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81화 (81/120)

81화: 포기할 수 있는 용기 (2)

드뇌브 후작은 뮬라타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려 했었다.

그런데 응접실엔 뮬라타 말고도 오크 세 명이 더 있었다. 드뇌브 후작을 노려보더니, 누런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네가 초대한 손님인가?”

“정확히는 뮬라타가 데려온 부관들입니다.”

“부관이라.”

“아주 뛰어난 전사들이죠.”

이들은 첫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사들이었다.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였다.

무장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오크에게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워낙 체격이 좋기 때문에 온몸이 둔기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인사들 해라. 이분이 아크튜러스의 주인이신 드뇌브 각하시다.』

세 오크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뮬라타가 눈짓하자 오른손으로 가슴을 툭툭 쳐 보였다. 오크 전사들이 상대를 존중할 때 하는 인사법이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드뇌브 후작이 시몬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서 방계 식구들을 모두 데려오거라.”

“모두 말입니까?”

“그래. 전부.”

드뇌브 후작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어 그 저의를 읽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시몬은 그 명령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바로 소집하겠습니다.”

잠시 후 시몬이 방계에서 온 공자들을 모두 데려왔다. 열 명이 넘는 청년들이었다.

시몬도 방계의 후계자들이 모두 모인 것은 처음 보았다.

다들 오래도록 수련한 티가 났다. 웬만한 기사들보다도 강해 보였다.

그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로버츠와 카펙.

그들은 이미 방계들 중에서도 인정을 받는 모양인지, 맨 앞에 서서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오크 놈들이 왜 이곳에 있는 것입니까?”

로버츠가 당돌히 물었다. 그의 표정엔 적개심이 가득했다.

그것은 다른 공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예상했던 반응.

“우리 가문과 오크족이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

후작은 오히려 웃었다.

그제야 로버츠는 후작에게 뭔가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압니다. 하지만 오늘은 승전기념일입니다. 오크 놈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너희들을 모두 부른 이유다. 가문을 잇는다는 것은 단순히 부와 명예를 승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때로는 생사를 겨뤘던 적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도 있는 거지.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말이야.”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충고였다. 그뿐이 아니라 거대 가문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의 충고이기도 했다.

그 말에, 로버츠를 비롯한 다른 공자들은 더는 반문하지 못했다.

오히려 후작은 기회를 준 것이다.

차기 아크튜러스의 가주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서 공평하게 가르쳐 준 것이니까.

“나는 이곳에서 오크 대족장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할 것이다. 너희들에게 좋은 견학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해 부른 것이니, 잘 지켜보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각하.”

“영광입니다.”

저마다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공자들은 회담이 시작되지마자 아찔함을 느꼈다.

‘제국어가 아니라 오크어인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모든 협정은 전쟁에서 이긴 쪽의 편의를 우선한다. 크게 본다면 제국과 오크 연합이 싸운 것인데, 드뇌브 후작은 굳이 오크어를 사용해 뮬라타와 소통했다.

로버츠는 물론 카펙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한쪽에서 딴짓을 하고 있던 시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로버츠가 빠르게 다가갔다.

“공자님.”

“왜?”

“오크어에 능통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들과 협정을 성사시킨 것도 실은 공자님이 오크들의 문화를 깊게 이해하고 계신 덕이라 들었고 말이지요.”

“그런데?”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저쪽에서 어떤 말이 오가고 있는지.”

그러자 눈치가 빠른 공자들이 하나둘 로버츠에게 따라붙었다. 이윽고 모든 공자들이 시몬에게 모여든 꼴이 되고 말았다.

시몬은 혀를 찼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 알지?”

“무엇을 원하십니까?”

“승계전에 기권해라. 그러면 내가 친히 통역해 주지.”

“……!”

모여든 공자들이 깜짝 놀랐다.

승계전이야말로 공자들이 아크튜러스의 본가를 찾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작 통역을 대가로 그것을 포기하라니?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각이 많아지자, 그들은 시몬이 복잡하게 변해 가는 자신들의 표정을 감상하고 있다는 것조차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한쪽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저는 승계전을 포기하겠습니다. 대신 오늘의 회담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지나가다 인사를 받은 적은 있지만, 오래 말을 섞은 적은 없는 청년이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단단한 인상을 주는 자였다.

시몬은 흥미를 느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트라스입니다. 센타우리 자작가의 장남입니다.”

“센타우리 자작가라.”

아크튜러스를 오래도록 섬겨 온 가신 가문 중 하나였다. 보통 방계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만, 일부는 가신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인정하고 실리를 챙기려는, 어떻게 보면 셈이 빠른 사람들이 취하는 포지션이기도 했다.

“왜 기회를 포기하지? 정말 운이 좋다면 승계전에서 이기고 아크튜러스의 주인이 될 수 있는데 말이지.”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제 실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객관화가 잘되어 있군.”

“제가 이곳으로 온 건 물론 승계전에 참가하려는 목적이기도 하지만, 본가의 분위기를 알고 싶었습니다. 배울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서클이냐?”

“이제 1서클입니다.”

아트라스는 숨겨야 하는 자신의 비밀을 너무나도 쉽게 말하고 말았다.

주변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고작 1서클로 승계전에 참가할 생각을 해?”

“웃기는군.”

“저런 놈하고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지.”

“그러게 말이야.”

쏟아지는 비아냥에도 아트러스는 꿋꿋이 시몬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몬은 그가 마음에 들었다.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센타우리 가문의 아트라스라는 이름이 떠오르진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둘 중 하나다. 평범한 삶을 살았거나, 아니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거나.

‘어느 쪽이든 나에게 해가 될 일은 없겠지.’

시몬은 또렷하면서도 호기심이 많은 아트라스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케나드와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트라스.”

“네, 공자님.”

“너는 고작 1서클에 불과한 기사이지만…… 앞으로 큰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춘 것 같군.”

그러자 다른 공자들이 깜짝 놀랐다.

시몬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뿐이 아니라 오크 대족장 열두 명을 모조리 물리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

당연히 충격적이었다.

“아닙니다. 저에겐 재능이 없습니다.”

“오러가 많고 검을 잘 쓴다고 해서 재능이 있는 건 아니다. 세상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들이 훨씬 많거든. 그리고 넌 그걸 선택한 거고. 그렇지?”

“예. 맞습니다.”

시몬이 다른 공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센타우리 가문의 아트라스는 승계전을 포기했다. 또 포기할 사람은 없나?”

사실 처음엔 농담이라며 모두에게 통역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 숨겨 둔 송곳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렇다면 계획을 바꿔야 했다.

“…….”

“…….”

아무도 선뜻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시몬이 결론을 내렸다.

“그럼 아트라스 너에게만 알려 주지.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에 대해 말이야.”

시몬은 아트라스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드뇌브 후작과 뮬라타, 그리고 세 오크 전사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통역해 주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에게 필요한 건 2천 명에 달하는 오크들이 먹을 만한 곡물과 고기란 말이지?』

『그렇소. 다들 오랜 전쟁과 기근으로 굶주려 있소. 땅을 개척하려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지. 곡물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을 거요.』

『마침 솜씨 좋은 사냥꾼이 우리 가문으로 들어왔지. 그들에게 맡기면 고기를 대는 것은 별문제가 없을 거다.』

드뇌브 후작이 떠올린 가문은 마크스먼, 바로 로빈의 가문이었다.

아직도 그 활쏘기 시합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도 인상적인 솜씨였기 때문에.

“시몬.”

후작이 시몬을 부르자, 시몬은 아트라스를 데리고 가까이 다가갔다.

후작은 아트라스를 힐끔 바라보았으나, 신경 쓰지 않고 시몬에게 물었다.

“마크스먼 가문에 사냥꾼들이 좀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로빈 경의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이 있습니다. 아주 솜씨 좋은 자들이지요.”

시몬은 자기도 사냥당할 뻔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하사한 영지엔 사냥감이 많지. 당분간 오크에게 사냥한 것들을 제공할 수 있겠나?”

“문제없을 겁니다. 다만 그러려면 세금 문제를 좀 해결해 주셔야 하겠지요.”

“그래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개척 작업이 끝날 때까지 고기를 납품하면, 그때까지의 세금을 완전히 면제해 주겠다고 하거라.”

“알겠습니다.”

시몬과 아트라스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아트라스가 물었다.

“이런 것으로도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군요.”

“사람들은 각하를 두려워하지만 생각보다 합리적인 분이시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뭐라도 말해야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지.”

“감사합니다 공자님. 많은 걸 배웠습니다.”

“감사는 무슨, 이제 시작인데.”

식량 문제가 해결되자 자연스럽게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대의 뛰어난 전사들이 우리 군사들에게 새로운 전투 방법을 전수한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래서 이들을 데려온 것이오.』

뮬라타가 세 오크 전사를 가리켰다.

『황금망치부족, 검은바위부족, 서리도끼부족의 새로운 족장들이지. 이들이 우리 위대한 오크의 전투술을 그대들에게 전수할 것이오.』

『든든하군.』

『이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겠소?』

『물론이지.』

후작은 서기관 칼림을 불렀다. 그의 손엔 커다란 종이가 들려 있었다.

드뇌브 후작은 종이를 펴 뮬라타 쪽으로 들이밀었다.

『오늘부로 공표될 새로운 영지법이다. 이종족의 차별과 혐오를 금지한다는 법령이지. 이를 어기는 사람은 영지법에 의거해 처벌을 받게 된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뮬라타가 보기에도 대단한 법안이었다. 영지 전체가 오크를 지켜 준다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나는 효율을 중시하지. 그대의 전사들이 아무런 방해 없이 아크튜러스의 전사들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네.』

『그렇군.』

『물론 새로운 법이 세워진다고 해도, 모두가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것이야. 일탈하는 놈들이 있겠지. 거기서 생기는 자잘한 트러블은 그대들이 알아서 해야 할 것이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번 협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네.』

『…….』

『하지만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니 나쁘지 않군. 아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까.』

시몬을 한번 힐끔 바라본 드뇌브 후작이 돌연 웃었다.

『혹시 듀란이라는 오크를 아는가?』

『알고 있소. 위대한 전사였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긴 했지만.』

『먼 옛날 그와 싸운 적이 있다네. 그때는 승부를 가르지 못했었지.』

그러자 오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듀란이라는 오크가 얼마나 대단한 오크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결판을 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어.』

『원하면 내가 대신 상대해 주겠소.』

『그대가? 하하하하. 그 전에 내 아들부터 이기고 오는 게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자리에서 일어난 드뇌브 후작이 뮬라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뮬라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들의 예법이라는 것을.

『앞으로 잘 부탁하네. 대족장.』

『우리야말로.』

굳은살로 가득한 드뇌브 후작의 손과 커다랗고 털이 수북한 뮬라타의 손이, 서로의 손을 굳게 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