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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83화 (83/120)

83화: 케나드의 진심 (1)

“무슨 일이냐?”

시몬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마침 눈을 감고 쉬려고 했는데 집사가 방해했기 때문이다.

살짝 눈치를 본 집사가 조용히 고했다.

“황도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일로스테 남작이 찾아왔다고 하면 알아들으실 거라고 하십니다.”

“일로스테 남작이라고?”

“예.”

일로스테 남작과는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 알데바란과 알퐁스, 그리고 남부의 전장을 오가며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굳이 연락하지 않은 이유는 그 스스로가 알아서 처신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최근 황녀는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온다는 건 역시 황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거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시몬이 손님을 들이라 명했다.

잠시 후, 삐쩍 마르고 창백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로스테 남작은 전에 봤을 때보다 살이 더욱 빠져 있었다.

“잘 좀 먹고 다니지 꼴이 그게 뭐야? 누가 보면 거지인 줄 알겠다.”

“위대한 아크튜러스에 무한한 영광을. 오랜만에 뵈오.”

“이런 이런, 목소리가 완전 매가리가 없네.”

턱을 괸 시몬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있기가 좀 그래서, 함께 들어온 집사에게 손을 저어 다과를 내오라고 명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오.”

“미안할 것까지 있나. 그만큼 급한 일이 있어서겠지?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좀 걱정되긴 했었는데.”

“으음…….”

그 찰나의 신음이, 여기까지 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의 의복 곳곳이 찢겨 있었다.

상처에서 새어 나온 것처럼 보이는 혈흔도 남아 있었다. 땅을 굴렀는지 흙까지 묻어 있다. 결코 여기까지의 여정이 쉽지 않았으리라.

“나를 따르던 자들 모두 죽었소. 복면을 쓴 자들이 갑작스레 들이닥쳤고, 모조리 죽임을 당했지.”

“그럼 혼자 남은 거냐?”

“그렇소.”

“그래도 용케 살아났네.”

모조리 죽었다는 말에도 시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일로스테는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혔다.

눈앞의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택에서 쫓아낼 것 같아서.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대비해 두었소. 언제든 내 목을 노릴 자들이 들이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 아무리 황녀가 아끼는 개라고 해도 비상 탈출구까진 알아내지 못했소.”

“그래서 이렇게 홀쭉해진 거군. 신경 쇠약에 걸릴 만하겠어. 잠도 제대로 못 잤겠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나를 지켜 줄 수 있소?”

일로스테 남작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시몬은 조금도 처량하다 느끼지 않았다. 그러기엔 전생에서 당했던 것이 너무나도 선명히 떠올랐으니까.

그렇다고 시몬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나 황실과 관계된 일은 철저히 계산적으로 움직여야지. 황녀가 이놈을 제거하려고 했던 건 다 이유가 있을 테고.’

한마디로, 일로스테를 살려 두는 것보다 죽이는 게 낫다고 판단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실, 지금 당장 일로스테 남작을 내쫓는다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쨌든 그의 가문은 몰락했고, 가주인 그는 인적 없는 곳에서 살해당해 몬스터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운명을 맞이할 테니까.

‘그러기엔 아직 이용할 가치가 있긴 해.’

처음부터 위계를 짠 것은 시몬 쪽이었다.

일로스테 남작은 아직까지도 황녀와의 관계가 들통난 이유를, 황녀 스스로 부정한 관계를 밝혔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몬이 크게 열병을 앓았고, 황실과의 사이가 급속하게 나빠지게 되었다고.

모든 일이 짜 맞춰진 것처럼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다 해서 일로스테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한 것은 아니다.

황녀와 알퐁스 백작가와의 커넥션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니까.

나중에 증인으로 세울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황녀를 법정에 세울 수만 있다면, 그녀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생생히 증언해 줄 것이다.

라니에리와 한번 시선을 교환한 시몬은 결정을 내렸다.

“내가 꽤 신뢰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나 보군. 전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아크튜러스에서 새 출발을 도와주겠다고 한 것 말이야.”

“기억하고 있소.”

“한 말은 지켜야지. 그렇다면 내 밑으로 들어와라. 아버지께 청해 너의 신분 세탁을 도와주지.”

한마디로 아크튜러스 가문이 방파제가 되어 주겠다는 말이었다.

눈물을 글썽인 일로스테는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베풀어 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공자님!”

일로스테의 말투가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동등한 귀족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말이었다면, 이제는 그에게 완전히 굴복한 듯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시몬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내가 널 용서했다는 건 아니다. 앞으로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네가 범한 죄를 용서받기는 힘들겠지.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일 거다.”

“그건…… 각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악착같이 살아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보는 날이 오겠지.”

“명심하겠습니다. 공자님.”

이제 그는 두 번 다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아크튜러스의 가신이 되었으니 임무를 하나 주마.”

“뭐든 명령만 내리십시오.”

“엘 루나에서 사용된 마약, 양이 꽤 많지?”

“그렇습니다.”

마약에도 종류가 다양하다. 당연히 제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약물들이다.

“너도 중독되지 않았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맞습니다. 지금도 금단 증상 때문에 좀 힘듭니다.”

“그래도 참아라. 두 번 다시 약에 손을 댔다간 산 채로 잡아다 황녀에게 던져줄 거니까.”

“예.”

“황녀가 주로 했던 약 품목 좀 읊어 봐. 기억나는 대로 전부.”

일로스테 남작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황녀가 애용했던 약을 술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서큐버스라고 불리는 미혼약은 물론, 팬텀이라는 이름의 환각제, 그리고 포르마라는 발정제가 주로 쓰였습니다. 이밖에도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만 자주 쓰인 건 저 셋이었지요.”

서큐버스, 팬텀, 포르마.

시몬도 익히 들어 본 종류의 마약이었다. 게다가 의존성이 심해 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엄격히 금지하는 약물이기도 하다.

시몬은 그 사실에 주목했다.

“황녀만 한 게 아니라 엘 루나 멤버 모두 그 약을 같이 한 거지?”

“맞습니다.”

“완전히 미쳤군.”

정말 황태자가 뒤를 봐주고 있기에 망정이지, 이 정도로 많은 약물을 황궁으로 들일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였다.

만약 발각된다면 스캔들 정도로 끝나지 않을 터.

그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와 황녀 사이에도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건가? 단순히 권력을 교환하려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 같은데…….’

아무리 회귀했다고 해도 그것까진 알 수 없었다.

중년 이후로는 메르세데스 황녀에게 완전히 질려 무슨 짓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까.

“공자님.”

라니에리가 상념을 깨워 주었다.

시몬은 머릿속을 비우고 다시 일로스테 남작에게 집중했다.

“너에게 충분한 자금과 인력을 지원해 주마. 그 마약들이 황실로 어떻게 들어갔는지 조사해 봐. 할 수 있겠지?”

“꼭 해내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황실로 들어가는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반가운 말이었다.

하긴, 그 다양한 마약을 실컷 즐기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

“그냥 알아서는 안 된다. 명백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황실의 약점을 잡을 수 있으니까. 라니에리. 너도 협조하도록. 가능하면 진 경에게도 연락해서 도움을 청해 봐. 남부의 천재 둘이 맞대면 뭐라도 하나 나오겠지.”

“명을 받듭니다.”

“그보다 주군.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만…….”

“말해 봐.”

“아무래도 아크튜러스 쪽에 황녀 쪽 첩자가 심어진 것 같습니다. 황녀가 이쪽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마치 손바닥 바라보듯이 말입니다.”

“언제 황녀랑 또 만났었는데?”

“암살당하기 바로 전날입니다.”

대놓고 첩자를 붙이지 못하니 아예 저택에 심어 놓은 건가?

‘뭐, 따지고 보면 비일비재한 일이지.’

제국에서 지방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기 사람 하나 심는 건 공공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아크튜러스 저택 내부에 일하는 사용인만 해도 수백에 달한다는 것.

거기에 기사까지 포함하면 수가 천 명이 넘는다.

그 상황에서 첩자를 색출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다.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승계전을 관람하러 이곳에 올 테니까.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승계전에서 이기느냐니까, 뭐 실컷 알아 가라지.”

시몬이 손뼉을 치자 제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니. 이자에게 머물 만한 방을 내어 주도록.”

“알겠습니다. 공자님.”

“나는 잠시 아버지에게 다녀오겠다. 라니에리. 너는 아트라스 경을 일로스테 경에게 소개해 주도록. 조사하다 보면 무력이 필요한 일이 생길 거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시몬은 그길로 드뇌브 후작을 찾았다.

사정을 설명하니, 드뇌브 후작은 작위를 내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일로스테 남작은 ‘바빌론’이라는 성씨를 받게 되었다.

“결국은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한때 전장을 호령했던 드뇌브 후작은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도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너의 변덕으로 시작된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황실이 우리 가문을 견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 도가 지나쳤군.”

“만약 그때 제가 황녀와 혼인을 물리겠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모든 것이 엉망으로 흘러가고 있었겠지. 이유도 모른 채로 말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일, 포기하지 말거라. 어떤 일이 있어도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예. 아버지.”

이쪽에서 일이 착착 진행되는 사이, 황도에서 황태자와 황녀가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분위기가 급반전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승계전이 열릴 아크튜러스 저택의 공기가 점차 무거워지더니, 마치 전운이 깔린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방계의 후계들은 훈련에 더욱 열중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인사를 나누며 교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화조차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 시몬은 케나드를 따로 불러냈다.

모두가 잠든 시각.

아크튜러스의 직계만이 사용할 수 있는 연무장. 그 한가운데에 시몬이 검을 쥔 채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형님. 부르셨습니까?”

“왔냐?”

케나드도 무장한 상태였다. 검을 걸치고 방검복까지 입고 있었다. 그도 시몬이 왜 불렀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케나드가 적당한 거리에 서자, 시몬이 검을 꺼냈다.

번쩍!

달빛을 받은 검이 한차례 번쩍이며 검광을 뿜어냈다.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다. 너에게 새로운 검식을 전수해 줄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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