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로이드 가문의 해약 (2)
아주 농밀한 단약의 향기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개수는 총 10개.
가지각색의 단약이 잘 정렬되어 있었다. 대부분 어두운색을 하고 있어서, 입에 넣기만 해도 무척이나 쓸 것 같았다.
“두 명분을 만들어 오라고 했는데 10개를 만들어 왔다면, 다섯 종류라는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
퀘백은 순서대로 약의 종류와 효능을 설명했다.
“가장 흔한 중독 증상은 배탈입니다. 거기에 열을 동반시켜 전체적으로 컨디션을 떨어트리는 독약이 흔히 쓰이는데. 그 증상을 해소하는 약입니다.”
구토와 설사, 거기에 오한까지 겹치게 되면 정말 최악이다.
검술은 몸을 쓰는 일이다.
그래서 기사들은 평소에도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감기라도 걸리게 되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니까.
물론, 강한 기사는 약한 독 정도는 오러로 극복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고수들 사이의 승부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마비 증상을 일으키는 독을 해독하는 단약입니다. 이것부터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장 많이 쓰이는 독이 마비 계열의 독입니다.”
“그렇지.”
앞서 설명한 독은 컨디션을 떨어트릴 뿐, 목숨에 지장을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비독은 다르다.
호흡까지 멈추게 하기 때문에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중독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독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거다.
“어느 정도까지 해독할 수 있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비독은 모두 해독할 수 있습니다. 더 강한 독약이라고 해도 효과를 경감시킬 수는 있을 겁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까지는 오지 않는다는 의미지?”
“그렇습니다.”
“좋군.”
시몬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퀘백 남작의 능력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지금까지 가산을 탕진한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칭찬은, 드비안느를 생각해 굳이 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세 개의 단약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이건 오러 능력을 저하시키는 독약을 해독하는 약입니다.”
“전에 말했던 오러 브레이커의 해약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시간을 두고 하나씩 먹어서 효과를 증폭시키는 건가?”
시몬의 추론에 퀘백이 살짝 놀랐다.
“해약에도 식견이 있으셨군요!”
“식견까지는 아니고, 그냥 왠지 딱 보니까 그럴 것 같았거든.”
“역시 영민하십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여섯 시간 간격으로 하나씩 먹으면 가장 좋은 효과를 냅니다.”
약초학으로 제조되는 약이라는 게 으레 그렇다.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어떻게 복용하느냐에 따라서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오러 능력을 저하시킨다고 한다면 증세가 좀 다양할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이 해약은 오러를 억제하는 효과를 감소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또한 일부 독 중엔 혈맥을 막히게 해서 오러의 순환을 방해하는 것도 있는데, 이 단약이 혈행을 원활하게 도와주니 여러모로 좋을 것입니다.”
“든든하군.”
하지만 시몬은 부족함을 느꼈다.
얼마 전 입수한 쪽지에 따르면, 힐스트롱 가문에서는 좀 더 근사한 독약을 준비한 상황.
퀘백이 준비한 해약으로는 그 약의 작용을 완벽하게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솔직히 배후에 황실만 없었더라도 여기에서 만족했을지도 모르지. 우리 집안의 문제로 끝나는 거니까.’
하지만 황실이 아크튜러스의 후계자를 본인의 입맛대로 정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이젠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당연히 시몬은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미래는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해약들은 유용하게 쓰도록 하지. 수고 많았다.”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시몬은 일부러 그런 말을 꺼냈다. 퀘백이 기겁했다.
“소, 송구합니다. 공자님. 제 능력이 미천하여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으음, 용서까지 구할 일은 아니고. 솔직히 경은 평생을 약초학과 연금술에 바친 사람이잖아? 그런데 가문의 비전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 보여서 말이야.”
“비전이라 하시면…….”
“모든 독약을 치료하는, 혹은 예방하는 그런 멋진 영약 말이다.”
퀘백이 흠칫 놀랐다.
만독불침.
모든 독에 면역이 될 수 있게 하는 전설의 영약이 시몬의 입에서 거론되었다.
“왜 그리 놀라지? 아주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영약을 만드는 건 모든 약초학자들의 꿈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능력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재능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겠지요.”
“잘 모르나 본데, 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어울리지 않아. 하지만 지금 그대는 나와 어울리고 있지 않나? 그대뿐만이 아니지. 여기 있는 드비안느도 마찬가지고. 내 친우인 라니에리도 그래. 좀 더 욕심이 있었더라면 아주 높은 관직을 얻었겠지.”
적절한 시기에 당근이 던져졌다. 퀘백 남작은 다시금 자신감을 얻었다.
“로이드 가문에 중요한 임무를 주고 싶은데.”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시몬은 종이를 꺼내 그 위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적은 후 그것을 퀘백에게 건넸다.
빼곡하게 적힌 것은 약초 목록이었다.
“이건 대체…….”
평생을 약초학과 연금술에 투신한 퀘백 남작조차도 이것이 어떤 약에 쓰이는 재료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먼 미래에 개발되는 해약이니까.’
시몬은 잠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평화의 시대가 계속되는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은 몸살을 앓는다. 외부의 적이 없으니 내부가 곪기 시작한 것이다.
무수히 많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그러다 보니 중독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독약의 개발만큼 해약의 개발도 활발히 일어났다. 귀족들은 자신의 권력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이 시몬이 경험한 미래였다.
‘거기에 놈들이 어떤 재료를 썼는지 알아 버렸으니 해약을 만드는 건 문제도 아니지.’
다시금 목재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해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것들을 전부 먹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나와 케나드의 경지를 생각한다면 놈들에겐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보다 확실한 방법을 원했다.
그리고 퀘백 남작이 이번 일을 계기로 각성하여 더 훌륭한 가신이 되기를 바랐다.
그 증거로, 종이에 적힌 모든 재료는 이미 시몬의 서랍 안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굳이 따로 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시간은 이틀을 주지. 구해 올 수 있겠나?”
무리해서까지 명령을 내린 것은 퀘백에게서 어떤 분명한 목표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표가 주어졌다.
가문의 비전이 되는 그런 영약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론 지금은 ‘오러 브레이커’에 한정한 해약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퀘백이 사용할 시간은 그 질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으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약초는 몰라도 여기 적힌 화염초는 아주 구하기 힘든 것이라서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퀘백 남작은 정말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시몬은 오히려 웃었다. 무리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러자 시몬이 드비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럼 드비안느. 너에게 이틀의 휴가를 주지.”
“저요?”
“두 사람이 움직인다면 좀 더 빨리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두 부녀는 동시에 떠올렸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시몬의 말을.
그뿐이 아니다.
시몬은 지금 로이드 가문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와. 이틀이나 휴가를 주시다니…… 최선을 다해 볼게요!”
“명을 받듭니다. 반드시 믿음에 보답하도록 하지요.”
로이드 가문에서 온 두 부녀는 일분일초가 아깝기라도 한 듯,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시몬은 생각에 잠겼다.
‘만독불침의 영약…… 그건 전생에서도 구경할 수 없었던 약이었는데.’
어쩌면 이번 생엔 달라지지 않을까?
문득 그런 기대감이 들었다.
* * *
승계전을 앞두고 각지에서 귀빈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부의 대영주인 카펠라 공작가의 사람들이었다.
밀튼 공작은 케나드의 약혼녀인 모니카를 데리고 직접 아크튜러스 영지에 방문했다. 휘황찬란한 갑주를 걸친 기사단도 함께였다.
“각하께 인사 올립니다. 오시는 길 불편하진 않으셨는지요?”
당연히 드뇌브 후작이 직접 마중을 나갔다. 말에서 먼저 내려 공작가에 대한 예를 취하는 것도 완벽했다.
“으음, 크게 불편함은 없었네. 태자께서는 도착하셨는가?”
안부를 한번 물을 법도 한데, 밀튼 공작은 황실부터 찾았다.
당연한 일이다.
단순히 승계전만 열린다고 했다면 구미가 당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황태자가 오고 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는 무리 없이 제국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관계를 잘 만들어 두는 게 좋다.
그런 인식은 이미 제국의 수많은 귀족들에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드뇌브 후작은 아무나 초대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신성하게 치러져야 할 승계전이 시장통처럼 되어 버릴 테니까.
“거의 당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내일 오후쯤엔 도착하실 것 같군요.”
“자네가 고생이 많군.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승계전이 치러지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데 말이지.”
“하하하. 고생이라뇨. 이렇게라도 각하를 뵐 수 있다니 정말 기쁠 따름입니다. 근 3년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게 말이네. 오래 지났지. 전장에서 자네와 등을 맞대고 싸운 것도 참 오래전의 일이 되어 버렸군.”
“기억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람 참, 몸 둘 바라니. 뭐 그리 어려워하나? 곧 우린 혈맹이 될 터인데.”
밀튼 공작은 케나드에 대한 은근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어쨌든 분위기는 좋았다. 드뇌브 후작은 접대의 정석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적당히 틈이 나자 케나드도 공작에게 문안을 올렸고, 이어 모니카 공녀에게도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네에. 저도요.”
모니카는 체구가 작고 귀여운 인상의 영애였다. 공작가의 영애 정도라면 허영심이 하늘을 찔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지만, 의외로 소탈하며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케나드와는 아주 천생연분인 아가씨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시몬은 씁쓸히 웃으며 모니카에게 다가갔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어머, 시몬 공자님. 건강은 좀 어떠세요? 문병을 왔어야 했는데, 편지로만 안부를 여쭈어서 너무 죄송했어요.”
“천만에요. 덕분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건강해지기도 했고 말이죠.”
“정말 다행이에요.”
시몬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
하지만 지금 시몬이 고개를 숙인 이유는 근처에 밀튼 공작이 있어서도, 상대가 케나드의 약혼녀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 때문에 전생에서 엄청 고생했었지.’
추운 북방으로 쫓겨난 것은 케나드만이 아니었다. 모니카도 함께 따라가 고생을 했다. 거기에 조카들도 여럿 딸려 있었다.
따뜻한 남부에서 살다 북부로 옮겨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
이렇게 고개를 숙인다 한들 전생의 업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저, 공자님?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케나드와 라니에리는 시몬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짐작하는 눈치다.
시몬은 웃으며 저택 안쪽을 가리켰다.
“자, 가시죠. 제가 직접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감사해요. 공자님.”
“케나드.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만 있어? 어서 따라오지 않고.”
“예!”
그리고 그 화기애애한 장면을 질시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으니.
“잘들 노는군.”
로버츠와 카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