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88화 (88/120)

88화: 폭풍전야 (2)

황태자와 황녀를 마중 나가기 위해 환복을 준비하고 있던 시몬은 사람들을 물렸다.

“하지만 도련님. 곧 황실의 귀빈들이 오실 것입니다. 준비를 먼저 하셔야지요.”

하녀장이 간청했다.

준비할 시간이 촉박했다. 황실의 마차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저택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황실의 귀빈이 오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어서 물러가. 환복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시몬이 엄하게 말했기에, 하녀장과 하녀들은 별다른 대꾸 없이 물러나야 했다.

방 안에 단둘이 남자 시몬은 오러를 일으켰다.

강력한 배리어가 펼쳐지며 주변의 소음을 차단했다.

“꼬리를 잡았다는 건, 마약의 유통처를 파악했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시몬은 전에 라니에리와 일로스테가 새벽에 찾아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파우스트 상단 하수인 중 하나가 잡혔었다고 했었지.’

잡힌 하수인은 아크튜러스 본성 지하 감옥에 갇혀 지옥을 맛봤다.

쉴 새 없이 고문당했고, 살기 위해 아크튜러스에 협력을 약속했다.

그리고 하수인은 풀려나 다시 파우스트 상단으로 복귀했다.

라니에리는 하수인의 어수룩함을 이용했다. 그는 진짜로 겁을 먹었고, 밖에 알려서는 안 되는 기밀을 밖으로 유출했다.

그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범인은 파우스트 상단이었습니다.”

라니에리는 신중한 편에 속한다.

이렇게 확신을 담아 말한다는 것은 분명한 증거를 잡았다는 말이다.

“파우스트 상단에서 황실에 여러 약물을 납품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장부를 입수하진 못했습니다만, 유통 경로는 완전히 파악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치하할 만한 일이었다.

유통 경로를 알게 되었다면 현장을 급습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시몬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중간에 뭐가 좀 빠진 느낌인데? 파우스트 상단은 힐스트롱 가문이 출자해서 설립한 상단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힘도 없는 것들이 어디서 약을 구해서 황실에 바쳐?”

마약은 생산하기 무척 까다로운 약품이다.

특히나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는 마약 생산을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시설을 갖출 수 없다.

즉, 제대로 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통의 시설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야기.

모든 사람이 법을 잘 지키면 세상은 범죄 하나 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륙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범법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특히나 힘이 없는 국가에서는 치안 유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유한 자들의 검은돈이 흘러들어 와 지하 경제가 성립되기도 한다.

시몬이 지적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돈이 많은 상단이라면 모를까, 힐스트롱이 아무리 출자했다고 해도 신생 상단이 위험한 물건을 유통하기는 좀 어렵지 않아?”

“제대로 보셨습니다.”

라니에리가 웃었다. 그 말은,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좀 더 조사해 보니 파우스트 상단에 출자한 가문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설마, 알퐁스 백작가?”

“맞습니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 알퐁스 가문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제야 시몬은 잃어버린 퍼즐 하나를 딱 껴맞춘 듯한 쾌감을 맛봤다.

“하긴, 그 정도 뒷배는 되어야 마약 같은 거에 손도 대고 하겠지.”

“전에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엉뚱하게 걸린 일 같지 않았다고 말이죠. 공자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이번 일의 진실은 하나로 이어진 것 같군요.”

“알퐁스 가문이라면 황녀의 외가이기도 하니까. 황녀의 편의를 봐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후 계획은?”

“유통 경로를 파악했으니, 그곳을 급습해서 보다 확실한 증거를 찾으려고 합니다.”

시몬이 넌지시 바라보며 경로를 물었다. 라니에리는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책상 위에 넓게 펼친 뒤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짚었다.

“이쪽입니다.”

시몬의 눈이 손가락을 따라갔다.

대륙 남부에서 좀 떨어져 있는 큰 섬을 가리키고 있었다.

“로데론 섬이군.”

“예. 해적들의 본거지이기도 하지요. 마약이 생산되기에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로데론은 어느 왕국에도 속해 있지 않은 중립 지역이었다. 그 어떠한 국가의 법도 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마약이 배에 실려 내륙으로 들어와 이쪽 경로를 타고 올라오게 됩니다.”

라니에리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익숙한 곳을 지나쳤다.

알데바란의 남부 지역이었다.

“킬스톤을 거쳐 알데바란 영지를 지나친 후, 알퐁스 백작가의 영토로 들어가 바로 황실로 가는 루트입니다.”

“상당히 길군.”

“지적하신 대로 남에서 북으로 길게 종단하는 길이긴 합니다만, 주요 무역로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이송이 쉽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느리지만 안전한 길을 택했다 이거지?”

“맞습니다.”

특히나 킬스톤은 거의 관리되지 않는 지역이기도 했다.

한때 아크튜러스-알데바란 연합군과 오크족이 대치하기도 했던 사막의 땅.

“머리 잘 썼네. 확실히 그 경로라면 몬스터 쪽만 신경 쓰면 되니까.”

아주 위험한 풍토병이 돌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다. 그런데도 파우스트 상단은 그 점을 이용해 마약을 수송하고 있는 듯했다.

경로를 제대로 확인하고 보니, 마약 유통의 규모가 생각보다 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스치듯 지나갔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시몬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으나 딱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생이었다면 알데바란과 일전을 치르고, 거기에 오크까지 상대하느라 황폐해진 영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황녀가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것도 나중에 안 일이었다. 이렇게 일찍 약에 손을 댔다는 건 이번 생에 알게 되었다.

‘즉, 파우스트 상단 건은 완전히 내가 모르는 일이라는 거지.’

시몬은 걱정보다 기대감이 앞섰다.

인생 2회 차.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시몬은 그것을 기회로 삼았고, 전생에서 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채워 넣는다는 느낌으로 접근한다면 분명 즐거울 거다.’

시몬이 갑자기 웃자, 라니에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좀 수상한 부분이 있어서. 규모가 너무 크지 않아? 황녀 혼자 즐기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큰 것 같아서 말이지.”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운송비는 얼마나 위험하느냐에 따라 비용이 결정된다.

무법지인 로데론에서 출발하여 킬스톤까지 거쳐야 하는 루트라면 아주 높은 위험도를 자랑한다.

그렇다면 가문 하나가 돈을 쓰며 유지하기엔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에 운송 품목이 마약이라면 더더욱.

“이번 기회에 놈들을 일망타진해서 장부를 입수한다면 제국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을 것입니다.”

“장부라. 아주 매력적이긴 하지. 적당히 협박하면서 좋은 거 뜯어낼 수 있으니까.”

상황도 나쁘지 않다.

인접한 알데바란과는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서부는 카펠라 공작가가 지키고 있다. 협박을 빌미로 영지전을 걸기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잠시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라니에리가 손가락으로 킬스톤 지역을 툭툭 두드렸다.

“이곳에 우리 정예들을 보내 파우스트 상단을 급습하여 물증을 확보하려 합니다.”

“풍토병은 어떻게 하려고? 우리가 오크와 전쟁할 때 왜 전역을 위쪽으로 옮겼는지는 너도 잘 알 텐데.”

“전에 로이드 가문에 물어본 적이 있는데 치료제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소량밖에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군대를 주둔시킬 순 없지만, 몇 명분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이래서 시몬은 로이드 가문을 키워 주고 싶었다.

라니에리와 드비안느가 소꿉친구라는 관계를 생각한다면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시몬은 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달리 방도가 있으십니까?”

잠시 시계를 바라본 시몬은 아까 입다 만 옷을 걸쳤다. 이번에도 마중을 나가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으니까.

자연스레 라니에리가 옆에서 환복을 도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소화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옷이라 맵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정예를 보낸다는 생각 자체는 좋아. 하지만 그 넓은 지역을 수색하는 것도 그렇고, 일이 잘못되면 우리 가문에서 보냈다는 게 밝혀질 수 있으니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실패하지 않으면 됩니다.”

“실패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하하. 신중하신 분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대담하실까?”

틀린 말은 아니다. 실패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다른 좋은 방법이 있다면 굳이 위험부담을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로이드 가문에 손을 벌릴 순 없을 거야. 내가 시킨 일 때문에 바쁘거든.”

“그렇습니까.”

“그러니 우리 정예보다는 풍토병에 강한 자들을 보내서 처리하면 깔끔하지 않을까? 굳이 치료제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현지인들을 동원하자는 말씀이군요. 으음, 진 경에게 이야기하면 실행이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

“아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환복을 끝낸 시몬이 거울 앞에 섰다. 영 아니다 싶었지만, 시간이 별로 없었다.

“뮬라타에게 부탁하면 돼.”

순간 라니에리의 눈이 반짝였다.

“오크족을 활용하신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어차피 녀석들의 연합이 와해됐으니, 킬스톤에 남아 있는 부족들이 좀 있을 거야. 놈들을 규합해서 상단을 습격하고 전리품을 챙겨 오면 그만인 거지.”

실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오크들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이종족이니까. 실패한다고 해도 오크들의 단순 습격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라니에리는 비판적인 성격이라, 늘 그렇듯 상대가 제시한 책략의 약점을 찾으려 했으나 이번만큼은 도무지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공자님의 혜안은 따라갈 수가 없군요.”

“뭐, 그렇게 활용하려고 끌어들인 건 아니지만, 이런 일에 서로 도우면 좋잖아? ……뭐야. 왜 그렇게 보냐?”

“회귀했으니까, 라는 말씀을 안 하셔서요.”

“이건 나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아주 새로운 일이지.”

라니에리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 시몬이 과거로 회귀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럼 바로 사절을 보내겠습니다.”

“보수는 넉넉히 준다고 해라. 아, 그나저나 이 옷 정말 거추장스럽네.”

시몬은 라니에리와 함께 방을 나섰다. 하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장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오! 신이시여…… 도련님! 이렇게 옷을 입으시면 안 돼요! 제가 다시 손보겠습니다.”

“뭐 어때. 대충 입으면 되지.”

“다른 분도 아니고 황녀께서 오시는 자리예요. 더 멋지게 보이셔야지요?”

시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복잡한 사정을 하녀장에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라니에리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먼저 가라. 곧 나갈 테니까.”

“예. 공자님.”

꾸벅 인사한 라니에리가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귀족들이 황실의 귀빈들을 맞이하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저 먼 곳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휘황찬란한 갑주를 걸친 황실근위대와 마차 여러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