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다크호스 (3)
시몬이 수도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간 시몬은 저택으로 찾아온 방계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해 이야기를 나눴다.
로버츠와 카펙처럼 응접실에 편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있었고, 대련장에서 가볍게 검을 맞대며 이야기를 나눈 자도 있었다.
때로는 만찬 자리에서, 어떨 때는 정원을 산책하면서 만나 덕담을 주고받곤 했다.
그 과정을 거치며 시몬은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로버츠와 카펙을 제외한다면 눈에 띄는 자들은 없군.’
시몬에겐 상대의 잠재력을 살펴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다. 천부적인 것이 아니라, 전생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경험이었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놈들을 두 놈으로 압축하긴 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야.’
시몬은 그들이 승계전이 열리기 직전 반드시 무슨 수를 쓸 거라고 확신했다.
객관적으로 전력 차이가 확연한데도 가만히 넋 놓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승계전도 어떻게 보면 권력 싸움과도 같은 일이다.
권력 싸움은 종종 진흙탕에 비견된다.
게다가 아크튜러스에서 승계전이 열린다는 것은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절호의 기회였다.
애초에 깨끗한 승부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역시 가장 무난한 건 중독시키는 거겠지?’
세상엔 정말 다양한 독약이 존재한다.
일례로 알데바란에서 진을 중독시킨 독약은 일정 주기로 해약을 먹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들어 가는 무척 잔인한 독약이었다.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은 물론, 사용하는 사람이 원하는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만든 독약들도 정말 다양하다.
만약 중독을 시킨다고 한다면, 놈들이 선택할 만한 독약은 무엇일까.
수많은 독약에서 시몬이 가장 눈여겨보고 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신체의 작용을 억제하는 독약이 나올 가능성이 가장 크겠지. 목숨을 잃게 만드는 약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테니.’
만약 시몬과 케나드 둘 중 하나라도 사망하게 된다면 승계전은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방계 중 그 상황을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체 작용을 억제하는 약이라면…… 근육을 마비시키는 약보다는 오러를 건드는 약이 사용될 거야.’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검식이지만, 오러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상당하다.
검식이 검술의 기본을 정한다고 한다면 오러는 검술 자체의 강함을 결정한다.
오러의 크기가 클수록, 그리고 순도가 높을수록 상대를 제압하기 수월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검식을 익히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소드 익스퍼트급 이상의 강자라면 검식의 차이가 상쇄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번 승계전은 오러 사용에 제한이 없어. 그렇다면 오러 서클에 문제가 생기는 약을 사용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건 아주 합리적인 의심이다.’
지금 시몬의 오러 서클은 다섯 개.
케나드의 서클이 세 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방계의 다른 후계들의 서클도 세 개를 넘지 않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다들 어린 편에 속했으니까.
‘만약 나와 케나드의 오러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누군가 우리를 압도할 만한 상황은 충분히 나올 수 있지.’
거기까지 생각한 시몬이 돌연 씨익 웃었다.
만약 옆에 드비안느가 있었다면, 미치신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싹한 장면이었다.
‘물론 내가 회귀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시몬은 과거로 회귀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해도, 80년 이상을 살 정도로 장수했다.
‘그 말은, 앞으로 나올 주요 독약의 해약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이 나에게 있다는 거지.’
만약 시몬이 과거로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다 진보된 약초학을 이용해 해약을 만들어 놈들의 계책을 사전에 차단한다.’
정확히 어떤 약물이 쓰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해약을 미리 복용해야 하는 고역이 따를 수 있다.
하지만 승계전에서 지는 것보단 나은 일이었다.
‘미리 좀 준비해 볼까? 곧 본대가 귀환하면 연회니 어쩌니 정신이 없을 테니.’
바로 그때, 밖에서 노크가 들렸다. 이어 제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공자님. 퀘백 경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하녀의 말에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달려간 시몬이 직접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퀘백 남작과 하녀가 깜짝 놀랐다.
가문의 장남이나 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문을 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시몬은, 방의 불을 끄기 귀찮아 기사단을 소집한 전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문을 열어 환대했다.
“오오, 퀘백 경!”
시몬은 환하게 웃으며 퀘백 남작을 맞았다.
“이거 오랜만이군! 마침 부르려고 했던 차였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 주다니 아주 반가운 일이야.”
퀘백은 이 환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진즉 뵙고 문안을 드렸어야 하는데 송구합니다. 공자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설마 내가 오크 놈들과 싸운 소식을 듣지 못한 건 아니겠지?”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님의 무용담은 이제 다른 사람 앞에서도 술술 외울 정도로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좋은 자세군. 어서 들어와.”
시몬은 퀘백 경을 안으로 들였다. 그는 작위가 낮은 남작에 불과했지만, 시몬은 그를 결코 무시하거나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드비안느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드비안느는 시몬과 라니에리의 소꿉친구.
저택에서 자주 볼 일은 없지만, 라니에리와 비슷한 포지션에 있는 친구였다.
그래서 로이드 가문과 베텔게우스 가문은 작위가 낮아도 아크튜러스에서 잘 대접받는 편에 속하는 가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저를 부르실 만한 일이라면…….”
“아, 그건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고, 왜 왔어?”
“이번 달 치 비약이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공자님께 어떤지 한번 보여 드리려고 찾아뵈었지요.”
“음, 한번 볼까?”
퀘백은 가져온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은은한 빛을 발하는 비약이 줄지어 들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상자의 모양이었다. 비약들이 서로 닿지 않게 완벽하게 차폐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빛깔과 크기 모두 시몬이 만든 것과 완전히 동일했다.
그 자체로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로이드 가문에 알려 준 것은 약초의 종류와 배합에 관한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시몬이 만족스러워한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열 개가 아니라 열두 개로군. 두 개가 늘었네?”
시몬이 로이드 가문과 체결한 계약에 의하면, 로이드 가문은 매달 10개의 비약을 아크튜러스 가문에 납품해야 한다.
그것도 시몬이 조금 욕심을 부려 수량을 많이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로이드 가문은 보란 듯이 두 개나 되는 비약을 더 만들어 온 것이다.
“공자님께서 저희 가문을 생각해 주시는 만큼 보답을 하고 싶었습니다.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추가로 더 만들 수 있도록 해 보려고 합니다.”
시몬은 무덤덤히 퀘백 남작을 응시하더니, 돌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남작의 손바닥과 손등엔 자잘한 상처가 많이 남아 있었다.
시몬은 그 상처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경도 약초 채집을 한 건가?”
“아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늙은이의 소소한 취미일 뿐입니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나? 채집이 쉽지 않은 약초도 있었을 텐데…….”
그 상처 중엔 아직 아물지 않은 것들도 더러 남아 있었다. 시몬은 서랍장으로 가 고약과 붕대를 꺼냈다.
시몬이 직접 약을 발라 주고 붕대를 감아 주려고 하니, 당연히 퀘백 남작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오, 공자님. 그 정도로 신경 쓰실 만한 상처가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금방 나을 겁니다.”
“가만히 있어.”
“…….”
시몬은 고약을 골고루 바르고, 능숙하게 붕대를 감았다. 아주 기본적인 처치술이었다. 아크튜러스 기사라면 누구나 익히고 있는.
그러나 퀘백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처치술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님.”
“퀘백 경. 예전에 드비안느가 이런 말을 하더군. 남작 가문이긴 하지만 가세가 너무 기울어 준남작과 진배없다고.”
“송구합니다. 공자님. 아이 교육을 잘못시킨 제 탓입니다.”
“아니. 오히려 잘 가르친 거지. 가문의 대공자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하고 싶은 말은 하면서 살아야지.”
“공자님…….”
“지금까지 약초학과 연금술을 위해 수많은 실험을 했다지? 그래서 가세가 기운 것이고.”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 없긴 뭐가 없어? 그 덕분에 이렇게 비약을 열두 개나 만들어 온 거잖아. 나도 믿고 경에게 일을 맡길 수 있게 된 거고.”
퀘백은 두 눈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하지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퀘백은 주먹을 꽉 쥐며 잘 참아 냈다.
“드비안느가 걱정 많이 하고 있어. 경도 그럴 만한 나이가 됐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너무 무리하지 마라. 비약이 좀 부족하다고 해서 혼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니까. 이건 충고가 아니라 명령이야.”
“…….”
퀘백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할 따름이었다.
이런 훈훈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시몬은, 곧 시치미를 떼며 헛기침했다.
“말이 좀 다른 곳으로 샜군. 그보다 경과 상의할 일이 있는데.”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로이드 가문에서 제조할 수 있는 해약엔 어떤 것들이 있지?”
“해약이라 하시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약 말이야.”
퀘백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해약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가 중독되었다는 이야기와 다름이 없으니까.
“해약의 종류는 정말 많지요. 작용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독에 대한 저항력을 올리는 것과 독 자체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지요.”
지이잉!
그때 오러가 쏟아져 나왔다. 시몬이 주변에 오러를 둘러 차폐막을 만들었다.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끔.
“오러의 효과를 떨어트리거나, 오러 서클을 파괴할 수 있는 독약은?”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러 브레이커라는 녀석입니다. 약의 농도에 따라 오러를 저하시킬 수도 있고, 서클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해약을 만들 수 있나?”
“만들 수는 있습니다.”
시몬은 고개를 갸웃했다.
“만들 수는, 이라는 건 대응하지 못하는 독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정석대로 독을 쓰는 경우는 드문 일이지요. 변종에 대항하려면 그에 맞춰 해약도 성분을 바꿔야 합니다.”
퀘백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승계전을 앞둔 시기에 오러 브레이커 이야기가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즉, 시몬이 누군가가 독약을 쓸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아주 은밀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제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입을 다물 것을 약속드립니다.”
“로이드 가문에서 만들 수 있는 모든 해약을 만들어 와라. 두 명분이면 된다.”
퀘백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명을 따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