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로이드 가문의 해약 (1)
늦은 밤, 잠자리에 들려던 시몬은 방해를 받았다. 밖에서 노크가 들린 것이다.
시몬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침이 숫자 3을 넘으려 할 때였다.
늦은 새벽인데도 당직 기사들이 제지하지 않은 걸 보면 매번 드나드는 인물이 찾아온 것 같다.
“누구냐?”
“접니다.”
라니에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 가신으로 합류한 일로스테 남작도 함께였다.
며칠 사이에 그는 건강을 많이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저택에 막 왔을 때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는데, 지금은 눈빛이 살아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그것도 세트로다가.”
“급히 보고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뭔데?”
“일로스테 경과 마약의 유통 경로를 추적하는 도중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이라.”
시몬은 졸음이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한창 살롱에서 여인들과 놀아나고 있을 라니에리가 이 시간에 찾아온다는 것 자체가 정말 큰 일이긴 했다.
시몬의 시선이 일로스테 남작에게 향하자, 그가 답했다.
“황궁으로 마약을 납품하는 놈을 쫓다가 우연히 다른 놈을 잡게 되어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정보가 나오더군요.”
잠시 말을 끊은 일로스테 남작이 지저분하게 구겨진 쪽지를 건넸다.
잠시 시몬은 말없이 쪽지를 살폈다.
그곳엔 약초 리스트가 잔뜩 적혀 있었다. 시몬은 이 약초들이 어떤 약을 만드는 데 쓰이는지 알 것 같았다.
“독약의 재료군.”
“어떤 독약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라니에리가 물었고,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미래의 지식이 있었으니까.
“오러 브레이커 조합에 쓰이는 약이다. 오러의 발현을 방해하는 독약이지.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재료들이 더 들어갔군. 이 시기에 쓰이지 않는 약들인데.”
“그럼 전혀 다른 효능의 약이 되지는 않습니까? 간혹 재료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효과가 완전히 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맞는 말이긴 한데, 이건 아니다. 이건 확실히 오러 브레이커가 맞아.”
전생에 본 적이 있는 조합이었다. 시몬은 문득 이 쪽지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어떤 놈이 이걸 가지고 있었는데?”
“파우스트 상단에 소속된 상인이 들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이름 한번 기가 막히게 지었네. 영혼을 팔아서라도 약을 사 먹어야 할 것 같은 이름이야. 어디 소속이지? 그렇게 이름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신생 상단입니다. 가문에 소속된 상단은 아닙니다만, 힐스트롱 가문이 출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힐스트롱? 구린내가 벌써 펄펄 나는데.”
“그 쪽지에 적힌 약이 최근에 힐스트롱 가문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힐스트롱이라면 로버츠가 소속된 가문이기도 했다. 시몬은 빙긋 웃었다.
약의 재료가 들어갔다는 것은 그것을 만들었다는 의미와 다를 게 없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확실한 물증을 가져다주니 속이 후련해지는 듯한 느낌이군. 둘 다 고생 많았다. 쉽지 않았을 텐데.”
“저희만 나선 건 아닙니다. 아트라스 경과 로빈 경도 이번 일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잊지 않고 꼭 포상을 내리지.”
포상이라는 말에 라니에리가 한 소리 하려다 그냥 참고 말았다. 지금까지 밀린 포상이 상당히 많았으니까.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놈들이 어떤 식으로 독약을 쓰려는 걸까요?”
“그건 알 수 없지. 알 필요도 없고.”
“알 필요가 없는 거라면, 해약을 만드실 수 있는 거군요.”
시몬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방심할 생각은 없다. 놈들은 이번 일에 가문의 명운을 걸었을 테니까. 참, 그보다 알퐁스 놈들 쪽에선 뭐 소식 없어?”
“아직 없습니다. 사로잡은 놈을 좀 더 추궁할 계획입니다. 말단인 것 같아서 크게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볼 생각입니다.”
“어디에 잡아 놨어?”
“본성 지하 감옥입니다.”
본성은 전쟁 시에만 사용하는 곳이다. 인적도 드물고 기사와 병사들만 있기 때문에 매우 안전한 곳이기도 했다.
“탈탈 털어 봐. 가끔 희망 고문도 해 주는 거 잊지 말고. 사람이 조금은 희망이 있어야 마음을 고쳐먹는 법이거든.”
“맡겨 주십시오.”
죽여도 크게 문제는 되지 않는다. 잡힌 상인은 이미 마약 유통이라는 중죄를 저지른 상황이니까.
오히려 라니에리는 그 점을 이용하고 싶었다.
“공자님. 이번 건은 저에게 맡겨 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침 좋은 계획이 생각나서 말입니다.”
“우리 책사님이 오랜만에 밥값 하려고 하시는데 방해할 수 있나?”
시몬은 은근한 눈빛으로 재촉했다. 생각한 바를 말해 보라고.
“잡힌 자는 말단이고, 상단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입니다. 적당히 심문하다 풀어 주고 우리 쪽 첩자로 삼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 아주 싱싱한 떡밥이 되겠군. 월척을 낚길 기원하지.”
“감사합니다.”
“근데 말이야. 조사하는 도중 엉뚱한 정보가 걸렸다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만.”
“근데 나는 왜 그게 엉뚱하다는 생각이 안 들까?”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라니에리가 눈을 반짝였다. 지적인 호기심이 발동했을 때의 느낌으로.
“이 모든 게 하나의 진실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생각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뭐, 아니면 마는 거고.”
“과연, 그렇군요.”
시몬은 굳이 첨언하지 않았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하여 일을 순조롭게 풀어 갈 수도 있지만, 라니에리가 좀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공자님. 반드시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기대하지.”
두 사람이 물러갔다.
그대로 침대에 누운 시몬은, 문득 예전에 한스 경과 약속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구나. 녀석들. 서운해하고 있었겠네.’
시몬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비상벨을 꾹 눌렀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
아크튜러스 저택은 다시금 한바탕 소란에 휩싸였다.
* * *
“공자님.”
“…….”
“공자니임?”
계속되는 부름에, 침대에 파묻혀 있던 시몬이 눈을 뜨며 성질을 부렸다.
“아, 젠장…… 왜 깨워? 오랜만에 푹 자고 있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최근 시몬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엔 라니에리와 일로스테 남작이 뜻밖의 선물을 가지고 찾아왔었다.
방계 공자들의 음흉한 계획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아크튜러스 후작가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실마리가 되는 단서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비상벨을 눌러 기사단을 출동시키기까지 했다.
결국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제1기사단원들이었다. 한스 단장은 다시금 패배를 맛봐야 했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한 발 차이로 졌다는 것.
숫자 7의 징크스에서 벗어날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거기에 시몬은 매일 밤 케나드에게 신식 검술을 전수해 주고 있었다.
케나드는 정말 말 그대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결국, 어젯밤 사고를 치고 말았다.
고작 사흘 만에 새로운 아크튜러스 검식의 살검 단계에 진입한 것.
살검 단계를 완전히 마스터하려면 실전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승계전은 개별 전투다. 그 정도는 문제없이 치를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시몬이 걱정을 덜고 오랜만에 꿀잠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하지만 손님이 오셨는걸요?”
“좀 기다리라고 하면 되잖아. 하, 제니 넌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어떻게 계속 하녀 하겠냐?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말이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제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꿈에 나올까 무서운 바로 그 목소리.
“뭐지?”
시몬이 몸을 일으키자 침대 앞에서 드비안느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냐. 넌.”
“인사드립니다. 아크튜러스의 시녀로 일하고 있는 드비안느 로이드라고 해요. 공자님.”
“아니, 누가 몰라서 물어? 여기에 왜 얼쩡거리냐고? 제니는 어디 있고.”
“눈곱은 좀 떼시고 말씀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주 실한 녀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네요.”
시몬은 군말 없이 손가락으로 눈을 훔쳤다. 가만 보니 뒤쪽에 퀘백 남작이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서 있었다.
손님이라는 사람이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시킨 일이 하나 있었지.
“제니는 오늘 쉬는 날이랍니다. 효심이 풍부한 아이니까 집안일을 돕고 있지 않을까요? 요즘 잡화점 매출이 엄청나게 올랐다더라고요.”
드비안느는 천연덕스럽게 시몬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1억 실링의 추억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그때는 정말 뼈아픈 실책이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아끼는 하녀의 고민도 해결해 주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염장 지르러 왔나?”
“그럴 리가요? 저는 신실한 아크튜러스의 종인걸요.”
“세상 신실한 사람들 다 저세상으로 간 모양이네.”
“어머, 말씀을 험하게 하시네. 어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었지. 케나드가 큰 성취를 얻었거든.”
드비안느는 손뼉을 칠 정도로 좋아했다. 어렸을 때는 동생 삼고 싶다며 지극히도 케나드를 예뻐했던 그녀였다.
“와! 잘됐네요. 이따 가서 축하드려야겠어요.”
“괜히 떠들고 다니지 마라. 보는 눈 많으니까.”
시몬은 기지개를 쭉 켰다.
이제야 잠에서 좀 깨어났다. 그제야 시몬은 퀘백 경의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해약. 벌써 다 만들어 온 건가? 빠르네.’
전에 로이드 가문에서 만들 수 있는 모든 해약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만들어 왔다.
로이드 가문의 충성심과 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시몬이 비약의 레시피와 제조권을 준 덕에 막대한 부를 쌓게 되었다.
얼마 전, 퀘백은 12개의 비약을 납품했다.
비약은 개당 5천만 실링에 매입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는 상황.
총 매출이 6억 실링에 달했고, 시몬은 약속대로 그중 절반인 3억 실링을 로이드 가문에 보냈다.
연구비 지출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로이드 가문에 서광이 비친 순간이었다. 3억 실링이라면 1년은 충분히 보낼 수 있는 자금이었으니까.
그래서 퀘백 남작을 비롯한 로이드 가문의 모든 사람들은 시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품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퀘백 남작이 나무 상자를 내려놓고 예를 취했다.
“어서 와라.”
“먼저, 딸애가 공자님께 너무 무례하게 군 것 송구합니다. 가정 교육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집에서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몬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가정 교육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잘 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 게으르고 나태한 공자의 행태를 어떻게든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으니까. 귀인의 품격을 높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녀의 덕목 아니던가?”
“황송합니다, 공자님.”
“경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정말 진심으로 드비안느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면 나를 흔들어 깨우기 전에 말렸겠지.”
속을 들킨 퀘백 남작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크튜러스에서 인정받는 시녀를 배출한 집안이다. 뿌듯함마저 느끼는 듯했다.
“앉지.”
시몬은 손가락을 튕기며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퀘백은 커다란 나무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리더니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