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도발 (1)
“짐마차를 확인해 보니 로데론에서 건너온 특산품이 잔뜩 있었다고 합니다. 굵직한 나무들인데, 그 안에 약을 밀반입한 모양입니다.”
“꼴에 구색은 갖췄나 보군.”
그렇게 대꾸하며 시몬은 귀빈석을 힐끔 바라보았다. 알퐁스 가문의 주인, 딜리토 백작은 껄껄 웃으며 과일을 먹고 있었다.
“아직 놈들에게 소식이 들어가진 않은 건가? 너무 태평한데.”
“행수가 파우스트 상단에 긴급으로 전서구를 보냈다고 하니 곧 딜리토 백작도 이 소식을 전해 듣게 될 겁니다.”
“그 정도 일이면 바로 태자 전하의 귀에도 들어갈 거고. 태자 전하와 황녀의 표정이 어떨까? 그 소식을 들으면 말이야.”
“아주 볼만할 겁니다.”
“기대되는군.”
시몬이 다시금 씨익 웃었다.
물론, 마약 밀수 정도로 황태자와 황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황실이 밀수에 개입했다는 것을 밝힌다고 해도 못 들은 척할 사람들이 잔뜩이다. 황실의 체면은 깎이겠지만 결정타를 먹일 순 없다.
전략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밀수했다는 엉뚱한 변명도 가능하다. 실제로 적국에 대량의 마약을 풀어 내부에서 무너뜨린 사례도 존재하니까.
‘무엇보다도 모든 권력을 틀어쥐기 시작한 황태자가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겠지.’
거기에 황녀도 실력자들을 풀어 방해할 게 뻔하다.
여기에서 선택지가 주어진다.
더 가서 끝을 볼 것이냐. 아니면 적당히 치고 빠질 것이냐.
사실 시몬은 처음부터 답을 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앞으로 남부 지역에 관심을 끊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제국의 후계를 바꾸려 하는 건 얻는 것에 비해 너무 리스크가 크다.’
만약 시몬이 아크튜러스 가문을 이을 생각이었다면 끝까지 갔을 것이다.
라니에리는 다소 다른 꿈을 꾸고 있긴 했으나, 어쨌든 시몬은 한적한 곳으로 낙향해 밭이나 일구며 허송세월할 예정이었으니까.
이 상황에서 일을 키우는 것은 아버지와 케나드의 앞길을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황녀를 법정으로 보내고 황태자를 끌어내린다 해서 얻는 직접적인 이익이 없다.
게다가 아직 가문이 준비되지 않았다.
아크튜러스 가문은 제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력으로 더욱 강해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든 상황.
기사들에게 새로운 비약을 복용시키고 진보된 아크튜러스 검식을 전수한다면 대륙 최고의 기사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오크족의 도움도 얻게 되었다. 유사시에 아주 중요한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리할 필요는 전혀 없지.’
그 부분만큼은 라니에리도 동의했다.
기사단 양성이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움직여도 늦지 않다. 가장 좋은 것은 그때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겠지만.
‘황태자와 황녀라면 뭐라도 트집을 잡아서 압박할 게 분명해. 아주 글러 먹은 놈들이니까.’
전생에서는 황녀에게 크게 데였다.
거기에 집중한 나머지 황태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심도 있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야망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회귀한 이후 지금까지 살아오며 접한 황태자는 그 어떤 사람보다 위험해 보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매우 잔혹한 사람이었다.
‘황제가 될 사람이 탐욕스러운 건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가문에 피해를 주면 안 되는 거지.’
당연히 시몬은 그런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힘의 논리가 대륙을 지배하는 시대.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왜 괴롭히는 거냐고 따진다 해도 돌아오는 것은 손찌검일 뿐이다.
이미 시몬은 황태자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금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상황.
그 부분에 대한 대비는 이미 모두 끝났다. 남은 것은 시간문제다.
“다음은 앤서니 잘렌할과 폴로 마이어드의 경기가 펼쳐지겠소! 선수들은 입장하시오!”
진행인의 외침과 함께 건장한 청년 둘이 무대 위로 올랐다. 두 사람 모두 검을 들고 있었다.
시몬은 별다른 감흥 없이 두 사람의 경기를 지켜보려 했다.
그때 라니에리가 팔을 툭 쳤다.
“공자님. 딜리토 백작을 보십시오.”
시몬이 고개를 돌렸다.
귀빈석으로 빠르게 달려간 전령이 딜리토 백작에게 귀엣말로 뭔가를 보고했다.
순간 딜리토 백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눈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게 사실이냐?”
“예. 지금 막 전서구를 통해 보고되었습니다.”
“허어.”
당황한 딜리토 백작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황태자에게 가지 못했다. 마침 축하주를 따르는 중이었고, 옆에는 드뇌브 후작과 여러 귀족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
“라니에리. 시선 돌려.”
두 사람이 동시에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찰나의 차이로 딜리토 백작이 시몬을 노려보았다.
시몬은 천연덕스럽게 연기에 들어갔다.
곧 열릴 경기에서 자신이 얻어 가야 하는 게 무엇인지 살펴보는 척했다.
축하주가 전해지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딜리토 백작이 조심스레 황태자 곁으로 다가왔다.
“전하. 실례지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 참 눈치가 없으시군. 아크튜러스 가문의 승계전보다 더 중한 일이 어디 있다 그러시나?”
농담조였으나 딜리토 백작의 표정은 좀처럼 웃지 못했다. 그걸 확인한 태자가 일어났다.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나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다.
시몬은 황태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을 똑똑히 눈에 담았다.
따당! 땅!
그사이 앤서니와 폴로는 격하게 검을 나눴다. 손과 얼굴에 핏방울이 튈 정도였다. 두 사람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보상이었다.
“태자 전하는 그 소식을 듣고도 웃으시는군.”
“과연, 보통이 아니십니다.”
자존심이 너무나도 강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시몬이 물었다.
“물건은 어디에 숨겨 뒀지?”
“일단 세레스 가문의 안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진 경의 말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절대란 없지. 태워 없애는 게 좋을 것 같다. 느낌이 좋지 않아.”
“바로 전하겠습니다.”
“일로스테 경은?”
“현재 저택으로 복귀하는 중입니다.”
라니에리가 전서구를 날리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시몬은 팔짱을 끼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따앙!
깔끔한 쇳소리와 함께 장검 하나가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승패가 갈렸다.
“승자, 앤서니 잘렌할!”
“와아아아아!”
최종 승리는 앤서니 잘렌할이 차지했다. 그는 3서클의 오러 유저였고, 잘렌할 가문의 검술을 완벽히 습득하고 있어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만큼 아슬아슬한 경기였다. 명승부를 지켜본 사람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시몬과 케나드의 경기를 본 사람들은, 아무리 그라고 해도 직계를 넘어설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검술을 잘 모른다고 해도 그 차이가 압도적이었으니까.
“잠시 휴식 후 B조 제3경기를 시작하겠소!”
다음 경기 준비를 위해 휴식이 주어졌다. 관전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서 뭐 하고 있나?”
황태자가 다가왔다. 그 뒤엔 오토 경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다.
시몬은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정중히 군례를 올렸다.
“견학하고 있었습니다. 8강에서 만날 상대의 실력을 살펴보고 있었지요. 다음 경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대의 실력이라면 굳이 견학하지 않아도 될 텐데?”
“방심은 금물이지요.”
“오토 경에게 들으니 소드 익스퍼트 경지에 오른 것 같던데, 그간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숨기지 않았습니다.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요.”
당돌한 대답에 황태자가 씩 웃었다.
“아주 천부적인 재능이군. 부러울 정도야…… 18살에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최근에 없었는데 말이지. 아아, 오토 경 자네는 익스퍼트의 경지에 언제 올랐나?”
“스무 살 때입니다. 전하.”
“오토 경보다 2년이나 빠른 건가? 과연 아크튜러스 가문의 장남은 대대로 뛰어나군. 드뇌브 경도 어려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과찬이십니다.”
시몬은 그저 겸양을 보일 뿐, 그 말을 부정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토 경은 그 태도가 무척 불쾌했다.
‘건방진 놈. 네가 익스퍼트의 경지에 빨리 올랐다고 해서 소드마스터의 경지까지 금방 갈 거라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오토 경은 알지 못했다. 시몬이 전직 소드마스터였다는 사실을.
‘조만간 너는 내 발아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것은 황태자가 의도하는 바였다.
카인 황태자가 지금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무력만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서로 이간질하는 능력.
그리고 사람의 약점을 쥐고 질투심을 자극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황태자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간계에 능했다. 그래서 다른 황자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기도 했다.
황태자는 오늘 꺼낸 이 한마디가 불행의 씨앗이 되어 먼 훗날 아름다운 꽃을 피울 거라 자신했다.
그사이 황태자가 은근한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뭐 숨기는 거 없냐는 그런 눈빛으로.
끝까지 시몬이 모른 척하자, 황태자가 운을 뗐다.
“방금 전령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네. 알데바란 영지에서 좀 사고가 난 모양이더군.”
“사고라 하시면.”
“내가 개인적으로 투자한 상단이 있는데 말이야. 뭐, 여러 상단에 투자는 하고 있지만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곳이 있지. 파우스트 상단이라고 들어 봤나?”
“알고 있습니다. 힐스트롱 가문에서 출자한 상단이라고 들었습니다.”
시몬은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넘어 은밀히 획득한 정보까지 말했다.
황태자의 표정 변화를 보고 싶었기에.
“잘 아는군.”
“친척의 일이니 챙기고 있습니다. 그쪽에서는 좀 비밀리에 만든 것 같지만 말이죠.”
시몬은 직계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가문의 사정까지 내가 간섭할 순 없지. 어쨌든, 로데론의 특산품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크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네. 물건을 모두 털렸다고 하는군.”
“저런, 안타까운 일이군요. 알데바란 남부에는 오크들이 많습니다. 매우 위험한 곳이죠.”
“할 말은 그것뿐인가?”
시몬은 태연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크튜러스 가문은 오크족과 연합을 맺었다. 그리고 오크들이 상단을 습격했지. 그들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그대의 가문에게도 책임이 있다 보는데?”
시몬은 속으로 웃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
가문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었다면 시몬이 아니라 드뇌브 후작에게 해야 했다.
지금 아크튜러스의 지배자는 드뇌브 후작이었으니까.
즉, 지금 이 행동은 마약이 유실된 것을 시몬이 한 짓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채 말이다.
‘모조리 태우라고 명하길 잘했어.’
아마 지금쯤이면 황태자 직속 비밀 조직이 움직이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황녀는 움직였다. 곁을 지키던 제너릭 경이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다.
“전하. 조금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전쟁 이후 오크 연합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지금 킬스톤에 남은 것은 우리와 동맹을 맺은 연합과 다른 부족입니다.”
“책임을 돌리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어떤 품목이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아크튜러스 상단을 통해 즉시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로데론의 특산품이라면 떠오르는 게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