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폭풍전야 (4)
“왜 그렇게 쳐다봐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을까요?”
“여기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시몬이 나직이 경고했다. 하지만 황녀의 표정은 너무나 해맑았다.
“뭐 어때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긴데요. 여기에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렇지 않나요?”
시몬을 보좌하던 사람은 라니에리와 로빈, 그리고 황녀를 보좌하는 사람은 제너릭 경이었다.
어차피 관계자들이 다 모였는데 내숭 떨 게 뭐 있냐는 말.
시몬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나온다면 굳이 가면을 쓸 이유가 없었다.
“일로스테 남작은 모종의 세력에 쫓겨 저희 가문으로 피신했습니다. 앞으로는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어머나, 형편이 좋은가 봐요. 남자구실도 못 하는 쭉정이를 가신으로 받아 주는 걸 보면.”
“상대의 실력이 좀 형편없었나 봅니다. 제 부하를 시켰다면 일로스테 남작의 목숨까지 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시몬이 은연중에 제너릭 경을 깎아내렸다. 순간 황녀의 눈에 살기가 돋았다.
어차피 누가 벌인 일인지는 다 아는 상황.
이미 굳어져 있던 제너릭 경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해졌다. 안 그래도 일로스테를 처단하지 못해 황녀에게 꾸중을 들었는데, 다시 한번 상기된 것이니까.
“죽기를 바라던 사람을 거두어 주다니, 취향 참 특이하네요?”
“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거두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요. 안 그래도 얼마 전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도 했고 말이죠.”
“무슨 소식?”
“가문의 일입니다.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양해해 주시길.”
시몬은 무례를 저질렀다.
메르세데스 황녀는 그냥 귀족이 아니라 황족이었다. 황실을 대표해서 이곳에 온 것이기도 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묻는 것이 정상.
그러나 시몬은 그녀에게 정보를 흘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로써 발생할 작은 불안감이 결정적인 실수로 연결되게 하기 위해서.
“말이 길어졌군요. 들어오시죠.”
황녀가 안으로 들어오자 시몬은 문을 닫았다.
제너릭 경과 라니에리는 들어오지 않았다. 방 안엔 시몬과 메르세데스 황녀 단둘뿐이었다.
돌연 황녀가 고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몬을 유혹했다.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땐 허리에 손을 감고 키스부터 하던 그대였는데…… 마음이 식어도 이렇게 식을 줄은 몰랐네요.”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제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나요? 날 한번 안아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수컷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실로 오만한 어투.
황녀는 교태로운 모습을 보이며, 지금 얼마든지 시몬이 원하면 몸을 취할 수 있다는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시몬은 응하지 않았다.
“사람의 매력은 외모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감정과 기품, 그리고 순수한 정신이 결정하는 것이지요.”
“가슴골 좀 파인 드레스 입으면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게 수컷들의 특징 아니고요?”
“잘못 보셨습니다.”
시몬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테이블에 앉아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황녀는 유혹을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아까 보니까 아는 눈치던데요? 내가 로버츠 공자와 카펙 공자에게 했던 은밀한 제안에 대해서요.”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짐작은 가더군요.”
“한번 맞혀 볼래요? 똑똑한 그대라면 맞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황녀는 이것을 유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긋생긋 웃으며 시몬이 답을 이야기하기만을 기다렸다.
“승계전에서 이기게 되면, 그 사람과 혼인할 기회를 주겠다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만.”
“와! 어떻게 알았지? 정확한데요?”
순진한 척하긴.
시몬은 테이블에 놓인 와인을 잔에 따랐다. 그리고 황녀의 잔에도 와인을 채워 주었다.
평소였다면, 정확히는 열병을 앓기 전이라면 사랑스러운 눈으로 건배를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몬은 묵묵히 혼자 잔을 비웠다.
“실수하신 겁니다.”
“왜죠?”
“두 공자의 실력이 대단한 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케나드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겁니다.”
황녀의 눈이 차가워졌다.
시몬이 건배를 해 주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정곡을 찔려서일까?
“케나드 공자가 이번 오크 전쟁 때 큰 활약을 했다는 건 나도 알아요. 바드들이 지겹게도 노래를 부르더군요. 하지만 아직 풋내기일 텐데요?”
“세상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면 모두가 행복하겠지요. 세상은 넓고 보이지 않는 일은 많습니다.”
시몬은 케나드가 구식 검식의 살검의 경지에 올랐고, 신식 검식까지 익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입이 근질거릴 정도로.
하지만 그러진 않았다.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고 있는데 본인이 방심하는 건 어불성설이니까.
“뭔가 꿍꿍이가 있군요.”
“솔직히 케나드에게 가기도 전에 저에게 박살 날 테지만요. 들으셨을 겁니다. 제가 심검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들었죠.”
와인을 한 번에 들이켠 황녀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약 기운이라도 떨어진 걸까.
아무리 막장인 황녀라도 대놓고 약을 하진 못했다.
이곳은 황궁도 아닌 아크튜러스 가문의 저택이었으니까.
“아크튜러스의 적법한 가주에게만 전수된다는 심검의 경지…… 황실근위대장에게 이야기 들은 적 있어요. 아무나 감히 넘볼 수 없는 대단한 경지라고 하더군요.”
“조가 어떻게 편성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결승에서 승부를 겨루게 되는 건 저와 케나드일 겁니다.”
황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후우, 하고 내뱉는 숨에 달짝지근한 포도향이 풍겼다.
“그렇다면 그대가 승리하면 되겠군요. 카펠라 공작가는 저도 뭐라 하기 부담스러우니까요. 혼인을 물리라고 할 수는 없죠.”
황녀가 솔직하게 나왔다.
이윽고 눈을 반짝이며 제안했다.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 쇼윈도 부부도 할 만하지 않을까요?”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한편으로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보험으로 취급하던 두 공자도 모자라 시몬까지 회유하려고 했다.
정작 당사자인 시몬은 잔을 흔들며 미소를 지을 뿐이다.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건 서로의 권력이니까. 서로 돕고 살자는 거죠.”
“그러기엔 서로를 너무 잘 알게 된 것 같군요.”
“무슨 의미죠?”
“모종의 세력이 알퐁스 백작가를 앞세워 우리와 알데바란을 곤란하게 하려고 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모종의 세력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가능한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아서고 말이죠.”
“흐응, 재미있군요.”
황녀도 냉큼 그 뜻을 알아들었다. 배후에 너희들이 있는 걸 다 안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으니까.
“용맹한 아크튜러스 가문이라면 당장에라도 항의했을 것 같은데, 조용하네요?”
“남부가 소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리고 황도 또한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지금 황제는 병세가 완연하다.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소문은 이미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카인 황태자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는 하나, 권력 교체기에는 어쩔 수 없이 혼란이 발생하는 법이다.
시몬이 지적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분란을 만드는 것은 신하로서 불충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게 없지요.”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네요. 당신.”
“무엇이 말입니까?”
“방금 당신은 신하로서 충성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죠. 거기에 전에 밀실에서 오라버니께 큰 죄를 저질렀다죠?”
“글쎄요.”
시몬은 잔을 내려놓았다. 황녀를 계속 상대하다 보니 술맛이 떨어졌다.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우리 아크튜러스 가문은 황실에 충성하는 게 아닙니다. 리겔 제국에 충성하는 거지요.”
“무슨 말장난이죠? 그게 그거 아닌가요?”
“다릅니다. 황실이 제국과 다르듯 그 주체가 다르지요. 황실은 황족의 모임에 지나지 않지만, 제국은 황실과 제국을 구성하는 모든 신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몬은 다리를 꼬며 오만하게 충고했다.
“황실이 제국의 이익에 반하려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배임입니다. 황실을 모독한다는 뻔한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모든 권력은 신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카이저 선황의 유지를 떠올려 본다면 당연한 말이니까요.”
선황의 유지를 받들지 않는 건 진정한 황제라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배임이라. 후후,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과연, 시몬 아크튜러스. 대담한 남자네요.”
“마지막으로 충고드립니다. 로버츠와 카펙에게 한 제안을 물리십시오. 괜히 일이 커졌다가는 황녀님 혼자 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설마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협박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 있지요? 저에겐 정말 많은 정보가 있다고 말이죠.”
황녀의 머릿속으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기획한 일들이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대체 시몬은 어떻게 대비할 수 있었던 걸까?
조사해 봐도 드러나는 것이 없었다. 따로 정보국을 꾸린 정황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륙에서 손꼽히는 정보상과 접촉한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미 붙여 놓은 미행들이 보고했을 터.
그는 알데바란으로 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 나서 큰 공을 세우고, 때로는 신분을 위장해 상단의 일을 돕는 등 가문의 장자 역할을 충실히 할 뿐이었다.
‘대체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유리잔을 쥔 황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차하면 잔을 깨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득이 될 게 조금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싫은 표정을 하는군요. 그래서 내가 무슨 수라도 쓰고 싶은 거예요. 그대의 잘난 그 표정을 박살 내고 싶어서 말이죠.”
“그건 애정이 아니라 증오입니다.”
“그런데 나만 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몰라서 물으십니까?”
“그럼 알면서 물을까요?”
“제가 가진 정보를 분석해 본 결과, 황녀님은 진정한 배후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분이 하나 더 계시더군요.”
“누구?”
시몬은 웃을 뿐 답해 주진 않았다.
“수습할 수 없는 일은 벌이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괜히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공들여 쌓은 탑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으니 말이죠.”
“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는 거죠? 좋은 정보상이 있다면 소개받고 싶은데요.”
시몬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나는 그대가 좀 더 욕망이 많은 남자일 줄 알았는데.”
“욕망은 많습니다. 다만 무엇을 욕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저는 손에 잡히면 사라질 것 같은 신기루가 아니라 보다 확실한 것을 욕망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죠? 확실한 것이.”
“글쎄요. 굳이 말하면 소소한 행복이라고 할까요.”
황녀는 한참 동안 시몬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정오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았죠.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내 처소로 찾아오도록 하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편히 쉬시길.”
시몬과 황녀의 회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드뇌브 후작의 집무실에선 카인 황태자가 대담한 제안을 하고 있었다.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승계전이 열리면 축하주를 주는 전통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전하.”
“그 축하주, 내가 직접 따라 주고 싶군. 마침 황도에서 좋은 술을 가져왔거든.”
그것은 아크튜러스 가문의 가주인 드뇌브 후작조차도 쉬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