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다크호스 (2)
뜻밖의 질문이 던져지자 두 사람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아직 서로의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다. 앞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로버츠는 시몬과 거의 10년 만에 만난 사이였으니까.
게다가 카펙은 아예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다. 서로 이름만 들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몬은 너무나도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생각보다 그렇게 당황하진 않는군.’
이보다 많이 당황했다면, 눈앞의 두 청년은 정말 순수한 의미로 가문을 승계하기 위해 온 것이리라.
그러나 덜 당황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전에 말을 맞췄다는 증거였다.
인생 2회 차였던 시몬은 그 차이를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왜들 대답이 없지?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거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뭐 어려워해? 답은 뻔하잖아. 힐스트롱 가문의 검식과 미들즈웨이 가문의 검식이 아크튜러스 검식보다 더 낫다면 나를 이길 수 있는 거고, 아니면 이길 수 없는 거고.”
침묵이 깔렸다.
시몬을 눈앞에 둔 두 공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직계와 방계의 클래스 차이임을.
방계의 검식은 직계의 검식에서 파생되어 새롭게 창안된 것이다.
즉, 속된 말로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완성되지 않은 채 습관에 맞춰 변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버츠는 야망이 있는 청년이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검식의 우월함만이 승패를 좌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지.”
시몬은 압박을 다소 풀고 느슨하게 대했다. 한숨 돌린 로버츠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도 저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밤낮없이 수련에 임했고, 실전 경험도 쌓았지요.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심정 알지. 그런데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어? 특히 우리 케나드가 얼마나 노력파인지는 너희들도 잘 알 텐데.”
“그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직접 보면 들은 것보다 더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시몬은 싱글벙글 웃으며 굳이 이번 전쟁에서 있었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전쟁이 모두 끝나고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었는데. 너희도 그런 경험 있지? 커다란 막사에서 기사들끼리 모여 가지고 고기 뜯으면서 술 땡기는 거.”
“알고말고요. 그때 마시는 술은 정말 달콤하지요. 취하지도 않고요.”
“오, 잘 아네. 게다가 이번 전쟁은 알데바란 쪽에서도 도움을 줬잖아. 어쩌다 보니 앙숙이었던 두 가문이 한 막사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였다고. 그런데도 싸우는 사람 없이 모두 즐거웠단 말이지.”
로버츠와 카펙은 시몬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감을 잡지 못했다.
뻔한 무용담이 나올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몬이 양자 간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런데 케나드 그 녀석이 말이야. 그렇게 다들 어울려 노는 그 늦은 시간에 혼자 나가서 검을 휘둘렀단 말이지?”
“연회에 참가하지 않고 훈련을 했다고요?”
“그렇다니까? 손에 남은 감각이 잊혀질까 두려워서 그랬다고 하더라고. 내 동생이지만 정말 독한 구석이 있지. 어때? 이 정도는 해야 노력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거 아닐까?”
“……정말 대단하군요.”
“존경할 만한 일입니다.”
두 공자가 솔직하게 감상을 표했다. 시몬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케나드를 상대하기조차 버겁지 않을까 싶은데.”
“포기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야. 우리 가문에서 승계전이 열린 건 정말 오랜만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포기하란 말을 하겠어? 기회를 손에 쥐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일인데.”
그 말에 두 공자는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시몬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검의 경지에 오른 본인을 이길 수 있냐는 질문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회를 논하고 있었다.
“의미는 있는 일이지만, 기회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점을 명심하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괜히 머리 굴리다가 너희들 선에서 끝나지 않는 일을 만들지 말라는 거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공정하게 승부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다짐하듯 말했다. 시몬은 조금도 믿지 않았지만 흔쾌히 긍정해 주었다.
“그래. 그래야 후계자다운 일이지. 얼마나 잘 싸우는지 한번 보자고.”
“그보다 공자님.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만.”
“뭔데?”
이번엔 로버츠가 아니라 카펙이 물어 왔다.
“처음 승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공자님께서 병환이 심해 후사를 잇기 어려워졌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아, 그렇게 오해들 많이 했지. 실제로 죽다 살아났으니까.”
오해를 한 것은 방계들만이 아니었다.
처음 알데바란으로 갈 때 도적들도 길을 막았었다. 곳곳의 주점에서도 시몬이 후유증이 심하게 남았다는 낭설이 돌기도 했다.
황녀와 사이가 어긋난 것도 열병의 후유증 때문이라는 소문은 여전히 유효했다.
거기가 잘 안 서게 됐다는 소문은 조금 짜증 났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 오크와의 전쟁에서 역사에 남을 공적을 세우셨습니다. 그런 우려를 완전히 불식시킨 것이죠. 승계전을 계속해야 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시몬은 솔직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솔직히 말해 편법으로 후계자를 바꾸는 경우도 있으니까. 내가 이었다가 바로 케나드에게 물려주면 아무도 이의를 표하지 못하겠지.”
“그런데 왜 승계전이 열린 것입니까?”
“그게 바로 아크튜러스의 방식이니까.”
시몬의 말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두 공자를 움츠러들게 할 만큼.
“비겁하다고 손가락질당할 바에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당당하게 하려는 거야.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공자님의 병환이 모두 나았는데도 말입니까?”
“오히려 나는 케나드에게 기회를 주고 싶을 정도인데? 녀석의 재능은 날 앞섰거든.”
“그 정도입니까.”
두 공자도 케나드가 최근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몬이 돈을 써 가며 열심히 소문을 퍼트린 결과였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솔직히 말해 볼까? 나는 심검의 경지에 들어섰지만, 전력을 다했을 때 케나드를 이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
“확 와닿지 않지?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을 거야. 아크튜러스 검식의 심검의 경지도 까마득한 곳에 있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재능이라고 하니 말이야.”
“상상이 되지 않는군요.”
“너희들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천재 소리는 많이 들었겠지.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 거고. 하지만 이번 승계전 이후로 천재라는 단어의 정의가 좀 바뀔 거다. 천재는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수식어라고 말이야.”
“…….”
시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꼰대처럼 잔소리만 늘어놓은 느낌이네. 그럼 편히들 쉬라고. 아 참, 혹시 황실에서 연락 따로 받은 사람?”
순순히 손을 들어 보라며 제스처를 취하는 시몬. 하지만 두 공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 나중에 들키면 혼난다?”
“황실에서 굳이 저희에게 연락을 할 이유가…….”
“혹시 모르잖아? 곧 받게 될지도.”
묘한 여운을 남긴 시몬이 응접실을 떠났다. 그가 나가자마자 두 공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망할!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한 것은 로버츠였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혹시 황녀와 짜고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거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두 사람은 갈라섰어. 그러지 않고서 황녀가 그런 노골적인 제안을 할 리가 없지.”
“으음.”
로버츠와 카펙은 황녀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승계전에서 이기는 자에게 혼인할 기회를 주겠다고.
그 증거로 황가의 인장이 들어간 장신구까지 보내기도 했다. 즉, 허언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시몬과 황녀의 사이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일.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약혼을 지지하고 있었다.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좋겠군.”
로버츠의 제안에 카펙이 응했다.
두 사람은 머무는 방으로 돌아왔다. 로버츠는 주변을 신중히 살피며 말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데? 우리의 약조를 말이지.”
“대체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후계에 큰 욕심이 없다. 그저 내 한계를 확인해 보고 싶은 거다.”
“견물생심이라는 말도 모르나? 막상 네가 승계전에서 우승하게 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르지.”
로버츠는 끝까지 카펙을 의심했다. 그럴 때마다 카펙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대응했다.
“혈서라도 남겨야 하나?”
“그건 곤란하지. 우리는 증거가 남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잖아?”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냥 확인해 보고 싶은 거다.”
“계획이나 말해.”
비협조적인 카펙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이 삼킬 수밖에 없었다.
로버츠는 서랍을 열고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겉으로는 허술해 보였는데, 매우 정교한 장치로 잠겨 있는 상자였다.
카펙이 물었다.
“이건 뭐지?”
“우리의 목적을 달성시킬 아주 멋진 놈이라고 할까.”
로버츠는 옆에 놓인 단검을 집고 손을 슬쩍 그었다. 피가 줄줄 흘렀고, 로버츠는 자신의 피를 상자 뚜껑에 흘려 넣었다.
그러자 딸깍, 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굳건히 잠겨 있던 상자가 입을 벌렸고, 안에 들어 있는 두 개의 검은 단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약은 투명한 막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중독은 너무 뻔한 계획 아닌가?”
“뻔한 이유는 그 방법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건 보통 약이 아니다. 이 약을 구하려고 우리 가문의 전 재산을 털었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오러 브레이커’라는 이름의 약이다. 들어 본 적이 있겠지?”
오러 브레이커.
말 그대로 오러의 성능을 저하시키는 독약 중 하나다. 강한 약재를 쓰면 오러 서클을 아예 망가뜨리기도 하는 극약이 된다.
당연히 검의 길을 걷는 입장에서는 가장 피해야 하는 독극물 중 하나.
카펙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뻔한 독약으로 아크튜러스의 후계자들을 상대하겠다고? 이미 그들은 이런 것까지 대비를 다 해 두었을 텐데?”
“하하하. 어수룩하긴. 이건 보통의 약이 아니다. 세상에 알려진 오러 브레이커는 복용시켰을 때 효과가 있지. 하지만 이건 굳이 복용하지 않아도 되거든.”
“예를 들면?”
“손에 닿기만 해도 오러의 발출이 막힌다. 연기를 흡입해도 확실한 효과를 내지. 당연히 성능도 몇 배는 강하고 말이야.”
“과연.”
기존의 독약이 아닌, 그보다 더 악독한 약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의심되면 실험해 볼 테냐?”
“아니, 거절하지.”
“하하하. 보기보단 소심하군.”
그 한마디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차피 신뢰는 필요 없다.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었으니까.
‘네놈에게 영토를 떼어 줄 것 같으냐? 어림없는 소리! 이 거대한 영지는 모조리 내 손에 들어올 것이다! 하하하하!’
로버츠는 카펙과 손을 잡는 대가로 미들즈웨이 가문에 영지의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물론 나중에 말을 바꿀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카펙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로버츠의 뒤통수를 칠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
“그래서. 어떻게 중독시킬 생각이지?”
“그거 좋은 질문이군.”
로버츠는 마치 마계의 악마처럼 음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