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후계자들의 토너먼트 (2)
“분명 시몬은 케나드가 이걸 거라고 했습니다. 그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이유로 말이죠.”
처음엔 시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시몬보다 더한 재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시몬도 어려서부터 검식의 묘리를 깨달은 천재 중의 천재였으니까.
하지만 최근 케나드의 서클을 살펴보곤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시몬을 능가할지도 모르는 천재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고.
거기에 오크와의 전쟁을 거치며 잠재력이 폭발했다. 완전히 감을 잡은 것이다.
물론 시몬이 비약을 먹여 서클을 빠르게 확장시킨 탓도 있지만, 케나드에게 잠재력이 없었더라면 그런 판단을 내리진 못했을 터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지.’
황태자가 방금 말한 것처럼, 시몬이 심검의 경지에 올라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드뇌브 후작은 다른 이유를 들었다.
“시몬은 잘 모를 겁니다. 케나드가 얼마나 자기를 동경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동경한다고 해서 승패가 좌우될 정도라면 그 어떤 가문도 형제의 난을 겪지는 않겠지. 동경이야말로 흔한 위선이 아닌가?”
황태자가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자리를 탐내려던 동생을 베어 낸 전력이 있었다.
평소 황자들은 태자인 자신을 우러러보며 동경한다 말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눴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이 기어오르는 건 못 봐 주겠더군. 마치 하늘이 자기의 편인 것처럼 구는 것도 구역질 나고 말이네.”
“……전하.”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아아. 미안하군. 이거 경 앞에서 쓸데없는 소릴 했어. 괜히 감정 이입이 되어 가지고. 아무튼 그러니까 경은 시몬이 우승할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글쎄요. 짐작일 뿐입니다. 결과는 봐야 알겠지요. 또 압니까? 전혀 이름 없는 자가 두각을 나타낼지.”
그때 기사단장 파월과 한스가 나타났다. 두 기사는 뮬라타를 데리고 드뇌브 후작을 찾았다.
뮬라타는 로브를 벗은 상태.
모두의 긴장한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주군. 여쭐 것이 있습니다. 뮬라타 대족장은 어디에서 참관하게 하면 좋겠습니까?”
드뇌브 후작은 뮬라타의 합석을 허가한 상황.
하지만 자리가 애매했다.
대족장이라는 지위를 따지자면 고위 귀족에 속하기 때문에 이곳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는 황태자가 있었다.
“이곳에는 태자 전하께서 계시니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아 주는 게 좋겠군.”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드뇌브 경.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카인 태자가 손을 흔들며 끼어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오크족의 대족장인데 하급 귀족들과 같이 앉게 할 수는 없지. 이쪽으로 자리를 내어 주게.”
선심 쓰듯 말했다.
그와 동시에 오토 경을 비롯한 황실근위대 기사들이 더욱 촘촘하게 황태자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드뇌브 후작은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손짓했다. 뮬라타는 후작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A조 1경기를 시작하겠소! 선수들은 연무장으로 입장하시오!”
황태자는 나른한 표정으로 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중갑을 걸친 두 청년이 그곳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 * *
철컥!
A조 경기가 치러지는 사이, 시몬은 방에서 무장하고 있었다.
라니에리는 혹시 모르니 미리 준비하고 나가서 참관할 것을 권했지만 시몬은 단번에 거절했다.
“어차피 잔챙이들 싸움이야. 봐도 도움 안 된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시몬은 로버츠와 카펙 두 사람조차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듯했다.
로이드 가문에서 만들어 온 해약은 이미 복용한 상황.
케나드도 나가기 전 한 알 복용했다.
약효는 수일 이상 지속되고, 오러 브레이커가 체내에 침투해 효과가 발동되면 자연스럽게 해독되기 때문에 미리 먹어 두었다.
그때 밖에서 함성이 울렸다.
A조 1경기의 승패가 난 모양이다. 시몬은 다른 조였기에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케나드가 3경기니까 그때까진 나갈 거야. 그러니까 잔소리는 그쯤 해라.”
“잔소리가 아니라 조언입니다.”
“그게 그거지 뭐. 하, 그런데 이거 엄청 거추장스럽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천 옷 하나 걸치고 나가고 싶은데.”
시몬은 팔을 빙글 돌렸다. 그때마다 철컥거리며 쇠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전쟁에서도 입지 않았던 중갑을 착용했다. 오늘만큼은 평상복을 입고 나간다고 우기지 못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주군.”
진이 속이 빤히 보이는 아첨을 했다. 시몬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나가서 정보나 좀 더 수집해 오지그래? 요즘 세레스 가문 실적이 영 형편없던데.”
“주인님께서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계신데 다른 짓을 하는 건 불충이죠.”
“실적이 나쁜 건 불충이 아니고?”
“로데론 섬을 출발한 물건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는 저도 꼼꼼히 체크하고 있답니다.”
“아 맞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시몬이 궁금하다는 표현을 쓰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게 잘 싸우면서 전에 중독시킬 때 왜 실패한 거야? 내가 오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나?”
“방심했으니까요. 뭐에 홀린 것처럼 확신이 섰어요. 이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요.”
내 사람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함께 있던 드비안느는, 왜인지 모르게 그 표현이 불쾌했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어요. 저에겐 큰 기회가 되었으니까요.”
“해약 달라고 울고불고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안 그래서 좀 실망이 컸지.”
진은 보름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보름마다 해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몬은 일부러 해약을 보내지 않았다. 진이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고 싶어서.
그런데 진은 너무나도 태연히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해약을 먹은 지 보름이 훨씬 지났는데도 말이다.
“드레이크의 피가 해독제로도 쓰인다는 건 바로 조사해서 알아냈어요. 주군께서 선물이라고 하셨는데 신경이 좀 쓰이더라구요?”
“그래도 확신할 순 없었을 텐데? 그게 베텔게우스 가문의 독까지 치료한다는 정보는 없었을 테니까.”
“주인님을 믿었어요. 무엇보다도 제 가치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로 철저한 기회주의자군.”
“칭찬 감사해요.”
시몬은 픽 웃고 말았다. 이번엔 라니에리에게 물었다.
“그거, 덮치는 시기는?”
“준비는 완벽합니다.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바로 전해지려나?”
“이곳엔 딜리토 백작도 와 있습니다. 분명 초지급으로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그쪽 입장에선 보통 일이 아닐 테니까요.”
대량의 마약이 유통될 뻔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제국이 발칵 뒤집혀질 것이다.
“놓치면 혼나는 거 알지?”
“물론입니다.”
라니에리는 오랜만에 자신감을 보였고, 진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알데바란의 남부를 지나가야 해요. 알데바란의 모든 정보는 저를 거치게 되어 있죠. 놓칠 일 없으니 염려 마세요.”
시몬은 굳이 더 잔소리하지 않았다.
라니에리가 주도하는 일이다. 거기에 복수심에 사로잡힌 일로스테 남작도 함께다.
다른 곳도 아니라 소중한 곳을 잘리고 말았다. 그 복수심은 누구보다도 클 것이다.
“다 끝났습니다. 공자님. 어떠십니까?”
“정말 불편하군.”
방어구 장착을 마치고 건틀릿까지 착용했다. 그것만큼은 가죽 장갑으로 바꾸려다 그만두었다.
이젠 검을 고를 차례.
“평소 쓰시던 검을 대령했습니다.”
시종 두 명이 검을 목제 받침대에 들고 나타났다. ‘환영의 검’과 일반 장검이었다.
시몬은 습관적으로 ‘환영의 검’을 집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아크튜러스 장자가 승리에 눈이 멀어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았다는 뒷말이 나오는 게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5서클에 접어들었으니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 상황이고.’
‘환영의 검’이 끌어 올릴 수 있는 오러의 한계는 5서클까지다. 시몬은 이미 영약을 섭취해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인 5서클에 도달한 상황.
그래서 시몬은 평범한 검을 택했다.
“평소 쓰시던 것이 아니군요.”
“나도 나름 변수를 주고 싶어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시몬은 손을 저어 시종들을 물렸다. 방에는 라니에리와 드비안느, 그리고 진 이 세 사람만 남았다.
세 사람의 표정을 살피던 시몬이 웃었다.
“왜들 그렇게 분위기 잡고 있어? 전쟁터에 나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부담스럽게 말이야.”
“걱정돼서 그렇죠. 그 엄청난 해독제까지 드셨는데 걱정을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녜요?”
드비안느는 평소처럼 고압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썩 고마웠다.
물론 겉으로 티를 내거나 하진 않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황실과 싸우는 건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래야 태자 전하께서 서운해하지 않으실 테니까.”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하는 게 정말 옳은 일인지…….”
“가문을 위하는 입장이라면 옳은 일은 아니지. 못 본 척 넘기는 게 충신의 자세라고 생각했을 테니.”
하지만 시몬은 달라졌다.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는 소꿉친구들이었다. 한없이 진지하던 사람이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철학적으로 변할 때가 있었다.
“이번 일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
“공자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응원하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성공해서 황도의 근사한 곳으로 시녀 자리를 알선해 줄 테니까.”
“됐네요. 이제 그건 포기했어요. 모시던 가문이 황실하고 척졌는데 퍽이나 자리가 나겠어요. 약이나 팔아서 부자 될래요.”
“하하하. 그것도 나쁘지 않군.”
시몬이 검을 허리춤에 걸친 뒤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대연병장으로 나가니 마침 3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케나드와 린델론의 경기였다.
“제때 맞춰 나왔네.”
시몬은 출전 선수이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대기했다. 진은 타이온 후작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드비안느는 헤라를 모셨다.
시몬의 곁에 남은 사람은 라니에리와 로빈뿐이었다.
“상황은?”
“1경기는 가울 벨로린의 승리였습니다. 2경기는 예상대로 카펙 공자가 승리했지요.”
“케나드가 3경기니까, 이겨서 올라간다면 4경기 승자와 맞붙게 되겠군.”
“4경기 승리는 판다이크 공자가 차지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진 경은 뭐래?”
“제 생각과 같습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브레인이 둘로 늘어 교차 검증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판다이크 공자도 케나드의 상대는 되지 못할 거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케나드는 4강에서 카펙과 맞붙게 되겠군.’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와 정황을 분석해 보면, 황실의 개입은 4강부터 시작일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겪어 보지 못한 미래지만, 반드시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간다.’
시몬은 덤덤한 눈으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3경기의 주인공, 케나드와 린델론이 절도 있게 무대 위로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