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후계자들의 토너먼트 (3)
“망치를 들고 나왔네?”
린델론은 커다란 한 손 망치를 손에 쥔 채였다. 왼손엔 적당한 크기의 방패를 들고 있었다.
거기에 고급스러운 천으로 만든 푸른색 망토까지 걸친 상황.
얼핏 보기엔 교단의 성기사 같은 느낌을 풍겼다. 체구가 큰 것도 한몫했다. 젊은 나이에도 수염을 멋지게 길러서인지 나이가 좀 들어 보였다.
“수련을 제법 한 모양이야. 얼굴에서 고생한 티가 역력히 느껴지는군. 올해로 열일곱 살일 텐데, 서른 중반의 외모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건 그거 나름대로 슬픈 이야기군요.”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기는 어렵겠지만 전사로서는 아주 훌륭한 자세지.”
그때 귀빈석에 있던 황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황녀가 웃으며 이쪽을 향해 손짓했다. 잠시 오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시몬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황녀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마무리했다.
주변의 귀족들은 그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여전히 사교계에서는 시몬과 황녀가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쇼윈도 커플의 정석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린델론 공자는 원마운트 가문에서 기사 서임을 받았고, 최근에 대대적으로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명성을 쌓고 있는 신예입니다.”
“신예는 아니지. 그 정도 찬사를 들으려면 로빈 경 정도는 되어야지. 안 그래?”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로빈은 곁에 있었다. 모시는 두 사람에게 직접적인 칭찬을 들으니 몸 둘 바를 몰랐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자격은 충분했다.
그릇이 좋으면 어떠한 것도 담을 수 있는 법.
하늘이 내린 천재적인 육신은 빠르게 오러 서클을 형성시켰고, 지금은 3서클의 오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시몬의 도움이 절대적이긴 하다.
하지만 오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스스로의 과제이기도 했다. 로빈은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과제에 임했다.
“케나드 녀석. 이렇게 보니까 정말 의젓한데? 이대로 가주 해도 되겠어.”
경기장을 바라보던 시몬이 씨익 웃었다.
“뒷말은 조심하십시오.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차피 저기까진 안 들려.”
“앞에 하신 말씀은 동감합니다. 거의 매일 뵈었는데, 뵐 때마다 성장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다 내 덕이지.”
서클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진보된 아크튜러스 검식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케나드의 물리적인 능력이 상당히 올라갔다.
골격과 체형이 새로운 검식에 맞게 조금씩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
무예와 조금의 인연도 없는 라니에리가 그렇게 느낄 정도라면, 다른 기사들은 굉장히 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태자 전하와 후작 각하께 예를 갖추시오.”
기사 하나가 엄숙히 선언했다.
경기장에 선 케나드와 린델론은 무기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귀빈석을 향해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들은 기꺼이 내가 따르는 술을 받게나. 승리의 여신이 허락하시고, 황제 폐하께서 준비하신 특별한 술이라네.”
황태자의 발치엔 술병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황실에서 가져온 매우 귀한 술이었다.
이미 앞선 경기에서 사용해 빈 것도 있고, 가득 찬 것도 있었다.
카인 태자는 그중 하나를 집어 술잔에 술을 채웠다.
또르르륵!
잔이 채워지자 황실근위대장 오토 경이 잔을 들고 경기장으로 내려가 두 사람에게 전했다.
잔을 받은 케나드와 린델론이 일어나 외쳤다.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께 무궁한 영광을!”
“멋진 경기로 보답하겠습니다. 태자 전하!”
케나드와 린델론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잔을 받아 술을 마셨다.
바로 그때, 동생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시몬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상황. 하지만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두 형제는 해약을 먹기 전에 사전에 약속했다.
만약 오러 브레이커가 섞인 술을 마시면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터는 시늉을 하라고.
그런데 케나드는 술잔을 비우고 잔을 다시 반납할 때까지도 갑주를 털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독이 섞이진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8강까지는 평범한 술이 나오겠군요. 4강에서 카펙 공자와 만날 때 오러 브레이커가 섞인 술을 사용할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나름 머리를 썼네.”
린델론이 들고 있는 거대한 해머. 그것은 평범한 대장장이가 만들어 낸 무기가 아니었다.
시몬의 예민한 기감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특별한 기운을 감지해 냈다.
‘아티팩트.’
자세히는 모르지만, 특별한 마법이 깃들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녀석이 들고 있는 건 마법 무기다. 뭐, 아무리 방계라고 해도 가문을 이을 사람이 아티팩트 하나 든다고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첫 경기부터 방심할 수 없겠군요.”
“방심이라기보다는 오러 사용을 유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중요하지. 일반적으로 검으로 둔기를 상대할 순 없다. 오러를 입히지 않는 이상 깨져 버리거든.”
시몬의 친절한 설명 덕에 라니에리는 배후 세력의 소소한 음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여간 치밀하다니까. 괜히 태자 자리를 굳힌 게 아니지.”
1차전부터 둔기를 쓰는 까다로운 상대를 넣어 오러 소모를 크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그렇게 되면 오러 브레이커로 인한 중독 증세를 얼버무릴 수 있게 될 거야. 초반에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서 오러를 많이 사용했다는 식으로.”
“과연 그렇군요.”
“하지만 놈들의 정보력엔 한계가 있지.”
‘회귀’라는 무궁무진한 변수가 있으니까.
오크와의 전쟁을 거치고 시몬에게 새로운 검식을 전수받으며 케나드는 3서클의 장벽을 허물고 4서클에 진입했다.
4서클은 소드 익스퍼트 초급으로 분류된다.
소드 익스퍼트 정도의 경지라면 별다른 심사 없이도 황실근위대에 바로 입단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로 인정받는다.
기사들은 강해지면 소식지를 뿌려 자신의 실적을 널리 알린다.
하지만 케나드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케나드가 소드 익스퍼트에 접어들었다는 걸 아는 건 우리뿐이지. 심지어 아버지도 모르고 계신다.”
“으음. 단순히 오러를 소모시키는 걸로는 타격을 줄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양으로 하는 싸움은 상대가 안 되지. 3서클과 4서클의 차이도 까마득한데, 놈들은 고작 2서클 내외에 불과하니까.”
라니에리는 내심 감탄했다.
시몬이 새로운 비약의 조제법을 개발하고, 그것으로 가문의 기사들을 성장시키려 한다고 들었을 때의 놀람과는 결이 달랐다.
강해지는 것보다 강한 것을 숨기는 것이 더욱 어렵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인 ‘공명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우월해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군림한다.
하지만 시몬도 케나드도 모두 그러한 기본적인 욕망을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다. 날을 바싹 세워 한 방을 노리는 포식자 같았다.
“두 사람은 무기를 드시오.”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무기를 든 케나드는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좋은 승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 수 배우는 자세로 싸움에 임하겠습니다.”
“그대의 명성은 본가에서도 들었습니다. 오크족의 대군과 맞서서도 물러섬이 없었다고 하던데, 그것이 허명인지 진실인지 오늘 확인할 수 있겠군요.”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상대의 목소리.
케나드는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도 않았다.
이미 새로운 검술의 살검 단계에 들어섰다. 아버지와 형님을 제외한 누구라도 베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십시오. 내 망치는 생긴 것보다 자비롭다오.”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케나드가 검세를 취했다.
상대는 방패를 들고 있었으나 언제 해머를 휘둘러 검을 망가뜨릴지 알 수 없었다. 자연스레 오러도 같이 끌어 올렸다.
구오오오!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며 케나드의 온몸을 가득 채웠다. 응당 가장 많이 몰린 곳은 그의 검이었다.
순간 귀빈석에 술렁였다.
가장 놀란 것은 드뇌브 후작이었다.
‘케나드의 오러는 3서클의 오러가 아니다. 이건 분명 그 이상의 단계……!’
후작의 시선이 시몬을 향했다.
‘너, 대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두 사람이 최근 비밀 수련을 한다는 것은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문을 잇지 않겠다는 것을 뺀다면, 지금까지 시몬이 보여 준 것은 모범적인 장남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사랑스러운 부인인 미온의 목숨을 살린 것을 넘어 동생을 검술 천재로 만들고 말았다.
이 정도라면 케나드가 가문을 잇는다고 해도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터.
현 가주인 자신조차도 16살에 4서클에 들어선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었으니까.
‘이 상황까지 내다본 것이냐? 정녕 네가 회귀했다는 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한때는 시몬이 꿈을 꾼 줄 알았다. 아주 길고 지루해서 한 사람의 인생과 걸맞을 정도로 긴 꿈을.
그러나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는 법.
아크튜러스의 적법한 주인은, 장남이 했던 충격적인 선언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오러야!”
“보통이 아닌데? 차남이 이 정도라니, 방계들 쉽지 않겠어.”
“그러게 말이네. 케나드 공자님, 엄청 성장하셨군!”
그뿐만 아니라 비슷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볼만해졌다.
제1기사단장 파월과 제2기사단장 한스는 감탄했다.
장남은 심검의 묘리를 깨우쳤는데 차남은 소드 익스퍼트 경지에 올랐다.
아크튜러스 가문이 황금기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런 천재들과 동시대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기도 했다.
한편,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오토 경도 상황을 파악한 건 마찬가지.
그가 태자에게 귓속말했다.
“우리의 정보와 다릅니다. 케나드 공자는 최소 4서클입니다.”
“그래?”
하지만 카인 태자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저어 넘겼다.
어차피 준비한 오러 브레이커는 통상적인 약이 아니다. 굉장히 강화된 것이기에, 오러를 완전히 줄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지켜보자고. 앞으로 경기는 많이 남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달리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든든하군.”
바로 그때, 오러를 끌어 올린 케나드가 달려들었다.
너무나도 빠른 공격이었다.
타이밍을 잡아 해머를 휘둘러 검에 타격을 주려던 린델론은 헛숨을 들이켜며 황망히 방패를 들었다.
콰과광!
검이 방패에 가로막히며, 바위가 철판을 찌그러트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방패가 찌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린델론은 짜릿한 통증을 느꼈다. 만약 오러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지 않았더라면 손목이 으깨졌을 것이다.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근접해 있던 케나드는 검을 회수하는 것과 동시에 방패에 무게를 실었다.
‘실드 차지? 무모하군!’
상대가 검을 들었다면 모를까, 주무기는 둔기였다. 거기에 아티팩트급의 무기.
만약 린델론이 최대한의 오러를 실어 해머로 가격한다면, 실드 차지가 깨지면서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린델론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강하긴 하지만 역시 애송이군. 한 방에 날려 주마!’
그가 모든 오러를 해머로 집중시켰다.
번쩍!
그때 마법 효과가 발동되며 해머에 차가운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