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도발 (2)
그 말에 카인 황태자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주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오만하게도 그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대의 말대로 유명한 특산품은 딱 두 가지. 하나는 목재, 다른 하나는 마약.”
네놈이 알면 뭐 어쩌겠냐는 듯이 말했다. 시몬은 미소를 지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굳이 목재라고 말하지 않은 걸 보니 그대는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하군. 리겔 제국을 이을 고귀한 사람이 마약에 손을 뻗고 있다고 말이야.”
황태자가 반격을 가했다.
검으로 베어 내는 것보다 더욱 아픈 공격이었을 것이다. 만약 시몬이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시몬은 이미 백 년 묵은 능구렁이와 같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나 해서 여쭌 것일 뿐입니다. 설령 그 품목이 마약이라고 할지라도, 제국의 위대한 주인께서 하시는 일인데 필연적으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마치 내가 무엇에 투자했는지 아는 것처럼 말하네?”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시몬은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었다.
이대로는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드뇌브 후작이 낌새를 느끼고 다가왔다.
“태자 전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분위기가 심각해 보이는군요.”
태자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시몬이 끼어들었다.
“아버지. 태자 전하께서 투자하신 상단이 킬스톤에서 오크의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품들을 모두 빼앗긴 것 같습니다.”
“뭐라고? 어느 상단이더냐?”
드뇌브 후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파우스트 상단입니다.”
“파우스트라면…… 힐스트롱 가문이 출자한 곳이기도 하구나. 으음, 킬스톤이라면 알데바란의 영지일 터. 타이온 후작을 불러야겠군.”
황태자가 그럴 것 없다는 식으로 손을 뻗었으나 드뇌브 후작은 대번에 달려가 타이온 후작을 데려왔다.
‘과연. 아버지다운 처세술이야.’
이미 시몬에게 모든 내막을 전해 들은 터라 이런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천연덕스럽게 행동하면서 은근히 황태자를 압박하는 계책.
그 계책은 그다지 위협적이진 않았다.
적당히 하라는 경고에 가까웠다. 지금까지는 지켜보고 있지만 이 이상 선을 넘으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듯이.
“타이온 후작! 큰일 났소. 킬스톤 지역에서…….”
다가오는 길에 이 이야기를 전달받은 타이온 후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오자마자 황태자에게 용서를 구했다.
“태자 전하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킬스톤에서의 일은 제가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입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아아, 괜찮다. 드뇌브 경. 그대는 공연히 일을 키우려고 하는군.”
“하지만 전하. 전하께서 투자하신 곳은 말 그대로 황은을 입은 곳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곳이 다른 자들도 아닌 오크의 공격을 받았더라면, 저희 가문에도 응분의 책임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드뇌브 후작도 고개를 조아렸다. 어떤 처벌도 받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쯤 되자 카인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아크튜러스 가문의 저항이 심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에.
“둘 다 고개를 들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군.”
“물품은 모두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에서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품목을 알려 주시면…….”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신경질적으로 툭 쏜 황태자는 망토를 펄럭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알데바란의 타이온 후작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편으로는 드뇌브 후작을 애처롭게 바라보기도 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태자 전하의 심기를 거스른 게 분명하오.”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우리는 할 도리를 다하지 않았소?”
“하지만…….”
드뇌브 후작은 타이온 후작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정시켰다.
“어떤 놈들인지는 내가 조사하도록 하겠소. 마침 뮬라타 대족장이 이곳에 와 있으니 협력을 요청하면 될 것이오.”
“오오! 그래 주시면 고맙겠소. 우리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염려 놓으시오.”
타이온 후작을 잘 타이른 드뇌브 후작은 시몬과 함께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조용한 곳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계책이 성공한 모양이더구나.”
“예. 깔끔하게 성공했습니다.”
“뒤처리는?”
“증거품을 모조리 태우라 명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전서구가 날아가고 있을 겁니다.”
드뇌브 후작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우리의 목표는 황실의 관심을 남부에서 떼어 내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그보다 너, 언제 5서클에 접어들었나?”
드뇌브 후작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몬의 정확한 경지를 가늠하지 못했지만, 그는 예외였다.
“좀 되었습니다. 케나드를 지원할 무렵 서클을 하나 더 만들었지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일로 가득하군.”
만약 시몬이 케나드와 동일한 4서클의 경지를 보였다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5서클과 4서클의 차이는 상당했다.
“아버지. 지금 아버지께서는 6서클 끝자락이지요? 소드 마스터를 앞두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그건 왜 묻느냐?”
“만약 아버지께서 과거로 돌아가 처음부터 시작하신다면 다시 6서클을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실 것 같습니까?”
농담이 아니었다. 시몬은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으음.”
우습게도 드뇌브 후작은 시몬의 물음에 진지하게 응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수련할 것인지에 대해서.
답은 금방 나왔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이유는, 이미 한번 해 보셨기 때문이겠지요? 새로운 비약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지.”
“제 대답이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이미 한번 해 봤기 때문에 다시 할 수 있다는 것이냐? 남보다 빠르게?”
“예.”
오히려 회귀해서 가능했다는 말이, 회귀하지 않고 그냥 열심히 한 결과라는 말보다 훨씬 마음에 와닿았다.
후작은 웃음이 나왔다.
후유증이 남아 정신이 이상해진 거라고 생각한 게 엊그제였는데, 이제는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걸 인정한다 한들 변하는 게 있느냐?”
“없습니다. 남이 알아주길 바라서 말씀드린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아들로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이니까요.”
“회귀한 것치고 말투가 어리구나. 꽤 오래 살았을 것 같은데 말이지.”
“마음도 젊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죠.”
그제야 드뇌브 후작은 아들의 말을 믿게 되었다.
강제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건, 시몬이 미래를 경험했다는 것 외엔 없었다.
“어떻게 회귀하게 된 것이냐? 네 성격상 금단의 마법에 손을 댄 것 같진 않은데.”
“모르겠습니다. 수명이 다해 죽음을 앞두고 있었는데, 눈을 떠 보니 과거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마법이 아니라는 것이냐?”
드뇌브 후작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궁금한 것도 많았다. 자신은 언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지, 그리고 언제 수명이 다해 눈을 감게 되는지.
시몬은 그 표정을 정확히 읽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여쭤보셔도 됩니다. 적어도 아버지에 대한 것은 전부 알고 있으니까요.”
“이젠 표정까지 읽을 수 있는 게냐?”
“설마요. 다만 이 상황이라면 궁금한 게 뻔할 테니까요.”
“없다.”
그것이 드뇌브 후작이 내린 결론이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만 철석같이 믿을 수 없다. 이미 너는 과거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
“그렇죠.”
“그렇다면 미래가 바뀔 가능성이 있겠지. 과거의 너였다면 지금쯤 황녀님과 약혼식을 올렸을 테니까.”
시몬은 새삼스레 감탄했다.
아버지가 아크튜러스 영지를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문의 위세 때문이 아니야. 스스로가 뛰어나시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직관을 갖추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시몬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배움을 얻었다.
“미안하구나. 처음부터 네 말을 믿어 주지 않아서…… 처음부터 네가 회귀했다는 걸 인정했다면 이렇게 황실과 날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지.”
“아닙니다. 오히려 미친놈 취급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래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 어떠냐?”
“나쁘지 않더군요.”
“전생을 거쳐 오며 나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을 것 같은데.”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저에 대한 반성이 컸습니다.”
“반성이라면?”
“제가 아끼는 사람들을 제대로 대하지 못했다는 게 가장 후회되더군요. 그래서 이번 생에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케나드에게 모질게 굴었군.”
시몬은 유독 케나드에 대해 집착했다. 그를 훌륭한 기사로 키우는 것을 넘어 가문을 잇게 하는 영예를 주고 싶어 했다.
그랬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북방으로 보내 평생을 그곳에서 굴렸습니다. 모니카 공녀에게도 못된 짓을 한 거죠. 케나드는 그곳에서 쓸쓸히 죽었습니다.”
“그랬구나…… 그래서 오늘 승계전이 열리게 된 거고.”
“라니에리와도 끝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도중에 버리고 말았죠. 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이긴 하지만, 결정을 내린 건 저였습니다.”
드뇌브 후작은 몇 번이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안개가 개고 햇살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 승계전의 결과를 바꿀 수 없음은 너도 잘 알 것이다.”
“당연하죠. 결과가 어떻게 나든 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네가 이기더라도 말이냐?”
여전히, 드뇌브 후작은 시몬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미소에서 시몬은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그 표정이 무엇인지 시몬은 잘 안다.
‘믿고 계신 게 있으신 모양이군.’
그러지 않고서 저런 표정을 지을 리는 없다.
과연 무엇일까?
한평생을 살다 다시 돌아왔는데도 놓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이기더라도 어쩔 수 없이 결과를 받아들여야겠죠. 일을 이렇게까지 키웠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 꼭 지키길 바란다.”
바로 그때, B조 3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외침이 울렸다.
“슬슬 가자꾸나. 로버츠의 경기일 거다. 아마 4강에서 너와 만나겠지. 실력을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가시죠.”
드뇌브 후작은 귀빈석으로 돌아갔고, 시몬은 대기석에서 관전했다. 때마침 모든 일을 처리한 라니에리와 로빈이 합류했다.
“지시하신 대로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조만간 모든 증거가 사라질 겁니다.”
“잘했다.”
“그보다 아까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겁니까? 주인님과 따로 계신 걸 보았습니다만.”
“일이 좀 있었다. 태자 전하께서 아주 대놓고 나서시더군.”
시몬은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라니에리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과거로 회귀했다는 걸 인정해 주셨다.”
“주인님께서 말입니까?”
“그럼 또 누가 있어?”
그러자 라니에리가 햇빛을 손으로 가렸다.
“오늘 날씨가 덥긴 한 모양이군요. 주인님께서 실언을 하실 정도라면 말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
“무예에 무지하다 하여 세상의 이치를 모르진 않습니다.”
“잘도 지껄이는군. 걱정 마라. 너도 곧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까앙!
때마침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B조 제3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