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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92화 (92/120)

92화: 후계자들의 토너먼트 (1)

이른 아침, 아크튜러스의 수도에 거대한 몸집을 지닌 자가 나타났다.

“크르르르…….”

온몸을 로브로 가리긴 했으나 그 위압감과 흉폭함은 쉬이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크 연합의 대족장 뮬라타는 당당히 아크튜러스 저택을 향해 말을 몰았다.

굳이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지 않고서 말이다.

시몬은 그에게 특수 마차를 제작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뮬라타는 단번에 거절했다. 숨는 건 오크들의 방식이 아니라고 하면서.

“오, 오크?”

“오크족이다! 도끼를 메고 있어! 피? 피까지? 사람 피인가?”

“쉿! 조용해! 이쪽을 보잖아!”

뮬라타가 나타나자 시민들이 당황했다.

일부 시민들은 근처에 있는 경비대에 가서 오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경비대 기사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요?”

“오크가 나타났단 말이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싸우지 않았소? 내 사촌인 찰스가 놈들의 도끼에 맞아 죽기도 했단 말이오!”

“으음, 그건 애석한 일이군. 명복을 빌겠소. 그러나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오. 지금은 전쟁이 끝났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지.”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건 아니잖소?”

“더 많이 죽을 수도 있었소. 하지만 서로 양보했기에 이런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이오.”

기사는 전사자에 대한 예를 갖추면서도 엄숙히 말했다.

“영주님께서 특별법을 선포하셨소. 이종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지. 비록 우리와 싸움을 벌인 종족이긴 하나, 지금은 동맹 관계요. 그러니 소란 피우지 말고 돌아가시오.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내 사촌이 죽었다니까요!”

“나는 아들을 잃었소.”

그 한마디를 꺼낸 기사는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을 잃었다는 말에 시민들은 더는 항의할 수 없었다. 어찌 혈육을 잃은 슬픔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일은 어렵게 찾아온 평화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거요. 그래야 우리의 이웃들이 안전할 수 있을 테니까. 또한 그것이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은 전사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오.”

결국 시민들은 멀리서 뮬라타가 지나가기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덤비는 인간들은 없군. 한둘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덤빈다고 해도 뮬라타는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정당한 결투라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크튜러스 저택에 다다를 때까지 결투를 신청하는 용감한 인간은 없었다.

남은 변수는 황실근위대.

지금 아크튜러스 저택에는 황태자와 황녀가 머물고 있다.

그뿐이 아니라 각지에서 귀빈들이 찾아온 상황. 그래서 경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삼엄한 상황이었다.

“나의, 전사들, 시몬, 만나러 왔다.”

뮬라타는 거의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인간의 언어를 또박또박 전했다.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통과시켜야 하나?”

평소라면 묻지도 않고 들여보냈겠지만, 안에는 황태자가 있었다.

부관이 조언했다.

“단장님께 먼저 확인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서 다녀와라!”

“예!”

제1기사단장 파월은 출입을 승인했다.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영지법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오크의 대족장은 저택의 정문을 통과했고, 기사단 숙소에서 합숙하고 있던 부하들을 찾아갔다.

“오, 뮬라타 대족장. 오랜만이오. 무슨 일로 저택에 오신 거요?”

뮬라타는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말을 걸어오는 기사를 힐끔 바라보고는 갈 길을 갈 뿐이다.

곧 파월 단장이 보낸 통역병이 붙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대족장님.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족장들을 만나고 싶어서 왔다. 그리고 오늘 이곳에서 재미있는 결투가 벌어진다고 들었는데.』

『승계전 소식을 들으신 거군요.』

뮬라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승계전에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시몬이라면 한 자리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에겐 승계전이 대단히 중요하게 느껴졌다.

지난 전쟁에서 시몬에게 완벽히 패했다. 거기에 케나드에게도 일격을 허락했다.

다른 방계의 참가자들은 몰라도 두 형제가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시몬 공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나는 족장들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있겠다. 먼저 족장들을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지나가던 기사들이 뮬라타를 보며 알은척을 해 왔다.

“온 김에 나와 한판 붙지 않겠소? 나도 대족장을 쓰러트렸다는 타이틀이 필요해서 말이지. 하하하하!”

“그대의 전사들은 아주 뛰어나더군. 전사라는 칭호가 아주 잘 어울리는 자들이었어.”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네.”

시민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뮬라타는 그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기사들은 오크들에게 조금씩 감화되고 있었다.

계기는 충분히 있었다.

최근 아크튜러스의 전사들은 오크 전사들로부터 전투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적개심이 많이 누그러졌고, 심지어는 친근함까지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서로 땀을 흘리며 부딪히는 것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일도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오크들은 강했다.

전사라는 칭호가 정말 잘 어울리는 종족이었다. 불굴의 의지마저 느껴졌다.

당연히 무를 숭상하는 아크튜러스의 전사들은 존경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아크튜러스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오크에 대해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야수처럼 굴었으나 절제할 줄 알았으며, 생각 또한 깊었다.

또한 감정도 있었다.

직접 마주하기 전까진 괴물이라고 생각했으나, 겪어 보니 인간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하나의 종족이었다.

『대족장!』

곧 나타난 황금망치부족, 검은바위부족, 서리도끼부족의 족장들이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오크족의 예법을 취했다.

『잘 지냈나?』

『우린 아주 잘 지냈소.』

『이곳 생활도 나쁘지 않았소. 대족장.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말이오. 사방이 고기 천국이오.』

『넌 너무 먹어서 탈이야. 이러다가 배가 나올 지경이라고.』

『크하하하하!』

세 오크 전사들은 이제는 서로 농담을 할 정도로 여유를 부렸다. 잘 먹으면서 훈련했기 때문에 전쟁 전보다 몸이 더 좋아졌다.

뮬라타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잘 지내고 있었다니 다행이군. 그대들을 남겨 두고 떠난 탓에 걱정 많이 했다.』

『처음엔 틱틱대는 인간들도 좀 있었는데 지금은 뭐 괜찮소. 주먹 한 방 날려 주니까 잠잠해지더군. 그보다 그쪽은 어떻소?』

『황무지를 개척하고 있다. 이제 씨를 뿌리고 물을 댈 준비가 거의 끝나 가지.』

『매번 곡식만 먹을 수는 없을 텐데. 사냥감은 좀 없소?』

『아주 풍부하다. 주변 영지에서도 도움을 주고 있어서 고기도 충분히 먹고 있다.』

뮬라타가 말한 주변 영지는 바로 마크스먼 준남작령이었다.

비옥한 토지는 없지만 아주 좋은 사냥터가 있기에 그곳에 정착한 사냥꾼들이 고기를 잡아 오크족의 식량을 대고 있었다.

오크와의 첫 교역을 시작한 가문이라는 점에서 마크스먼은 준남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아크튜러스의 가신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마크스먼은 사냥꾼 집안이다. 특히 켈로그는 아주 거친 사내다. 그는 배짱 좋게도 오크와 잘 협상했다.

가끔은 함께 사냥을 즐기기도 했다.

사냥이야말로 오크와 인간이 함께하는 유일한 취미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켈로그는 신이 난 상황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왔나?』

시몬이 나타났다. 세 족장은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뮬라타가 돌아서 그를 맞았다.

『이곳에서 재미있는 결투가 벌어진다고 하더군. 그래서 왔다네.』

『소식이 벌써 거기까지 갔나? 개척 작업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나약한 인간들에겐 어려울지 몰라도 우리에겐 쉬운 일이지.』

『얼마 전 라니에리가 사절을 보냈을 텐데 그건 어떻게 되었나?』

『처리하고 왔다. 지금쯤 킬스톤에 있는 오크들이 움직였을 거다.』

『좋군. 그런데 지금 저택엔 귀한 손님들이 많이 와 있다. 알다시피 너희 종족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서 말이야. 우리도 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지.』

뮬라타의 눈매가 날카롭게 움직였다.

『불청객이 된 건가?』

『뭐, 그런 셈이지. 일단 태자 전하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러니 내 방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그런데 그때 의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오, 이자가 뮬라타인가?”

카인 황태자의 목소리였다. 돌아선 시몬은 그를 향해 정중히 예를 취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크가 겁도 없이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말이야. 대족장 뮬라타. 하긴, 대족장이라면 그 정도의 패기는 있어야지. 마침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정말 신기하군.”

카인은 대담하게도 뮬라타와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쾌한 시선이었다.

마치 관찰하듯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곁에 오토 경이 있었기에 안전은 보장되었다.

뮬라타가 조금이라도 살기를 보인다면 바로 목을 취할 것이다.

『뮬라타. 이분이 바로 리겔 제국의 황태자이시다. 예를 갖춰라.』

변방의 오크라고 해도, 리겔 제국이 얼마나 거대한 국가인지는 잘 알고 있다. 뮬라타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툭 두드렸다.

카인 황태자는 비릿하게 웃었다.

“드뇌브 경이 정말 대담한 정책을 펼쳤군. 이종족 차별 방지법이라니…… 이곳이 만약 아크튜러스 영지가 아니었다면 네 목은 진즉 떨어졌을 거다. 알아듣는가?”

시몬은 굳이 통역하지 않았다. 대신 이어서 질문을 꺼냈다.

“그보다 전하. 대족장이 이번 승계전 참관을 원하고 있습니다. 허가해도 되겠습니까?”

“그건 나보다는 그대의 아버지께 묻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황실이 가문의 일에 개입하는 건 좀 보기 그렇지 않은가?”

“그리하겠습니다.”

시몬은 정중히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속으로는 혀를 찼다.

이미 축하주를 준비하는 것이나 토너먼트 편성에 관여했다. 이제 와서 가문의 일을 언급하는 건 누워서 침을 뱉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꺼냈다는 것은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대놓고 보라는 거겠지. 황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뼛속까지 느껴 보라는 경고이기도 할 테고.’

그러나 시몬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자신이 회귀했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할 테니까.

오히려 이번 승계전의 피날레가 장식되는 바로 그 순간, 황태자와 황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결코 너희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시몬은 뮬라타를 데리고 드뇌브 후작에게 찾아갔다.

* * *

정오가 되자 대연무장에 사람들이 하나들 모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아크튜러스의 후계자를 가릴 승계전이 열리게 된다.

특별석은 정말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지금은 한여름이라 무척 더울 시기다. 햇빛을 가릴 차양과 각종 도구들이 특별석을 채웠다. 인력도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황태자와 황녀를 지키기 위해 황실근위대가 도열해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유력 귀족들은 황태자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외가인 알퐁스 백작가도 마찬가지.

그러나 하급 귀족들은 특별석이 아니라 일반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그래도 그들은 조금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까.

“소감이 어떤가?”

황태자가 우측을 지키고 있던 드뇌브 후작에게 물었다.

나름 심리를 흔들려는 수작이었는데, 후작은 오히려 태연하게 답했다.

“시원섭섭합니다. 과연 어떤 자가 승리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죠.”

“경은 직계 중 하나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겠지?”

“굳이 말씀드리면 시몬 쪽입니다.”

“정작 본인은 동생이 낫다고 주장하던데. 흥미롭군. 시몬이 심검의 경지에 올라서인가?”

“아닙니다.”

나태한 황태자의 눈이 드뇌브 후작을 향했다.

그 이유를 말해 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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