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케나드의 진심 (2)
“전수입니까.”
전수라는 것은 기술이나 지식 같은 것을 전해 받는다는 의미이다. 즉, 시몬은 이미 새로운 검식을 마스터했다는 말이 된다.
잠시간 이어진 침묵을 깨고 케나드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전에 저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건 무엇입니까?”
“현재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통용되고 있는 살검 단계의 초식이었지.”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아크튜러스 검식의 격검 단계라고 말씀하신 것을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랬었지. 이 말도 기억하고 있나? 현재 아크튜러스 검식은 지루하다고 말이야.”
케나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랬더니 한스 경과 같은 반응이라고 했던 시몬의 말도 생각났다.
“그때 내가 가르쳐 줬던 동작은 새로운 초식이었다. 즉, 기본자세라 할 수 있지. 너는 평소 부지런히 그 초식을 연마했고 실전에서 써 볼 기회도 있었다. 지금 내가 가르쳐 줄 것은 초식의 묘리다.”
“그렇다면 저는 정확히 어떤 단계에 올라서 있는 겁니까?”
“구식 검술로 치자면 살검 단계일 거고, 신식 검술로 치면 격검 단계일 거다.”
잡종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식 검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기존에 익혔던 검술을 대성해야 한다.
물론, 중간에 검술을 바꾸는 사람도 적지는 않다.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그들의 공통점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케나드는 강했고, 앞으로도 성장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심검의 경지에 오르기도 전에 새로운 검술에 눈을 떴다.
하지만 그 부정적인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다.
‘형님이 가르쳐 주신 검술은 분명히 지금의 것보다 강력하다. 무엇보다도 아크튜러스 정통 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해.’
새로운 검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보다 빠르고 패도적으로 바꾼 것이었다.
아크튜러스의 전통을 승계한 것.
즉, 가문의 의리와 신뢰를 저버린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느새 케나드는 신뢰로 가득한 눈빛을 시몬에게 보내며, 그의 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기기 시작했다.
“복잡한 마음이 좀 정리된 것 같은 느낌이군.”
“맞습니다. 형님.”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고, 오히려 생각이 많은 것은 수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도 있다.”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형님을 믿습니다.”
그래도 시몬은 나머지 궁금한 점을 해결해 주기로 했다.
중요한 부분에서 의문이 남는 것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니까.
“구 검법의 살검 단계에서 신 검법의 격검으로 바로 넘어간 것은 그 노력과 시간에 비해 효율이 압도적으로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강해진다는 목표가 같다면, 좀 더 빠르고 편한 곳으로 가는 게 좋잖아?”
“대체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나는 겁니까?”
“검식을 익힌 자의 개인적인 역량의 차이에 따라 많이 달라지겠지만…… 구 검식의 살검을 마스터했다고 해도 신 검식의 격검을 마스터한 사람을 이기지 못할 거다. 심검으로 가게 되면 차이는 더욱 극명해지겠지.”
아크튜러스 검식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로 격검, 아주 기본적인 자세를 연마하는 단계다.
두 번째는 살검. 적을 효과적으로 베어 낼 수 있는 단계다.
세 번째로는 심검. 마음대로 검을 움직일 수 있는 경지를 의미한다.
시몬의 설명은, 적어도 새로운 검식이 기존 검식보다 한 단계 이상 효율이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정도입니까.”
“내가 전에 가르쳐 준 새로운 검식은 어느 정도로 익혔지?”
“말씀하신 대로 오크와의 전쟁이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치르고 난 이후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 검식의 격검 단계를 마스터했다고 봐도 된다. 아마 우리 기사단에서 너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평생을 목표로 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거룩한 칭찬.
케나드는 그 어떤 보상보다도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어려웠던 것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열병을 앓고 난 직후, 시몬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 같이 가는 거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케나드가 시몬을 식당으로 모신다고 했을 때, 시몬이 케나드의 말을 정정해 준 적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시몬은 이올린을 끔찍이 아꼈고, 이올린의 생모인 미온의 병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그밖에도 가족을 위해 한 소소한 일들이 떠올랐다.
문득,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이런 게 가족인 건가.’
케나드는 문득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계기를 얻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몬이 겪었다고 주장하는 그 전생에 대해서도 떠올릴 수 있었다.
‘형님도 분명 마음의 짐이 있으셨지. 나를 추운 북방으로 내쫓아 이민족과 싸우게 하다가 쓸쓸히 죽게 만드셨다고.’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케나드는 오히려 드뇌브 후작처럼 형님이 긴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케나드는, 가슴속에 맺힌 그 뜨거운 감정을 시몬에게 나눠 주고 싶었다.
“형님. 예전에 전생 말씀을 하시며 이런 이야기도 하셨었죠? 저를 북방으로 내쫓아 고생만 시키다 죽게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시몬은 동생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생에서는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저는 형님과는 달리 추운 걸 좋아합니다. 아마 열심히 이민족들과 싸우고 훈련하면서 더욱 강한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겠죠.”
“그래. 너라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형님.”
케나드가 하늘 같은 형님의 말을 끊은 건 처음이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는 전생의 기억이 없어서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 형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
“진심입니다. 형님. 만약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면, 이제는 떨쳐 내셔도 됩니다.”
케나드의 마음이 닿은 걸까.
시몬 또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시몬은 황망히 달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달이 참 밝구나. 케나드.”
“갑자기요?”
“음, 그냥 달을 한번 쳐다보고 싶었다.”
눈물을 쏟을 뻔했다. 하지만 시몬을 잘 참아 냈다.
전생에 무슨 위업을 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시몬은 그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회귀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저는 다음 생에도 형님의 동생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좀 징그러운데? 보통 그런 말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하지 않나?”
“우린 가족이니까요.”
“그럼 다음번엔 네가 형 하는 걸로 해. 장남이라는 자리의 어려움을 뼛속까지 경험해 보길 바란다.”
“그냥 둘째가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이 녀석이.”
잠시간의 농담에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케나드는 다시 배우는 자의 입장으로 돌아왔다.
“그보다 형님은 아까 저에게 새로운 검식을 전수해 준다고 하셨지요?”
“그래.”
“일반적으로 검식을 전수하는 입장이라면, 그 검식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격검의 단계에 있는 기사가 같은 단계에 있는 기사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죠.”
“그렇지.”
“그렇다면 형님은 신 검식의 심검 단계까지 모두 마스터하신 겁니까?”
시몬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요…….”
이대로라면 승계전에서 시몬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몬은 분명히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 부분에 대해 케나드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서 싸워 보면 알 일이다.
“케나드. 아직도 네가 이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남아 있느냐?”
“조금은 있습니다. 형님께서 새로운 검식까지 완전히 마스터했다는 걸 알고 나니, 이것이 정말 가문을 위한 길인가 염려스럽기도 하네요.”
“그럼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라. 내가 검선의 길을 걸을 거라고.”
“소문이 사실이었습니까?”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라니에리는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단은 조용한 곳에 묻혀서 지낼까 한다.”
“그렇군요.”
“가문을 잇는 것만이 가문을 위한 길이 아님을 증명하려 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아크튜러스 가문을 수호할 것이다.”
“정말 든든합니다, 형님. 그런 뜻이시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몬이 고개를 까딱였다.
스릉!
케나드가 검을 뽑았다. 그를 닮은 검이었는데, 매우 투박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하지만 검날만큼은 아주 예리하게 살아 있었다.
“일단 눈으로 잘 보아라. 내가 펼치는 검식을.”
시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정원을 거니는 것처럼 사뿐한 체술.
아주 간단한 움직임처럼 보였으나, 케나드는 저 동작 자체가 엄청난 수련의 결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가볍고 자연스럽게 보였으니까.
그런데 돌연, 시몬의 검로가 바뀌었다.
‘기도가 갑자기 달라졌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상황이 딱 그랬다. 가상의 목표를 잡은 시몬의 검은, 내리꽂는 번개의 창처럼 강하게 쏘아졌다.
쐐애액!
그리고 찾아온 정적.
“따라 할 수 있겠나?”
검세를 푼 시몬이 물었다. 잠시 멍해 있던 케나드는 정신을 번쩍 차리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다. 황궁에서 태자 전하와 황녀께서 오시기 전까진 모든 초식을 익혀야 하거든. 어림잡아 5일 정도 남았나? 앞으로 남은 초식은 총 여섯 개다. 방금 것을 포함해서.”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만으론 안 돼. 잘해야 한다.”
“갑니다.”
이번엔 케나드가 동일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려는 그 단순한 동작을.
쉬익!
신 아크튜러스 검식의 살검을 구성하는 제1초식.
하지만 검을 쥔 그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름과 동시에 시몬이 손을 휘저으며 멈추게 했다.
“그게 아니야. 땅을 박차고 오르는 느낌이 아니라 나비처럼 사뿐히 날아가는 느낌으로 뛰어올라야 한다. 다시 보여 줘?”
“아, 아뇨. 죄송합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케나드가 다시 검을 쥔 채 뛰어올랐다.
아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웠으나 시몬의 눈에 차기엔 어림도 없었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속성으로 검술을 익히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니.’
시몬도 새로운 검식을 대성하기 위해 30년 이상이라는 시간을 소모했다.
어떻게 보면 5일 만에 살검까지 전수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케나드. 긴장 풀어.”
시몬은 검을 검집으로 갈무리하고, 동생의 어깨와 목 근육을 마사지해 주었다.
“내가 새로운 검식의 심검 단계까지 마스터하는 데 들어간 시간은 30년이다. 살검까지만으로 생각한다면 10년쯤이겠지.”
시몬은 두 손으로 동생의 어깨를 다독이며 눈을 마주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실패한다고 해도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너의 재능을.”
다소 침울해졌던 케나드의 눈빛에 다시금 도전의 불길이 타올랐다.
“꼭,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형님!”
“좋아. 바로 가 보자.”
꽈악!
케나드가 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뛰어올랐을 때, 시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거친 바닥을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나비가 그곳에 있었다.
‘역시, 케나드 넌 천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