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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87화 (87/120)

87화: 폭풍전야 (1)

두 사람은 조금도 주목받지 못했다.

밀튼 공작을 환영하는 인파에 끼어들지 못했다. 먼발치에서 구경만 해야 했다.

카펠라 공작가의 기사들의 호위가 삼엄한 탓도 있었으나, 아크튜러스 직계들이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펙이 넌지시 주의를 주었다.

“누가 듣겠다. 로버츠. 말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흥, 들으라지.”

“승계전에 오르기도 전에 목이 잘리고 싶은 건가?”

로버츠는 입을 비죽거렸다.

한편으로는 오만한 아우라를 내뿜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 두 사람은 황녀에게 은밀한 약조를 받은 상황이었다.

‘승계전에서 이기게 되면 아크튜러스 가문을 손에 넣을 뿐만 아니라 황녀와 혼인할 수 있게 되지. 황실을 등에 업을 절호의 기회다.’

반드시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아크튜러스의 방계로 살아가는 것도 사실 나쁜 건 아니었다. 유사시에는 도움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그는 아크튜러스를 손에 넣는 것뿐만 아니라 황실을 등에 업고 제국의 남부를 완전히 자신의 발아래에 두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로버츠만의 망상은 아니었다.

“욕심나지 않나? 아크튜러스를 잇게 된다면, 제국의 공작만이 아니라 황제를 마음대로 접견할 기회가 생길 텐데.”

“몇 번을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후계에 관심이 없다. 그렇게 의심된다면 우리의 약조는 없던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예민하긴.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그냥 생각나서 말해 본 거야.”

로버츠는 한배를 탄 카펙을 계속해서 견제하고 의심했다.

카펙은 이번 승계전 승부 조작에 협력하는 대신 막대한 이익을 받기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즉, 카펙의 본가인 미들즈웨이 가문에 아크튜러스 영지의 일부를 할양해 준다는 조건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나쁘지 않은 조건.

하지만 카펙은 무미건조한 얼굴 속에 숨긴 진짜 표정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멍청한 놈. 궂은일은 네가 다 도맡아 하고 있지만, 결국 아크튜러스를 잇게 되는 것은 바로 나. 카펙 미들즈웨이가 될 것이다.’

야망.

우둔한 로버츠는 그 어둑하고 진득한 본질적인 욕망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저 손짓하며 카펙을 으슥한 곳으로 데려갈 뿐이다.

“아까 황실에서 전령이 왔을 때, 황녀께서 따로 밀서를 남기셨다.”

황태자와 황녀가 제도를 떠난 이후, 정기적으로 아크튜러스 가문에 전령을 보냈다. 그사이 밀서가 전해진 것이다.

“무슨 내용이지?”

“놀라지 마라. 이번 일에 태자 전하께서도 협력해 주신다고 하는군.”

그러자 카펙의 눈이 빛났다.

황녀는 실질적인 권력과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황실의 마스코트와 다를 게 없으니까.

하지만 곧 제국을 이어받을 황태자가 도움을 준다고 한다면, 이번 승부가 성공할 확률은 매우 높아진다.

“어떻게 도와주시려는 거지?”

“자세한 말씀은 없으셨다. 밀서에 적기 곤란한 일이겠지. 만약 누가 훔쳐보기라도 한다면 정말 큰일 나니까.”

실제 로버츠가 받은 밀서에는 황태자라는 표현은 없었다. 사전에 황녀가 알려 준 암구호로 알아들은 것이다.

“짐작 가는 것도 없나?”

“하나 있다.”

로버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전에 보여 준 오러 브레이커라는 독약, 기억하나?”

“당연히.”

“잠깐 설명이 필요하겠군. 우리 가문이 괜히 가산을 탕진한 게 아니야. 사실 그 조제법을 알려 준 것은 바로 황녀님이다.”

“뭐라고?”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카펙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로버츠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에서 조금 뒤처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하하핫. 재미있는 표정을 하는군. 이렇게 당황할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는데?”

“아크튜러스의 후계를 정하는 것에 황실이 개입하려 한다는 소문은 진실이었군.”

“당연하지. 황녀께서 원하는 건 시몬이라는 남자가 아니라 아크튜러스 가문이니까. 그 자식이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뻗대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까지 기회는 오지 않았겠지.”

“그래서 짐작 가는 것이 뭐지?”

“아크튜러스 가문 승계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잘은 모른다.”

적어도 두 공자가 태어나고 자란 시기에 승계전이 열린 적은 없었다.

그 전 세대도 마찬가지.

그래서 직계가 아니라면 알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로버츠는 자신 있게 입을 놀렸다. 마치 어딘가에서 보고 들은 것처럼.

“승계전은 정해진 룰이 없다. 보통 일대일 대전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규칙 같은 건 당대 가주가 결정하곤 했지. 하지만 딱 하나, 매번 바뀌지 않는 공통적인 규칙이 있다.”

로버츠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비열하게 웃었다.

“바로 결투 시작 전에, 가주가 술을 한 잔씩 따라 준다는 거지.”

“그게 태자 전하와 무슨 관계지?”

“가주가 술을 따라 주는 이유는 그 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승계전은 어떻지?”

드뇌브 후작보다 높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황태자와 밀튼 공작.

공작은 가문의 일이니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황실은 이야기가 다르다. 모든 귀족은 제국에 충성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결국 태자 전하께서 기념주를 따라 주실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그걸로 중독시키겠다는 건가?”

사실 두 사람은 다른 계획을 세웠었다.

로버츠가 가지고 있는 ‘오러 브레이커’는 굳이 섭취하지 않아도 다른 방식으로도 중독시킬 수 있는 효능을 갖춘 명약이었다.

가산을 탕진했다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 세웠던 계획보다 더 편하고 깔끔한 방식이니 계획을 바꿔야겠지. 태자 전하께서 협조해 주신다면 아주 수월하게 진행될 거야. 어차피 우리는 해약을 먹고 나가면 되는 거니.”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은데.”

“황실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쉽게 풀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렇군.”

“의심은 넣어 둬. 지금만큼 좋은 상황은 없다.”

“내일이 기대되는군.”

바로 그때, 한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두 공자는 살짝 놀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둘이 뭐 하고 있는 거야? 작당 모의라도 하나?”

시몬이었다.

모니카 영애를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게, 잠시 수련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상의하던 중이었습니다.”

“요즘 보니 다들 말도 안 하고 혼자 수련에 집중하던데. 그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

시몬의 일침에 로버츠는 말을 얼버무렸다. 대신 카펙이 나섰다.

“저희는 예전에 같은 스승님께 검술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동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서로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짚어 줍니다.”

“아, 그런가. 좋은 친구를 둔 셈이군.”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까 보니까 한쪽에서 끼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것 같아서 데리러 왔다. 공작 각하께 인사드려야지?”

두 공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회가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막아야 하는 일인데도 선뜻 인사를 할 기회를 주겠다고 한 거니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님.”

“어서 따라와.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예.”

두 공자는 은밀히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시몬의 뒤를 따랐다.

* * *

그사이, 드뇌브 후작은 공작과 독대하고 있었다.

밀튼 공작이 따로 청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승계전이 열리게 된 건가? 아까 보니 시몬은 멀쩡한 것 같은데 말이지.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이번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사실 밀튼 공작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나쁠 게 없었다.

처음 아크튜러스 가문과 혼약을 맺었을 때, 케나드가 차남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남부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가문이 아크튜러스이고, 유사시에 그들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메리트는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혼약을 맺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모니카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도 한몫했다.

케나드와 모니카는 누가 보더라도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시몬은 케나드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어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군.”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렇지요.”

드뇌브 후작은 노련했다.

후계를 잇지 않겠다는 표현보다, 기회를 주고 싶다는 표현이 훨씬 가문의 명예를 살리는 일이었으니까.

제국의 역사, 아니. 전 대륙에 존재하는 어느 국가의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동생에게 가문을 이을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는 장남은 없었다.

적어도 밀튼 공작이 아는 한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케나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몬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더군요.”

“으음. 아크튜러스 가문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오크와의 전쟁에서 아주 큰 공을 세웠다지?”

“공만 세운 게 아닙니다. 아주 좋은 경험을 하고 왔고, 또 깨달음도 얻은 모양입니다.”

“그 정도인가.”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시몬은 천재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오러를 깨우치고 지금은 아크튜러스 검식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케나드를 보니 녀석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 승계전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묵직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대가 보기에 이번 승계전에서 누가 우승할 거라고 보는가?”

“결국 시몬과 케나드의 싸움이 될 겁니다. 방계에서 온 공자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다 보았는데, 눈에 들어오는 자들은 없더군요.”

“그래서?”

드뇌브 후작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케나드가 압도적인 성장을 보여 준 것은 사실이나, 시몬은 이미 심검의 경지에 들어섰다. 이론적으로 케나드가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드뇌브 후작은 시몬과 케나드가 비밀 훈련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저는 그래도 시몬이 이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으음, 역시 그렇군.”

“하지만 케나드가 이기는 것도 나쁜 결과는 아니라고 봅니다. 강한 사람이 가문을 잇는다. 이 전통이 지켜지는 셈이니까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케나드가 이겼으면 하는군. 그래야 우리 가문과의 유대감이 더 짙어질 거니까.”

밀튼 공작은 노골적으로 생각을 드러냈다. 드뇌브 후작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귀족 사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가문의 명예와 이익이 우선시되는 일이니까.

“시몬이 이기더라도 저희 가문이 각하와 카펠라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드리지요.”

“아주 재미있는 경기가 되겠어.”

“황실에서도 귀한 손님들이 오시니 이번 승계전은 정말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음.”

실제로 밀튼 공작은 주변에서 청탁을 정말 많이 받았다. 승계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

이런 의미 있는 경기에 잡상인이 들어오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다음 날 오후.

황실근위대를 앞세운 근사한 마차가 아크튜러스 가문의 저택과 가까워졌다.

그와 동시에 반가운 소식도 전해졌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습니다.”

라니에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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