압해 버리다니…… 게다가 네 것으로 만들기까지 했구나. 당연히 너의 계책이었겠지?”
“계책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순리대로 일이 풀린 거지요.”
시몬은 허리춤에 걸린 검을 검집째로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이건 마나 이터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템페스트라는 이름의 물건입니다.”
“템페스트라고?”
“예. 아버지도 알고 계시죠?”
드뇌브 후작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도 예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황실 보물 창고에 보관된 명검들에 대해서 말이다.
아크튜러스는 검술명가이자 무를 숭상하는 가문.
그 어떤 사람들보다 무기나 방어구 아티팩트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강해지는 지름길이기도 하니까.
“시몬.”
후작이 목소리를 낮췄다. 시몬만 은밀히 들을 수 있도록.
“내가 알기로 템페스트는 황실이 보관하고 있는 보검 중 하나다. 맞느냐?”
“잘 아시는군요. 말씀하신 대로 황실의 물건입니다. 동시에 황실이 로버츠 공자를 밀어줬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물건이기도 하지요.”
“으음.”
“전리품치고는 조금 위험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고 빼앗는 것과 알고 빼앗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나중에 추궁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드뇌브 후작은 단호하게 판단했다.
로버츠 공자를 밀어줬다는 것은, 황실이 남부를 대표하는 거대 가문의 내정에 간섭한 것이다.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됐구나. 이 기회에 황실에 한 방 먹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의외인데요? 허풍을 부린다며 혼내실 줄 알았는데요.”
“가문의 명예가 달린 일이다. 그리고 너는 오늘 아크튜러스 가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님을 힘으로 증명했지. 이보다 기쁜 일이 더 있겠느냐?”
실제로 시몬은 황실의 계책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승계전 결승에서 두 아들이 싸우게 되는 건 그를 비롯한 아크튜러스 가문 모두가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드뇌브 후작은 시몬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넌 과거로 회귀한 사람이 아니더냐? 그 지식을 너의 욕망이 아니라 가문을 위해 활용하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구나. 왜 회귀하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인정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버지, 말씀하신 것 중에 바로잡을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제 욕망을 위해 지식을 활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아닙니다. 저는 충분히 제 욕망을 위해 미래 지식을 활용하고 있지요.”
드뇌브 후작이 픽 웃었다.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다는 게 너의 욕망이라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 줄 것도 없지 않느냐? 물론 그게 진짜 농사를 의미한다면 말이지. 농사를 짓는다는 건 다른 뜻도 있음을 난 알고 있다.”
“다른 뜻이요?”
“나라의 터를 닦는다는 의미로도 종종 쓰이지. 너라면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나라의 크기와 관계없이 말이다.”
아무래도 아버지도 라니에리와 같은 착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몬은 그냥 웃어넘겼다. 그래도 아버지의 변화가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저보다는 케나드 녀석을 좀 격려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결승전이라 많이 긴장하고 있을 텐데요.”
“이미 다녀오는 길이다. 워낙 집중하고 있어서 말조차 걸지 못했지. 오히려 긴장은 네가 하는 것 같다만?”
“저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군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상관없다. 나는 약속을 지킬 거니까. 그러니 너도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결투를 하길 바란다.”
격려의 말을 남긴 드뇌브 후작은, 홀로 쓸쓸히 앉아 있는 뮬라타를 발견하곤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몬은 다시 앉아 오러 연공술을 시작했다.
새벽의 이슬처럼 맑고 깨끗한 오러가 심장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결승전이 시작되기 직전, 오랜 친구들이 찾아왔다. 라니에리와 드비안느였다.
“심정이 어떠세요? 아끼는 동생과 가문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거요. 와! 이거 진짜 아스타로테의 4대 비극을 보는 것 같네요.”
“무슨 비극 타령을 하고 있어? 부정 타게.”
콧방귀를 뀐 시몬이 검을 집었다. 템페스트가 아닌, 일반 장검이었다.
템페스트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걸 사용했다간 정말 케나드에게 이겨 버릴지도 모른다.
“넌 참 편하게 돈 버는 것 같구나. 어머니의 시녀가 이렇게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말이지.”
“그 말 취소해 주시면 좋겠네요. 마님이 가서 응원하고 오라고 하셨거든요.”
“진짜야?”
시몬이 확인하듯 라니에리에게 물었고, 라니에리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사뭇 놀랐다.
“의외네? 그러실 분이 아닌데.”
“마님께서 너어~무 기뻐하셨어요. 두 아드님께서 정말 멋지게 결승에서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이유를 알 것 같다.
헤라는 전부터 승계전을 열지 말라고 드뇌브 후작을 압박했었다. 하지만 이제 걱정거리가 싹 사라졌으니 기쁠 수밖에.
“드비안느, 찬스다.”
“무슨 찬스요?”
“이 기회에 어머니께 급료 좀 올려 달라고 해.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는 날은 일 년에 하루 있을까 말까 한 날이잖아?”
“우와, 좋은데요?”
드비안느가 얼마나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로이드 가문이 부유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니까.
“근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어떤데?”
“평소라면 졸리거나 귀찮은 기색을 보여야 하는데, 웬일로 멀쩡해 보이셔서요. 오히려 약간의 고민까지?”
과연 소꿉친구는 예리했다.
“설마 긴장하고 계신 거예요?”
“긴장까지는 아니고,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말씀하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라니에리가 충성스럽게 나섰다. 시몬은 별일 아니라며 손사래 쳤다.
“별건 아니고, 전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계속 머리를 맴돌아서 말이야. 케나드가 나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하셨었거든.”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새로운 검식도 익히셨으니. 오러도 강하시고요.”
“그것 말고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어.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거지.”
그러자 드비안느가 일침을 날렸다.
“회귀도 별거 없네요? 모르는 게 이렇게 많은 걸 보면.”
“비꼬냐?”
“에이, 설마요. 제가 하늘 같은 공자님을 어떻게 비꼬아요?”
드비안느는 생글생글 웃었다.
왠지 성별이 다른 라니에리가 한 명 더 나타난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시몬은 검을 들고 경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결승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