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폭풍전야 (3)
가장 선두에 선 기사는 황금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황실근위대 부대장인 오토 경이었다.
그는 제국에서 이름난 기사 중 하나였다.
제국에서 가장 실력 좋은 기사들이 모인 황실근위대의 이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는 최근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 대대적으로 황실 공보와 사설 신문에 실리는 등 소문이 널리 퍼졌으니까.
실력으로 본다면 드뇌브 후작보다 윗급이었다.
‘팰리스 경은 안 온 모양이군. 하긴, 황도를 비울 수는 없을 테니.’
팰리스 경은 황실근위대장으로, 제국제일검으로 소문난 사람이다. 당연히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고, 무수한 전투에서 명성을 날렸다.
뒤늦게 나온 시몬은 오토 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 실력으로 저자를 이길 수 있을까?’
시몬은 몇 가지 기연을 통해 소드 익스퍼트의 중간 단계인 5서클에 도달했다.
거기에 진보된 아크튜러스 검식을 마스터했다. 전생의 지식이 그대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클의 차이.
‘이제 막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면 7서클 오러 유저일 텐데…… 이기기 위해서는 2서클의 차이를 극복해 내야 한다.’
시몬은 끝내 긍정했다.
‘할 수 있겠군.’
서클 하나의 차이도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 거기에 두 개라면 이론적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몬은 규격 외의 존재.
전생이 소드마스터였다. 검에 관한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피해가 좀 있겠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중요한 건 오토 경과 싸울 일을 만들지 않는 거겠지.’
라니에리가 추진하는 일이 틀어지면 황태자와 맞서야 한다. 그렇다면 함께 온 오토 경이 관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황녀가 데려온 제너릭 경도 있지만 그는 소드 익스퍼트의 실력자.
회귀한 직후라면 모를까. 영약까지 만들어 먹은 시몬은 이미 그의 경지를 능가한 상태였다.
“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드뇌브 후작과 밀튼 공작, 그리고 알데바란에서 온 타이온 후작은 굳이 무릎에 흙을 묻히지 않아도 됐다.
황실에서도 고위 귀족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면책권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서서 황태자 일행을 맞이했다.
반면 손님으로 참여한 알퐁스 가문의 딜리토 백작, 그리고 여타 다른 백작 이하의 귀족들은 예외 없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지난 알데바란과의 갈등의 주범으로 지목된 알퐁스 백작가도 초대장을 받았다.
당초 드뇌브 후작은 딜리토 백작을 제외하려고 했으나, 시몬이 특별히 부탁했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관찰하고 싶다고.
가문의 미래와 직결된 일이기 때문에 드뇌브 후작은 시몬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딜리토 백작이 이곳에 있게 되었다.
“제국의 젊은 태양을 뵙습니다. 먼 길 행차하시느라 노고 많으셨습니다. 태자 전하.”
“이리도 환대해 주다니. 경의 노고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군.”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전하.”
“모두 일어나라.”
황태자가 손짓했다.
그는 마치 황제처럼 군림했다.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만약 황실에 어지러웠다면 모를까, 이미 카인은 모든 경쟁자들을 짓누르고 정점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밉보이는 것은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러게 말이네. 황도에서 본 지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참 잠깐 사이에 여러 일이 있었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황태자는 밀실에서 있었던 일을 넌지시 상기시켰다. 그렇다고 시몬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저 편안히 황태자를 응대할 뿐이다.
그 사소한 것들이 카인 태자의 심기를 조금씩 건드렸다.
“그런데 내 오랜 친구가 보이지 않는군?”
‘오랜 친구’라는 특별한 표현에 장내가 웅성거렸다. 귀족들이 모두 주변을 둘러보며 누구인지 확인하려 했다.
그러자 뒤늦게 라니에리가 걸어 나왔다.
“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귀족들이 깜짝 놀랐다.
“라니에리 경이 태자 전하의 친구였다고?”
“내 알기론 아카데미 동기였다고 들었네. 수석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고 하던데.”
“오오, 그런 일이?”
“귀한 인연이로군. 부러운 일이야.”
사실 라니에리도 시몬의 오른팔이기 때문에, 시몬이 가문을 잇게 되면 차기 서기관으로 임명될 인재였다.
그런데 시몬이 승계권을 포기하고, 승계전까지 열리게 되니 상대적으로 그 기대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케나드 쪽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황태자가 직접 거론하니 귀족들이 그를 다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친구라면 황실의 요직을 꿰찰 수도 있는 거니까.
“이번에야말로 코가 삐뚤어지게 한잔 마셔 보자고. 전에 황궁에 왔을 때는 제대로 한 잔도 못 하지 않았나?”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저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아름다운 레이디는 누구인가? 아직 자네는 혼처를 정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고 말이야.”
황태자가 짓궂은 장난을 쳤다. 라니에리는 함께 있던 여인에게 인사하라고 손짓했다.
“소녀, 감히 전하를 뵙습니다. 세레스 가문의 가주 진이라 합니다.”
그녀는 타이온 후작을 보필하기 위해 함께 아크튜러스로 넘어왔다.
황태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대가 세레스 가문의 진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현자라고 불린다지? 알데바란에서의 활약상은 나도 들었네.”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이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오크와 함께 싸운 것은 황도에서도 매우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진은, 그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거론되고 있었다.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뜬소문일 뿐입니다. 소문이란 으레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요.”
“남부의 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라…….”
황태자는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라니에리와 가까이 있었던 것이 영 신경이 쓰였다.
‘두 가문이 맺은 평화 협정이 이 정도로 영향이 컸던가?’
황태자는 속으로 경계했다.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의 차기 브레인들이다. 당연히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이 두 남녀는 가까이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더라면 두 가문의 화합이 반가웠을 터.
하지만 카인 태자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모든 귀족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는 것.
그래서 알퐁스 백작가를 이용해 두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구린 냄새가 난단 말이지.’
황태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관심을 돌렸다. 때마침 시몬이 메르세데스 황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여정은 어떠셨습니까? 황녀님.”
황녀는 피어난 꽃처럼 생긋 웃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에요. 건강이 많이 좋아졌나 봐요. 그때는 많이 힘들어 보였는데.”
“걱정해 주신 덕분에 깨끗이 나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고마워해야 할 건 나죠.”
귀족들은 그 대화에 집중했다.
이미 시몬과 황녀의 사이가 갈라지려 하고 있다는 소문은 널리 퍼진 상태.
인사치레일 뿐인 대화였지만, 미세한 틈을 포착하기 위해 다들 혈안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프로였다.
인사치레만큼은 완벽하게 해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말할 정도로.
“황녀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가문의 방계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만.”
“방계들을?”
황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지금 타이밍에 방계 이야기가 나오는 게 이상했다.
“인원이 많아서 다 소개는 어렵고, 대표할 만한 두 청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번 승계전에서 좋은 활약을 보일 청년들이죠.”
시몬이 로버츠와 카펙을 향해 손짓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쪽은 힐스트롱 가문의 장남, 로버츠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미들즈웨이의 차남인 카펙이지요. 다들 검술에 뛰어나고 용맹한 청년들입니다.”
“그렇군요. 잘 부탁해요?”
시몬은 짓궂게 웃었다. 마치 황녀에게 선전 포고를 하는 것처럼.
황녀는 인사를 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놈이 알아차렸을 리는 없는데?’
매우 엄중한 보안을 통해 밀서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몬은 마치 보낸 밀서를 확인한 사람처럼 대담히 행동하고 있었다.
이번에 시몬은 황태자를 주목했다.
“태자 전하께서도 잘 보아 두십시오. 이 두 청년이 아주 좋은 성과를 낼 테니 말입니다.”
“으음, 뭐. 참고해 두지.”
잠시간, 시몬은 말없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황녀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모든 일에 황태자가 배후로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꼬리를 잘라다 눈앞에 가져다주지. 이 꼬리가 네 꼬리냐고 말이야.’
시몬이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황태자는 드뇌브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승계전은 언제 열리나?”
“내일 정오에 바로 시작하려 합니다.”
“그렇군. 그것에 대해 좀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모든 것이 태자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하명하십시오.”
드뇌브 후작은 완전한 복종을 표했다. 카인 태자는 그런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다.
“어찌 가문의 대소사를 이런 곳에서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자리를 좀 옮기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드뇌브 후작은 매우 정중한 자세로 태자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황실에서 온 손님들도 서열순대로 차례로 입장했다.
다시금 저택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시에 많은 손님을 안내해야 했기에 가문의 모든 사용인이 동원되었다.
물론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이곳은 중소 규모의 귀족가가 아니라 아크튜러스 가문이었다. 사용인들은 저마다의 노하우를 발휘하여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우린 좀 따로 이야기할까요?”
시몬이 걸음을 멈췄다. 메르세데스 황녀의 제안은 다소 과감했다.
무슨 의도일까?
시몬은 곁에 있던 제너릭 경을 힐끔 바라보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차피 승계전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무리 아크튜러스의 적자라고 해도 오라버니와의 자리엔 끼진 못할 것 같아서 말이죠. 참가자잖아요?”
“좋습니다. 가시죠.”
시몬은 메르세데스 황녀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예전, 그녀가 병문안을 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당시 그녀는 굴욕을 맛봤다.
시몬은 말했다. 당신은 아크튜러스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굴욕은 잠깐.
드비안느의 진단이 정확했다. 그녀는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유형에 가까웠다.
아니, 가까운 게 아니라 완벽히 일치했다.
이제는 일로스테 남작과의 관계도, 엘 루나라는 모임에 대해서도 딱히 부정하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다시 물어보면 모든 걸 말해 줄 것 같은 분위기.
“얼마 전에 쥐새끼 한 마리 오지 않았어요?”
“쥐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용인들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뇨, 그 쥐 말고. 일로스테 남작.”
뜻밖의 말에 시몬은 문을 열다 말고 황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