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다크호스 (1)
“네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제국 남부의 평화를 가져온 일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시몬은 너무나도 당당했다.
첫 전투 때 이천여 명 이상의 병력 피해가 발생하긴 했지만, 대규모 전투는 딱 그때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시몬이 혼자 다 했다.
제국 남부가 다소 어지러워질 수 있는 상황에서 병력을 보전했다는 것은 매우 큰 공이다.
그래서일까.
드뇌브 후작의 말투는 아까와는 달리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오크에게 황무지를 내어 주고 그곳을 개간시키려는 것은 훌륭한 발상이긴 하다. 하지만 그들을 품고 있어야 하는 영지의 불안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냐?”
“대족장 뮬라타는 자존심이 강하며 지혜롭고 의리가 있는 친구입니다. 계약을 체결했으니 믿어도 됩니다.”
“만약 놈들이 협정을 무시하고 마을을 침공한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겠죠.”
시몬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이번 일을 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오히려 믿을 수 없는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그건 또 무슨 궤변이냐?”
“지금도 대륙의 수많은 영지민들이 도적 떼에 약탈당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무서워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오히려 황무지를 개척하려는 오크들이 훨씬 안전할 것입니다. 그들에겐 분명한 목적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으음.”
“게다가 먼 옛날에는 인간과 오크가 서로 교류하며 지냈던 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이번 협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평화와 화합.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시몬의 연설은 훌륭했다.
그 증거로 서기관 칼림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게다가 드뇌브 후작은 별다른 반문을 하지 못했다.
“협정서에 케나드의 서명을 넣은 이유는 뭐냐?”
“케나드를 정당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소소한 장치입니다.”
너무나도 뻔뻔해 이제는 헛웃음이 나온다.
“오크어는 어디에서 익혔지?”
“그건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아…….”
드뇌브 후작은 탄식했다.
과거로 회귀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너무나도 뻔뻔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드뇌브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궁금증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심검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도, 오크어에 능숙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크를 우리 영지로 포섭한 건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듣자 하니 군사적인 목적으로 쓴다고 하던데.”
선뜻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용병처럼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시몬은 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들 중 우수한 전사를 초빙해서 군사 훈련에 투입할 계획입니다.”
“군사 훈련?”
“기사와 병사들에게 오크의 전투술을 가르치는 거지요.”
“허어…….”
드뇌브 후작은 탄성을 흘렸다. 서기관 칼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 기사와 병사들은 황도의 잘나가는 공자들처럼 너무 점잖습니다. 가끔은 야만적인 전투술도 익힐 필요가 있죠.”
“확실히, 그들이 협력한다면 좋은 대련 상대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이드 가문에서 문제없이 비약을 생산한다면 우리 기사단은 정말 단기간에 더욱 강해질 수 있겠지요.”
드뇌브 후작의 눈에 오랜만에 이채가 돌았다.
오러를 늘려 주는 특별한 비약과 오크의 전투술이 만나면 과연 어떤 시너지를 낼까.
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궁금해지는 일이었다.
“실로 멋진 일이 아닙니까? 우리 아크튜러스는 더욱 강력해질 것입니다. 각하.”
현명한 칼림이 딱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후작은 굳이 그 평가를 부정하지 않았다.
“동생에게 덤터기를 씌우려고 한 짓치고는 꽤 정교하구나.”
“아버지. 아크튜러스의 후계자 자리를 덤터기라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옆에 칼림 경도 있는데 말이죠.”
“네가 이런 일을 하면 오히려 네 뜻을 이루기 힘들게 된다는 생각은 안 해 보았느냐?”
시몬은 미래 지식을 이용해 압도적인 공적을 세우고 있었다.
이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사람들은 시몬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은퇴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저는 아버지께서 약속을 지켜 주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승계전이 열리게 되었는데, 제가 패배한다면 말없이 물러나야지요.”
“정말로 케나드가 널 이길 수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드뇌브 후작은 칼림을 바라보았다. 가능한 방법이 있냐고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도 고개를 갸웃할 뿐, 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서 그날이 오기를 기다려야겠군. 과연 어떤 꿍꿍이일지 기대되는구나.”
“이제 포상을 내려 주실 차례입니다.”
“필요한 거라도 있느냐?”
“원하는 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아크튜러스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불허한다.”
드뇌브 후작은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시몬의 것과 무척 닮았다.
“어째서입니까?”
“그건 포상이 아니라 처벌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포상을 청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
“그렇습니까.”
의외로 시몬은 선뜻 물러섰다. 오히려 그래서 드뇌브 후작은 아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럼 케나드를 이번 전쟁의 일등 공신으로 삼아 주십시오. 어쨌든 큰 틀에서 전쟁을 끝낸 건 녀석의 이름이 들어간 협정서 때문이니 말입니다.”
“그 또한 포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럼 용돈 좀 주십시오.”
“넉넉히 챙겨 주지.”
그제야 시몬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절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방계라고 너무 방심하면 곤란하다. 바싹 독이 오른 녀석들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정중히 예를 취한 시몬이 방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드는 그곳에서 드비안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녀 제니와 함께.
“많이 혼나셨어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는데 혼나면 그것도 좀 이상한 거 아닌가?”
“다행이네요. 오크를 영지로 끌어들인다는 말에 다들 걱정했거든요.”
“걱정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아. 뭐라도 해 봐야지.”
“세상 사람들이 전부 공자님처럼 간이 크진 않아서요.”
“하긴, 그 말도 맞다.”
시몬은 허리춤에 걸린 검을 푸르고 겉옷을 벗었다.
얼마 전 1억 실링의 행운을 얻은 하녀, 제니가 옷을 받았다. 시몬은 제니를 힐끗 바라보곤 무심하듯 시크하게 물었다.
“부모님은 좀 괜찮아지셨나?”
“아, 예! 공자님 덕분에 다 나으셨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다행이군.”
“공자님께서 베푸신 은혜, 평생 가문에 헌신하며 갚겠습니다!”
귀에 좋게 들릴 만도 했으나, 시몬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하녀 생활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적당히 하고 퇴직해. 나 같으면 1억 실링 중 남은 돈으로 장사나 하겠는데.”
“…….”
제니가 대답이 없자 시몬이 소매의 단추를 풀며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는 표정이네.”
“……죄, 죄송해요. 원래 부모님이 작은 가게를 하셨거든요……. 그래서 남은 돈으로 가게를 좀 넓혔어요.”
“무슨 가게 하시는데?”
“잡화점이요.”
“요즘 녀석들은 참 솔직하단 말이지.”
“공자님도 요즘 녀석이에요. 제니랑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다고요.”
“내가 얘랑 같냐?”
시몬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는지 바지를 훌러덩 벗어 드비안느에게 던졌다.
“그런데 어머님은?”
“요즘 밖으로 잘 안 나오세요. 방계 놈들 꼴도 보기 싫다고 하시네요.”
“덕분에 너만 노났겠네?”
“그러게요. 기왕 쉬게 해 주시는 거라면 보너스도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너희 가문 곧 남부에서 알아주는 부자 될 텐데 무슨 보너스 타령이야?”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라구요.”
배시시 웃은 드비안느가 바지를 한옆에 걸었다. 그리고 시몬이 즐겨 입는 편한 옷을 가져왔다. 제니가 도우려 했지만, 드비안느가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제니가 나가고, 드비안느는 훤히 드러난 시몬의 피부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음, 어디 보자……. 복근 멀쩡하고 허벅지 튼실하고. 그래도 다친 곳 없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오크들, 정말 거칠다고 들었는데요.”
“야.”
“왜요?”
“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하늘 같은 공자님 몸을 그렇게 빤히 살펴봐도 되는 거냐?”
“혹시라도 등 쪽에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뒤통수에 눈 달리셨어요?”
“그 정도도 모르면 그냥 나가 죽어야지.”
“아랫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랍니다.”
“저리 가. 징그러워.”
시몬은 옷을 가로채 몸을 가렸다. 넉넉한 옷을 입으니 이제야 좀 편한 느낌이 들며 긴장이 풀렸다.
“그런데 새로운 약은 드셨어요? 떠나기 전에 효과가 더 좋은 약 만들어 드신다고 했었잖아요.”
“먹었지. 그러니까 오크들이 다 나가떨어진 거야.”
“재료는요?”
“가르쳐 줄 거 같냐?”
“우리 동업자 아니었어요?”
“어차피 많이 만들지 못하는데 알려 줘서 뭐 해.”
“그냥 순수하게 학술적으로 궁금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지 말고 재료 딱 하나만 알려 주세요. 네?”
“드래곤의 심장.”
“……그런 게 있어요?”
어느새 침대에 편히 누운 시몬은 이불과 베개의 안락함을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내가 없는 거 만들어 내는 사람은 아니잖아?”
“드래곤은 동화책에서만 나오는 거 아니었어요?”
“아 정말 끈질기네.”
“알려 주시면 불 끄고 얌전히 나갈게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솔깃한 조건이 던져졌다.
“레서 드레이크의 코어. 그걸 흔히들 드래곤의 심장이라고도 불러.”
“아아! 레서 드레이크라면 들어 본 적 있어요. 정말 귀한 영물이라고 하던데요.”
“언능 불 끄고 나가 인마.”
드비안느는 벽에 걸린 랜턴을 모두 소등한 다음, 커튼을 닫았다. 아직 밖이 환했으나 그래도 눈을 붙일 만한 조도가 갖춰졌다.
“방계 공자들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 가 보실 거예요?”
“기다리는 김에 좀 더 기다리라고 해.”
“괜히 미움받지 말고 적당히 자고 나오세요.”
듣는 둥 마는 둥, 시몬은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시몬이 응접실에 나타났다. 나태하고 게으른 표정으로 완전 무장한 채.
그가 등장하자 시간을 죽이고 있던 두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먼저 인사를 나눈 로버츠와 카펙이었다.
“오래 기다렸나? 미안하군.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말이지.”
“괜찮습니다. 먼 길을 그리 바쁘게 오셨는데 피곤하신 건 당연하지요. 다음에 자리를 만들어도 괜찮습니다. 좀 더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여기까지 왔으니 이야기나 좀 나누자고. 앉지.”
두 사람은 시몬이 착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몬이 손짓한 이후에 앉았다. 건방져 보여도 예법은 제대로 갖췄다.
“너희 두 사람이 이번 승계전에서 검 좀 쓴다는 후계들인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솔직히 다른 가문에서는 누가 왔는지도 잘 모릅니다. 기억나는 놈들도 없고 말이죠.”
로버츠가 이를 드러내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에 비해 카펙은 차분했다.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한다.’
잠시 고민한 시몬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뭐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내가 심검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너희들도 들어서 알고 있을 거다. 승계전에서 날 이길 자신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