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귀환 (3)
시몬이 저택으로 귀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시몬 공자님!”
“뭐? 누구?”
“시몬 공자님께서 오셨어!”
사용인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개선문을 통해 들어와야 할 전쟁의 영웅이 허름한 로브 하나만 걸치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러 집사와 하녀들로 가득한 그곳에 시녀이자 오랜 친구인 드비안느도 얼굴을 비추었다.
“공자님. 요즘 기별도 없이 일찍 오는 거에 취미 들이셨나 봐요?”
“뭘 그렇게 배배 꼬아서 말해? 오랜만에 보니 반갑지 않나?”
“그럼요. 아주 반갑죠.”
굳이 비약 제조에 관한 것은 묻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일이 잘 풀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자님께서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셨다고 해서 모두가 기뻐하고 있어요. 길거리에는 온통 두 공자님을 칭송하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죠.”
“못마땅한 표정이네.”
“요즘 소음 공해가 심해서 말이죠.”
“하하하.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크튜러스의 장남인데 그 정도는 하고 와야지?”
시몬은 적당히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드비안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것이 허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본대는요?”
“먼저 와서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만 좀 일찍 왔다. 본대는 예정대로 귀환할 거야.”
“각하께서 마침 안에 계셔서 다행이네요.”
그때 어렴풋이 낯익은 청년 두 명이 나란히 등장해 시몬의 시선을 끌었다.
‘어디서 봤더라?’
꽤 화려한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나이와 체구도 비슷했으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유감없이 풍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아크튜러스의 일원인 줄 오해할 터.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아크튜러스의 직계는 아니었다. 바로 방계 출신의 공자들이었다.
방계는 아크튜러스라는 성씨를 사용하지 못한다.
아크튜러스의 가주에게 하사받은 성씨를 사용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다른 가문이라 할 수 있었다.
검식도 마찬가지다.
아크튜러스의 검식 중 살검까지는 방계의 가주들에게 전수가 되나, 심검의 단계는 오로지 직계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된다.
그래서 이들은 아크튜러스 검식을 기본으로 하되, 독자적인 검술로 발전시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시몬의 눈앞에 나타난 두 공자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귀걸이를 한 귀공자 타입의 청년이 씨익 웃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몬 공자님.”
“누구시더라?”
“이야, 이거 서운하네요. 기억해 주실 줄 알았는데. 저 로버츠입니다.”
“로버츠?”
그제야 시몬은 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 라니에리가 방계 중 주목할 만한 가문 두 곳을 골라 준 적이 있었다. 그중 힐스트롱 가문이 있었는데, 그곳의 장남이었다.
“이거 정말 오랜만이군! 마지막으로 봤던 때가 언제였지?”
“아마 10년은 더 되었을 겁니다.”
“멋지게 성장했군.”
“그건 오히려 제가 해야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젠 제국의 영웅이 되시지 않았습니까? 오크와의 결전은 저도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전생의 혈기 왕성했던 시절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마냥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생 2회 차였다.
로버츠가 단순히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시몬도 잘 안다. 조금은 비릿한 말투엔 질투와 경멸이 서려 있었다.
‘여전히 분수를 모르는 놈이로군.’
전생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황태자와 황녀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요주의 인물이 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옆에 있는 친구는 카펙인가? 미들즈웨이에서 왔겠지?”
시몬은 옆에 있는 다른 청년을 주목했다.
무표정한 사람이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
그 차가운 이면에서 셀 수 없을 만큼의 권모술수가 느껴졌다.
그랬기 때문에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겠지.
“맞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쪽에선 장남이 안 왔나?”
“가문은 제가 잇게 되었습니다. 굳이 형님께서 오실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
“아아, 미들즈웨이는 그렇게 정리가 된 모양이군.”
힘이 있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시몬은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미들즈웨이의 차남도 일전에 라니에리가 지목했던 가문이었다.
두 사람이 굳이 저택 앞까지 나온 이유를 시몬은 짐작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겠지. 이 기세를 몰아 가문을 송두리째 손에 넣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믿는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뭔지 궁금한데?’
메르세데스 황녀의 취향을 생각한다면 로버츠 쪽이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잠재 능력까지를 고려한다면 카펙도 만만치 않다.
‘뭐, 이 둘 말고 다른 방계를 선택할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지.’
황태자는 오래전부터 제국 남부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면 비밀리에 키운 가문 한두 곳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즉, 눈앞에 선 두 청년 말고도 다크호스가 얼마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
“정말 시몬 공자님이 오셨어!”
“다들 어서 오라고!”
이제는 기사들까지 모여들고 있었다. 시몬은 놈들의 뜻대로 일이 풀리게 둘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지.”
“그러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시몬은 바로 드뇌브 후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드뇌브 후작은 시몬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서기관 칼림이 함께 있었다.
당당히 걸어 나간 시몬이 군례를 올렸다.
“소자, 임무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고생했구나.”
쓴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의 칭찬이 들려왔다. 시몬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가서 농땡이나 피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름 밥값은 한 모양이더군.”
“가문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너의 전공을 논하기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지. 심검은 누구에게 전수받았느냐?”
드뇌브 후작에게 있어, 그 사실은 전쟁의 결과보다도 더욱 궁금한 것이었다.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잘난 꿈 말이냐?”
“그렇습니다.”
시몬은 굳이 전생에서 심검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물론, 아크튜러스 검식을 리뉴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드뇌브 후작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심검의 경지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터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꿈에서 전수받았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지.”
“제 꿈이 한 사람의 인생처럼 길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건 아버지십니다. 못 믿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저에겐 입증해야 할 책임이 없습니다.”
“정말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예.”
드뇌브 후작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심검은…… 오로지 직계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되는 궁극의 경지다. 그러나 너는 가문을 잇지 않은 채로 그 경지에 이르렀지. 게다가 너는 케나드에게 가문을 잇게 하려고 별짓을 다 하고 다니고 있고 말이다.”
오크와의 협정서에 케나드의 이름을 넣은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당연히 그것은 시몬이 예상하던 발언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뛰어난 게 잘못되었다는 말씀이지요?”
“뭐라?”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놈……!”
의자의 팔걸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서기관 칼림이 헛기침을 하며 후작을 진정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시몬도 아니었다.
“검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겁니다. 그 경지에 닿을 방법이 있는데, 단순히 가문을 잇지 않는다고 손에 넣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으음.”
“가문의 법은 때때로 변합니다. 하지만 검술의 궁극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지요. 아버지께서도 가주이기 이전에 무인입니다. 그 입장에서 한번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예외를 허락하란 말이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시몬이 당당히 말하자 드뇌브 후작은 마음 한쪽에서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이해할 수 없었다.
격검과 살검도 그 강함에 굉장한 차이가 있지만, 살검과 심검엔 표현하기 어려운 거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시몬은 또다시 상식을 깰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케나드는 이제 살검의 경지에 들어섰다. 물론, 이번 전쟁에서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느 모로 보나 심검의 경지에 도달한 너를 이길 수 없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압니다. 아버지.”
“…….”
“하하하! 정말 축하드립니다. 시몬 공자님. 과연, 남부의 영웅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업적입니다.”
칼림이 칭찬했다.
드뇌브 후작이 지나치게 흥분했던 탓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귀로 들어온 정보 하나를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얼핏 들은 이야기인데, 검선의 길을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뭐라? 검선?”
드뇌브 후작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다그치지 않은 이유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잘 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몬은 자신이 전수해 주지 않았는데도 심검의 경지에 도달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천재와 다를 게 없다.
검선의 길을 걷는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굳이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시골로 내려가 편하게 살려는 것이 속세를 떠나려는 것처럼 보인다면 할 말은 없거든요.”
“과연, 그렇군요.”
“하지만 아직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 말은 당분간은 흘려들으셔도 좋을 것 같군요. 서기관.”
“참고하지요.”
시몬의 시선이 다시 드뇌브 후작을 향했다.
“그보다 아버지. 태자 전하와 황녀께서 승계전을 참관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정확히는 황실에서 우리 가문을 포상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큰 피해 없이 전쟁을 잘 마무리 지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드뇌브 후작도 승계전 참관이 주목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넌 어떻게 보느냐?”
“좋은 한 수였다고 생각합니다. 태자 전하와 황녀님의 입장에서는 새롭고 신선한 꼭두각시를 고를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되겠죠.”
“시몬…… 일이 이렇게 됐으니 네가 가문을 잇지 않겠다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다. 그러나 방계 쪽에 승계권을 뺏기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승계전을 위해 저택으로 입성한 방계 자제들의 수는 열 명이 넘는다.
그들이 어떤 흉계를 꾸밀지 알 수 없는 상황.
독살까지는 아니더라도, 승계전을 앞두고 컨디션을 떨어트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경계를 강화할 테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는 것이 정상이다.
이렇게 거대 가문의 운명이 걸린 일에서는 더더욱.
“그래. 그 이야기는 이쯤하고, 오크들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구나.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그런 협정을 체결한 것이냐?”
“오해가 좀 있으신데요. 협정을 체결한 건 제가 아닙니다.”
“또 누굴 탓할 생각이지?”
“대륙 역사에 길이 남을 이번 협정을 이끌어 낸 주인공은 자랑스러운 제 동생, 케나드입니다. 마땅히 세상에 널리 알려 공을 치하하셔야 할 것입니다.”
“…….”
드뇌브 후작은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