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데저트스톰 (2)
“헉, 허억! 헉!”
피비린내로 가득한 싸움터에서 이탈한 블라이스는 정말 정신없이 내달렸다.
본능대로 달렸을 뿐인데, 저 사막 먼 곳에서 흐릿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블라이스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는지, 내달리는 내내 뒤를 힐끔 바라보며 추격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무도 따라붙지 않았다.
블라이스는 재차 박차를 가했다. 임무는 완벽하게 실패했으나 지금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서, 어서 이 사실을 상단에 알려야 한다!’
공교롭게도 오크와 데저트스톰이라는 비밀 결사가 동시에 공격을 해 왔다.
이들이 한패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상관없었다.
로데론에서 건너온 매우 중요한 물건이 송두리째 그들의 손에 넘어갔으니까.
이것들이 모조리 사라지기 전에 상단에 알려 대책을 세워야 했다.
“멈추시오!”
말 하나가 빠르게 접근하자 안가를 지키고 있던 정보원들이 무기에 손을 얹었다. 여차하면 단검을 날릴 기세로.
“블라이스다! 공격하지 마라!”
“뭐요? 블라이스 행수님이라고요?”
“보면 모르나!”
블라이스가 말에서 내려 헐레벌떡 뛰어왔다. 정보원들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블라이스가 이끄는 무리는 지금쯤 사막을 가로질러 알퐁스 백작가로 향해야 했기에.
블라이스는 겁먹은 채로 자신의 신분패를 꺼내 보였다. 신분이 확인되자 정보원들이 깜짝 놀랐다.
“행수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온몸에 피가 가득합니다!”
“습격을, 습격을 당했다!”
“습격이라고요?”
“오크 놈들이 덮쳤다! 허억, 큭! 모조리 죽었다. 거기에 데저트스톰이라는 놈들도 있었지!”
“데저트스톰이라니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서 상단주께 알려야 한다!”
“아, 예! 준비하겠습니다.”
정보원들이 전서구를 준비했다.
이곳 안가는 파우스트 상단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곳이었다. 급한 일이 생길 경우 바로 상단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서구를 띄운다.
지금까지 한 번도 가동된 적 없는 전서구가 처음으로 활용되었지만, 정보원들은 차분히 대응했다.
정보원 하나가 펜을 건넸다.
“내용을 쓰십시오.”
종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전서구의 발에 달고 가려면 크기를 줄여야 했기 때문에.
그래서 블라이스는 최대한 간결하게 적었다.
오크와 데저트스톰이라는 단체에 연달아 습격을 받았고, 데저트스톰이라는 놈들에게 물품을 모조리 빼앗겼다고.
“어서 빨리 상단에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종이를 정보원에게 넘긴 블라이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푸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둘기가 밤하늘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두 정보원이 벽에 기댄 채 쉬고 있던 블라이스에게 다가왔다.
“행수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물건이 모두 털리다니요. 데저트스톰이라는 곳은 저희도 처음 듣습니다만.”
“말도 말게. 정말 잔인한 놈들이었어.”
블라이스는 다시금 소름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그림자를 밟고 접근했지. 사람 죽이는 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놈들이야. 아마도 고도로 훈련된 조직이겠지.”
머릿속으로 의심 가는 몇몇 가문이 떠올랐다. 대표적으로 세레스 가문이 있었다. 이들의 정보력과 암살력은 남부 최고였으니까.
하지만 복면인들을 그 가문에서 보냈다는 증거가 없었다.
모조리 죽임을 당했으니까.
“그렇다면 배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것까진 나도 모른다. 앞으로 조사해 봐야 할 일이지.”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긴장을 푸는 덴 이게 최고죠.”
“후, 고맙네.”
블라이스는 정보원이 건네는 술을 벌컥 들이켰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뻣뻣해져 있던 몸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크 놈들에 이어 연달아 습격받으셨다고 했는데, 아까 말씀하신 데저트스톰과 오크 놈들이 서로 연합한 겁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오크들은 마치 그 복면인들과 상관없다는 듯 시체만 챙기고 돌아갔으니까.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어차피 상행이 움직이고 있다는 건 서로 알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블라이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다시금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다음 답했다.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후우, 어쨌든 거의 동시에 습격을 받은 것과 다를 게 없으니 말이야.”
“최근 오크 놈들이 아크튜러스 가문과 손을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에서 뭔가 수를 쓴 게 아닐까요? 아크튜러스에서 키우는 단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글쎄.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순간 블라이스는 강한 위화감을 받았다.
‘이 자식들, 뭐지?’
정보원들이 유도 신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들은 말단 요원인데도 불구하고 상사처럼 굴었다.
그런데 그 위화감은 단순히 심리적인 것에만 기인하지 않았다.
‘……어?’
몸이 점점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다. 팔부터 시작해 다리까지, 점점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있었다.
“이, 이봐. 몸이 이상하군. 뭔가 약 같은 거 없나?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정상입니다.”
“뭐?”
시야가 점차 뿌옇게 변했다. 그 와중에 블라이스는 정보원들이 씨익 웃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설마?’
이곳은 파우스트 상단에게만 허락된 안가였다. 하지만 블라이스는 눈앞에 있는 정보원들이 파우스트 상단의 사람들이 아님을 직감했다.
“실례해서 미안합니다. 행수님의 필적이 필요해서 말이죠. 이제 전서구를 날렸으니 더는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짐이 되지요. 그러니까 슬슬 죽어 주십시오.”
“이, 이놈들……! 허억!”
이제 숨까지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블라이스는 필사적으로 숨을 쉬려고 했지만, 경직의 속도가 더 빨랐다.
“이봐. 어서 기름 뿌리고 불붙여. 슬슬 철수해야 하니까. 본대 놓치면 우리만 개고생이야.”
두 사내가 얼굴에 복면을 썼다. 그제야 블라이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랬다.
이들은 파우스트 상단의 정보원들이 아니라 데저트스톰이라는 이름 모를 단체의 암살자들이었다.
“이노오오옴……!”
블라이스는 손을 뻗으려 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곧 사방에 기름이 끼얹어졌다.
“자, 그럼 따뜻하게 쉬고 계십쇼. 사막의 밤은 아주 추우니까 지내기 좋을 겁니다. 크흐흐흐.”
화르르륵!
불이 붙었다. 사막의 모래 아래 마련된 안가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킬스톤 사막의 밤은 그만큼 어두웠으니까.
“이쯤이면 됐다. 이동하지.”
이것으로 증거는 남았지만 증인은 남지 않게 되었다.
안가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빠르게 이동해 본대에 합류했다.
본대는 노획한 밀수품을 가지고 매우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일로스테 님. 임무 완수했습니다. 행수는 죽었고 안가를 깨끗이 태웠습니다.”
“수고했다.”
이 모든 것이 계략이었다.
라니에리와 진이 세운 계획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교하게 흘러갔다.
‘데저트스톰’이라고 불린 조직은 사실 진의 세레스 가문이 오래전부터 키운 비밀 조직이었다. 딱히 이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 임무에서만큼은 ‘데저트스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게다가 이곳은 킬스톤의 사막.
알데바란의 영지에 속하는 곳이라 세레스 가문의 손바닥 위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었다.
라니에리의 계책도 훌륭했지만, 진의 정보력이 없었더라면 성공하기 불가능했을 작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크튜러스 영지에 있는 딜리토 백작에게 물건이 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 소식이 황태자와 황녀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것.
계획이 완벽했기에 보기엔 쉬워 보여도 이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일로스테 남작은 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해냈다.
황녀를 향한 증오심 덕분이었다.
‘어떻게든 네년만은 내 손으로 끌어내리고야 말겠다. 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다짐한 일로스테 남작은 다시 복면을 쓰고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축하주를 단번에 비운 시몬은 심장에 박힌 오러 서클을 감지했다.
진한 술기운이 퍼져 나갔으나, 오러 서클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예상대로군.’
카인 황태자가 내린 술은 오러 브레이커가 섞이지 않은 술이었다. 예상대로 4강전에서 로버츠를 만나게 되면 그때 사용할 생각인 듯했다.
“오랜만이군요. 시몬 공자님.”
휴스턴이 검날로 갑옷을 툭 치며 예를 갖췄다.
“날 만난 적이 있던가?”
“그럼요. 5년 전쯤인가, 그때 파티가 열렸을 때 참석했었지요.”
“아아, 미안하군. 워낙 많은 인연들이 있어서 말이야.”
“몸은 좀 어떠십니까? 한때 후유증이 좀 심했었다고 하던데 말이죠.”
첫 상대 휴스턴은 교묘하게 심리전을 걸어왔다. 딱히 시몬에게 악감정을 품지 않았지만, 이 경기에서는 이겨야 했으니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내가 오크 족장을 모조리 베어 버린 건 못 들었고?”
“전공이야 늘 부풀려지기 마련 아닙니까?”
휴스턴의 검에 오러가 깃드는 듯하더니, 붉은 화염이 감겼다.
“팔콘 자작가도 모아 둔 재산이 꽤 있었나 봐? 괜찮은 아티팩트로군.”
“놓칠 수 없는 기회니까 말이죠.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오늘 공자님을 쓰러트리고 당당히 후계위에 오르도록 하겠습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 있나. 어차피 네가 이길 일은 없을 텐데.”
그때 경기가 시작되었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시몬의 검에도 강렬한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앞서 케나드가 보여 주었던 경지를 아득히 넘는 오러가 뿜어져 나오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군요…… 두 아들 모두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던 겁니까?”
“어쩐지, 시몬과 케나드 공자가 아티팩트를 들고나오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소.”
“자신감이 있었군!”
특히나 시몬의 실력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드뇌브 후작의 표정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장남은, 또다시 예상을 깨고 말았다.
‘대체 너의 한계는 어디까지인 것이냐, 시몬! 얼마나 더 나를 놀라게 할 생각이지?’
마치 그 질문을 들은 것처럼, 입꼬리를 올린 시몬이 앞으로 쇄도했다.
갑작스러운 난격.
엄청난 오러에 휴스턴은 긴장했지만,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평범한 장검을 들고 나왔고, 자신은 아티팩트를 쥐고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차이는 충분히 상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몬의 검과 자신의 아티팩트가 서로 맞부딪힐 때까진.
콰아아앙!
“크헉?”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내부가 진탕되는 느낌이 들었다.
검과 검이 부딪혔을 뿐인데.
푸확!
휴스턴이 피를 토했다.
순간 휴스턴의 신형이 흔들렸다. 명백한 빈틈. 하지만 시몬은 공격하지 않고 조용히 검을 검집으로 갈무리했다.
탁!
검과 검집이 맞물리며 내는 소리와 함께 휴스턴이 쓰러졌다. 아예 기절하고 말았다.
“시몬 공자, 승리!”
판정이 내려지고, 경기는 눈 깜짝할 새에 끝났다. 귀빈석을 향해 예를 취한 시몬이 라니에리와 로빈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봤지? 방심은 실력 없는 것들이나 하는 거라고. 약속 지켰다.”
“다행입니다. 저도 약속을 지켰다고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서.”
시몬은 10초 안에 경기를 끝내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라니에리도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다. 시몬의 눈에 호기심이 맺혔다.
“방금 일로스테 경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라니에리는 먼 길을 날아온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사막에서 날아왔군. 좋은 소식이지?”
“물론이죠.”
방금 승리한 것보다 더욱 짜릿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