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폭풍전야 (5)
드뇌브 후작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한 말이었다.
‘승계전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가문의 일에 개입하려는 것인가? 제국의 후작가를 상대로?’
아무리 황태자라고 해도 넘어선 안 되는 선이라는 게 있다. 만약 아크튜러스 가문이 남작가나 자작가에 불과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남부를 대표하는 가문의 행사에 참관하는 것을 넘어 한 꼭지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드뇌브 후작은 생각했다.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냥 준비한 술이 아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준비해 주신 아주 귀한 술이지.”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황제가 건강했다면 가능하다. 언젠가 알현할 일이 생길 테니까.
하지만 황제는 꺼져 가는 태양이었다. 다시 볼 날이 장례식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모험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드뇌브 후작은 어제 시몬이 넌지시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태자 전하께서 분명 불합리한 제안을 하실 겁니다. 웬만하면 모두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 조언이 실제로 맞아떨어졌다.
만약 열병을 앓기 전이었다면 시몬의 조언을 흘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열병을 앓고 난 이후 시몬은 변했다.
자신이 과거로 회귀했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니지만, 결과적으로 가세는 더욱 커지고 있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다.
이번은 시몬의 감을 믿기로 했다.
“왜 머뭇거리는지 모르겠는데?”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경우가 없었기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심정은 이해하네. 애초에 승계전 자체가 처음이지 않나? 자네 입장에서는.”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드뇌브 후작은 단어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했다. 황태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듯.
“그렇다면 뭐 새로운 역사를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금까지의 승계전 중 황태자가 참관한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 말이야.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에둘러 몰려오는 압박에 결국 드뇌브 후작은 두 손을 드는 척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전하. 준비해 주신 귀한 술로 승계전을 더욱 빛내도록 하겠나이다.”
“장남과는 다르게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군.”
은근히 시몬을 지적하는 태도에 드뇌브 후작은 고개를 조아렸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용서를 구하듯이.
“말이 나와서 말인데, 시몬이 황도에 왔을 때 참 불쾌했었네. 가문을 잇지 않겠다는 말을 아주 버르장머리 없이 하더군.”
“제가 잘못 키운 탓입니다. 저를 벌하십시오.”
“아니, 뭐 그대를 탓할 만한 문제는 아니지. 열병의 후유증 때문에 정신 상태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내 동생과 사이도 좀 어그러진 것 같고 말이야.”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승계전에 참관한다는 것은, 아크튜러스 가문의 결정을 인정한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반대했다면 다른 경로로 압박을 넣었을 테니까.
드뇌브 후작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시몬의 충고였다. 불합리한 제안이라는 것에 대해.
“묻겠다. 시몬은 내 동생과 혼인하기를 원하지 않나?”
“그 일은 좀 복잡합니다.”
“뭐가 복잡하다는 거지?”
대답을 정말 잘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드뇌브 후작에겐 그럴 만한 연륜이 있었다.
“아시다시피 시몬은 가문을 잇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승계전을 치르게 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케나드가 잇게 할 수도 있지만,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가문을 잇지 않는데 황녀와 결혼한다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야긴가?”
“그렇습니다. 전하.”
“너무 뻔한 변명이 아닌가.”
황태자가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내려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시몬은 검선의 길을 걷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검선?”
“예. 녀석은 이미 심검의 경지에 들었지요. 아크튜러스 검식을 온전히 익혔기에, 속세를 떠나 더욱 검술에 정진하려는 것 같습니다.”
“웃기는 소리. 나는 시몬에 대해 잘 안다. 쉽게 속세를 떠날 만한 위인은 아니지.”
열병을 앓기 전, 시몬은 황태자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황태자는 시몬에게 정말 욕망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속세를 버리고 검선의 길을 걷겠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그대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고 본다. 가문을 잇지 않는 자와 혼인할 수는 없는 법이지. 메르세데스는 황실의 보물 같은 아이니까.”
“일이 복잡하게 되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닐세. 뭐, 자식 농사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잖는가?”
황태자에겐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형제들을 베어 낸 게 얼마 전의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의논을 좀 하고 싶은데. 이번 승계전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내 동생과 혼인의 기회를 주는 거,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시몬은 말했다. 이번 승계전에서 케나드가 이기게 될 거라고.
케나드는 이미 카펠라 공작가의 영애와 혼사가 정해진 상황.
지금의 제안은 섣불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전하. 둘째는 이미 혼처가 정해져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카펠라 공작가입니다.”
“알고 있다. 으음, 내가 너무 경을 몰아세우는 것 같아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케나드 경이 이기게 된다면 혼사를 논할 순 없겠지. 카펠라 공작가에 누를 끼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렇다고 시몬이 승계전에서 이길 리는 없겠지?”
황태자는 시몬이 일부러라도 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공언한 건 그였으니까.
무엇보다도 애초에 아크튜러스의 적자들을 모조리 탈락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굳이 드뇌브 후작이 카펠라 공작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도 카인이 먼저 말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습니다만, 어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만약 방계들 중에서 승자가 나온다면 그들에게 혼인 기회를 주겠다. 일종의 승자 특전이라고 해도 되겠지.”
“공언하실 생각이십니까?”
태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뜬소문 낼 필요 있나.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다음 진행해도 늦지 않겠지.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문득 드뇌브 후작은 확실히 하고 싶은 바를 떠올렸다.
“송구합니다만 전하. 그렇다면 시몬과 이야기되었던 혼사는 무효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그리될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시몬이 이기게 된다고 하여도, 혼사를 진행하지 않을 거다. 황실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알겠습니다. 태자 전하.”
드뇌브 후작은 일단 한숨 돌렸다. 황녀의 사생활도 그렇고, 그녀가 가문을 집어삼킬 만한 야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케나드가 승리하면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겠군.’
그렇게 되면 자신의 핏줄에게 가문을 물려줄 수 있고, 황실의 견제도 받지 않을 수 있다. 실로 완벽한 답안.
하지만 눈앞에 있는 황태자는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는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에 좀 알아보니 아크튜러스에도 훌륭한 방계들이 제법 있는 것 같더군.”
“그렇습니다. 힐스트롱 가문과 미들즈웨이 가문에서 온 자들이 특히 주목할 만하지요.”
“그래서 하나 제안하고 싶은데. 대진표를 좀 공정하게 짜 보는 건 어떤가?”
“공정하게라 하심은.”
“너무 한쪽에 사람이 몰리게 되면 승계전이 시시하게 끝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네. 토너먼트 형식으로 치러지니까, 다른 무투 대회처럼 적당히 조를 나눠서 스릴 있게 가자는 말이지.”
대진표를 짜는 것도 드뇌브 후작의 권한이었다. 그 권한마저 침해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드뇌브 후작은 오히려 긍정했다.
“이렇게 저희 가문에 관심을 가져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
“응당 그래야 하지 않겠나? 아크튜러스는 개국공신이기도 하니까.”
“모든 것을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혹 생각하신 대진이 있으십니까?”
“있다.”
황태자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다소 거만하게 후작에게 넘겼다.
후작이 종이를 펼쳐 보았다.
토너먼트 표가 그려져 있었다.
크게 두 조로 되어 있었고, 시몬과 케나드, 그리고 로버츠와 카펙을 비롯한 모든 참가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시몬과 케나드를 각각 다른 조로 넣으셨군요. 로버츠와 카펙도 마찬가지.”
시몬은 B조, 케나드는 A조였다.
마찬가지로 로버츠도 B조, 카펙은 A조였다. 즉 시몬과 로버츠, 그리고 케나드와 카펙이 서로 만나게 되는 구조였다.
“그 대진표대로 한다면 아주 볼만한 승계전이 되겠지. 결승에서 직계끼리 만날 수도 있고, 아니면 방계끼리 만날 수도 있게 되는 거니까.”
“하하하! 아주 마음에 듭니다. 전하의 총명함을 감히 따라갈 자가 없을 것 같군요!”
“금칠은 됐다.”
이야기를 모두 끝낸 황태자가 거만하게 일어났다. 드뇌브 후작은 친히 그를 숙소로 안내했다.
후작은 끝까지 굴욕을 잘 참아 내었다.
이 굴욕을 열 배, 아니 백 배로 돌려줄 날이 곧 올 거라 확신하면서.
* * *
“결국 네 말대로 되었구나. 혼사는 없던 일이 되었다.”
“그렇군요.”
시몬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드뇌브 후작은 복잡한 심경을 억지로 숨기며 말을 이었다.
“그때 네가 한 말이 떠오르는군. 마음에 두고 있는 처자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가문의 사람이더냐?”
드뇌브 후작은 신경이 쓰였다.
시몬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혼사가 무효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이든 만남을 허락해 줘야 한다고.
그렇다는 것은 어딘가 흠결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지?”
“제가 마음에 두고는 있지만, 그 사람이 저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드뇌브 후작은 진심으로 놀랐다.
“허어…… 너를 보고도 마음에 차지 않는 처자가 있더냐?”
시몬은 아크튜러스 가문의 장남이다.
가문의 세력을 떠나더라도, 잘생기고 능력이 뛰어난 남자다. 어느 가문의 영애든 한번 보고 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가문의 이름만으로 되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아버지.”
“누군지 궁금하구나.”
“아직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말씀드릴 터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보다 승계전 이야기를 좀 하고 싶습니다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후작이 시몬을 부른 것이었다. 후작은 황태자와 했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시몬에게 전해 주었다.
“술에 독을 탈 겁니다. 얼마 전 라니에리와 일로스테 남작이 한 건 했었지요.”
“전에 말했던 오러 브레이커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제야 드뇌브 후작은 황태자가 굳이 왜 술을 따라 주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황실이 나서는 일이라면, 그 속에 독을 탄다는 의심을 누구도 할 수 없게 될 테니까.
“로버츠와 카펙은 결투 전에 해약을 먹고 나올 겁니다. 빌빌거리는 우리를 멋지게 쓰러트리고 가문을 집어삼키겠다는 망상을 하고 있겠죠.”
“대응은?”
시몬은 방금 로이드 가문에서 보내온 나무 상자를 꺼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맡은 임무를 성공시켰다.
“그래서 우리도 해약을 준비했습니다. 이로써 놈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겠죠.”
“그래도 방심하지 말거라. 다른 변수가 있을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케나드가 가문을 승계할 준비만 해 주시면 됩니다.”
시몬은 상자를 열었다.
씁쓸한 향을 내뿜는 단약이 상자에 가득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