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포기할 수 있는 용기 (1)
예정된 축제가 시작되었다.
아크튜러스의 수도 중심부에 세워진 개선문 주변으로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
오늘은 킬스톤으로 원정을 떠난 본대가 도착하는 날.
서기관 칼림은 평소보다도 신경을 더 많이 썼다.
중요한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아크튜러스의 방계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위엄을 보여 주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던 셈이다.
부우우우!
웅장한 나팔 소리가 들려오더니, 저편에서 아크튜러스의 용사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아크튜러스에 무궁한 영광이 있으리!”
“영주님 만세!”
“시몬 공자님 만세!”
“케나드 공자님 만세!”
꽃잎이 사방으로 뿌려지며 용사들을 축복했다.
강도 높은 행군에 지칠 만도 했지만, 기사와 병사들은 영지민들이 보내는 성원을 충분히 즐겼다.
그렇다고 표정이 풀어지거나 대오가 흔들리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행군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것은 시몬과 케나드.
중무장한 케나드와는 달리 시몬은 평소에 즐겨 입던 예복만 걸치고 있었다. 전장에서 바로 귀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군 정지!”
행군이 잠시 멈추었다.
이올린을 비롯한 아크튜러스의 여인들이 개선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그녀들의 손엔 목에 걸 수 있는 커다란 화환이 들려 있었다.
시몬과 케나드는 물론, 이번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제1기사단 파월과 제2기사단 한스에게도 각각 화환이 전달되었다.
전쟁의 영웅들은 화환을 목에 걸며 환하게 웃었다.
“오라버니. 정말 멋져요. 우리 영지를 지켜 주셔서 감사해요!”
이올린이 특별히 준비한 꽃다발을 시몬에게 내밀었다.
의젓하면서도 귀여웠다. 평소처럼 이올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에게만 주는 거니?”
“오라버니가 가장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어요.”
“누가?”
“어머니가요.”
부끄러움과 걱정이 많았던 이올린은 변했다. 어머니가 건강을 되찾고 좀 더 활발해져 이렇게 공식 석상에까지 나서게 된 것이다.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시몬은 이올린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이올린. 잘 들으렴. 사실 전쟁에서 오라비가 한 일은 별로 없단다. 여기 있는 케나드 오라버니가 시켜서 한 일이지.”
“에…… 정말요?”
“그럼, 정말이고 말고. 앞으로 우리 영지는 케나드 오라버니가 지켜 줄 거란다. 나중에 친구들을 만날 일 있으면 케나드 오라버니 자랑 실컷 해야 돼. 알았지?”
“네!”
“그러니 꽃다발은 케나드 오라버니에게 주는 게 좋겠구나.”
“그래도 돼요?”
“되고말고.”
이올린이 준비한 예쁜 꽃다발은 결국 케나드의 품으로 돌아갔다.
화환을 목에 건 영웅들이 다시 말에 올라 행군을 이어 갔다.
목적지는 아크튜러스의 대연무장.
기사와 병사들은 그곳에 모여 드뇌브 후작에게 치하받을 예정이었다.
원래 시몬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충 얼굴만 보이고 끝내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불호령을 듣고는 본대와 합류한 것이었다.
‘방계 놈들 때문에 귀찮은 일이 한둘이 아니군.’
대강 상황을 눈치채고 있던 드비안느는, 시몬의 몸단장을 도우며 요즘 황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유행어를 하나 알려 주었다.
스불재.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결국 나 때문에 방계 놈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거니까.’
만약 방계의 후계자들이 와 있지 않았더라면 드뇌브 후작도 크게 잔소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켜보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원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좋지 않은 이야기가 퍼져 나갈 가능성이 컸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이 개선문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덕분에 잠이 부족했던 시몬은 무척 저기압 상태였다.
물론 시몬을 열렬히 환호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전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묵념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모두가 시몬같이 그런 건 아니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입니다. 형님. 사람들이 환호하는 걸 좀 보십시오!”
케나드는 손을 흔들며 영지민들의 환호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흔들 때마다 함성이 커졌다.
그에 비해 시몬은 시큰둥했다.
“나는 전생에서 실컷 봤으니 너나 재밌게 봐라.”
대륙통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웅이 되어 황도로 돌아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민들이 황도로 몰려들었었다.
물론 아크튜러스의 수도도 다른 영지에 비한다면 큰 편이었으나, 그때의 장관에 비할 수는 없었다.
“형님! 꿈보다 지금 이 현실이 더 생생하지 않습니까? 형님도 좀 즐기십시오.”
“꿈 아니라니까 그러네.”
“저길 보십시오! 저 개선문에 꽃을 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애를 썼을까요? 정말 대단합니다!”
“그건 맞아. 정말 애 많이 썼지.”
동생이 가리킨 개선문은 꽃으로 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꽃 중 루아의 손을 거친 것도 있다는 걸 시몬은 알고 있었다.
그때, 시몬의 눈치를 살살 보던 케나드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형님……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갑자기 왜?”
“표정이 안 좋으셔서 말입니다. 처음부터 좀 신경 쓰였습니다.”
“안 좋은 일, 있지.”
“무슨 일입니까? 설마 방계 놈들이 저택에서 이상한 일이라도 벌였습니까?”
케나드는 영지민에게 손을 흔드는 걸 멈추고 시몬에게 집중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케나드도 지금 본가의 분위기가 그리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당연히 방계들 때문이었다.
승계전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이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본다면 가문을 송두리째 빼앗으려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
하지만 시몬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유는 다소 뜻밖의 것이었다.
“잠이 덜 깼거든. 하, 좀 더 자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왔지 뭐냐. 이 나이 먹고 늦잠 자는 걸로 아버지와 싸울 수는 없는 거잖아?”
“그, 그러셨군요…….”
“동생아. 다음에 또 개선문을 통과할 일이 있다면, 뭐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오후 늦게쯤 와라. 형을 위해서 말이야. 알았지? 그 정도 센스는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잖아. 너도 나름 짬이 있는데.”
“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아니, 죄송할 것까진 없고. 그냥 서로의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하면서 살자는 거지.”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 개선문 근방에서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절호 후광이 드리워지는 여인.
루아였다.
‘오늘도 아름답군.’
그녀는 시몬을 바라보며 두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마치 이쪽을 한 번만 봐 달라는 듯이.
시몬은 꿍하고 짜증스러웠던 기분이 말끔히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변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평소의 모습보다 거리가 더 멀어졌다. 화장도 했고, 거기에 머리카락도 일부러 조금 하얗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우리가 정말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인연이라면…….’
시몬과 눈이 마주치자 루아는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릴 정도로 말이다.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겠지.
루아가 이쪽을 향해 뭐라고 외치는 것 같은데, 주변의 함성이 워낙 커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는 필요 없었다.
시몬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낼 뿐.
“응?”
루아는 살짝 놀랐다.
아크튜러스의 대공자가 자신을 향해 웃어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의 얼굴에서 익숙한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단지 미소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두 눈동자엔, 언젠가 느껴 본 적이 있던 그런 따뜻한 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뭘까? 이 느낌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까웠다.
마치 살랑거리는 깃털로 마음을 간질이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루아는 두 손을 다소곳이 가슴께에 모으고, 뛰는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시몬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시몬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는 이 순간까지도 루아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루아는 지금 떠오른 사람과 대공자 시몬이 뭔가 닮은 것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시몬의 바람은 충분히 통했다.
* * *
『그대가 뮬라타인가?』
드뇌브 후작의 오크어도 제법 유창했다. 온몸을 로브로 가리고 있던 뮬라타가 후드를 벗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꽤 강한 전사인 것 같군.』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아크튜러스 검식을 대성한 드뇌브 후작은, 뮬라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온몸이 흉기와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떻게 시몬은 갑옷도 걸치지 않고 이자와 두 번이나 싸울 생각을 했지?’
궁금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드뇌브는 단념했다. 어차피 물어봐야 회귀했기 때문이라는 뻔한 대답을 내놓을 테니까.
이젠 회귀의 ‘회’ 자라는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했다.
『겁도 없이 이곳까지 올 생각을 하다니…… 만약 영지민들에게 정체가 발각되었다면 폭동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아직 오크에 대한 감정이 좋지는 않으니.』
『그건 조금도 무섭지 않소. 나는 사령관과 한 약속을 믿소.』
『재미있군. 영주인 내가 아니라 사령관을 믿는다고?』
뮬라타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의지를 보였다.
『후후후. 과연, 이래서 시몬이 그대를 높게 평가했던 거로군.』
드뇌브 후작은 고개를 돌려 대연병장 쪽을 바라보았다. 개선 행군을 마친 병력들이 하나둘 대오를 갖추려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연설하기 전, 후작은 시몬의 소개로 뮬라타를 만나게 되었다.
대족장이라고 불리는 오크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승전 연설을 할 것이다.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없소. 용맹히 싸우다 죽은 전사들에게 안식을 기원할 뿐이지.』
『지극히 오크다운 발상이군. 자세한 이야기는 연설이 끝나고 나누도록 하지.』
드뇌브 후작이 연단에 올랐다.
개선 행군은 모두 끝났지만, 모든 기사와 병사들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 누구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아크튜러스!
드뇌브 후작이 오러를 실어 외쳤다. 대연병장의 끝까지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기사와 병사들은 숨 쉬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 그대들은 목숨을 바쳐 스스로가 위대한 전사임을 입증했도다. 그리고, 누구나 아크튜러스라는 이름을 쉽게 가질 수 없음을 증명해 냈다! 그 용기와 헌신에 마땅히 찬사를 보낸다!
― 와아아아아!
힘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을 충분히 즐긴 드뇌브 후작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뚝 끊겼다.
다시금 침묵이 감돌았다.
― 이번 승리가 더욱 값진 것은, 우리가 단지 압도적인 승리만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기꺼이 알데바란과 손을 잡았고,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오크들과도 협정을 맺어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대연병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었다.
드뇌브 후작은, 다소 정제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시대가 변했음을 인정한다. 우리도 그 시대에 맞게 변화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불의에 대한 투쟁심. 그리고 불굴의 정신일 것이다!
― 아크튜러스!
― 아크튜러스!
모두가 한마음으로 아크튜러스를 연호했다. 드뇌브 후작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멋진 연설이었습니다. 아버지.”
“마음에도 없는 금칠은 됐다. 흐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곧 황태자께서 오실 것이다. 어서 이야기를 매듭지어야겠구나.”
“가시죠. 자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들은 자리를 옮겼다.
저택 내부에 마련된 응접실로 들어선 드뇌브 후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자들은 누구냐?”
그곳엔, 뮬라타만큼 덩치가 큰 오크 셋이 제각각 다른 포즈로 앉은 채 후작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