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귀환 (2)
오러의 도움을 받은 시몬은 굉장히 빠르게 아크튜러스의 수도에 도착했다.
일주일 만에 알데바란의 접경을 넘어 아크튜러스의 심장에 도착한 것은, 나태한 시몬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루아라는 여인의 존재가 컸다.
그래도 매번 야영하며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혹시 루아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 수도를 앞두곤 큰 마을에 들러 목욕재계를 마쳤다. 그리고 충분히 휴식도 취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을 만났다.
오크족과의 전쟁이 끝나고, 승전 소식이 퍼지자 아크튜러스 영지에 있는 모든 주점의 매출이 늘었다.
주민들과 모험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번 전쟁의 결과에 대해 토론했고, 기뻐했으며, 새로 탄생한 영웅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과정에 시몬은 일대일 결투의 후폭풍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도 예상했던 일이긴 하니까.’
열두 명의 오크 대전사를 물리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시몬은, 예전에 로빈을 만나러 갈 때 그랬던 것처럼 사비를 털어서까지 작업을 시도했다.
이번 전쟁을 매듭지을 수 있었던 것은, 시몬 공자님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케나드 공자님의 혜안 덕분이라고.
아크튜러스와 오크족 사이에 체결된 협정에 그 이름이 들어갔다는 것을 계속 어필했다.
쉽진 않았지만, 주점에 있는 사람들이 만취할 때까지 돈을 펑펑 써 주니 효과는 괜찮았다.
‘논공행상 때 케나드가 더 좋은 걸 받으면 금상첨화긴 한데,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으니…….’
최근 시몬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로 돌아섰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비약을 만들어 둘째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으니 당연한 결과긴 하겠지만.’
처음에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몬이 비약을 만들고 나서 모두가 행복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첫째 부인인 헤라를 제외하고 말이다.
게다가 황태자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가문 승계전에 직접 참관하겠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경계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황실에서 참관하겠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승계 과정에 간접적으로나마 관여를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이 상황에서 신들린 예지력을 보여 주는 시몬의 능력은 드뇌브 후작의 입장에서도 꼭 필요한 게 아닐 수 없다.
“저, 공자님?”
수도의 출입을 관장하는 기사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시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제야 시몬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뭐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들어가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말씀이 없으셔서요.”
“너희들도 알다시피 상황이 좀 복잡하게 됐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정리해야 할 일들이 많지. 내가 도착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예! 아! 공자님.”
“왜?”
“뵙게 된다면 꼭 여쭤보고 싶었던 게 하나 있는데, 괜찮으실까요?”
조심스러운 한마디에 기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시몬은 듣지 않아도 그 질문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오크 대전사들을 혼자 다 쓸어버린 게 사실이냐고 묻고 싶은 거지?”
“아, 예!”
“뭔가 착각하고 있군.”
시몬의 한마디에 기사들이 긴장했다. 식은땀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떠들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 우리는 위대한 아크튜러스의 기사다. 상대가 오크든 무엇이든 쓰러트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가진 전사들이지. 언제까지 지나간 과거에 흠뻑 취해 있을 생각인가? 당사자인 나는 다 잊었는데 말이야.”
“공자님…….”
기사들은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시몬이 피식 웃었다.
“나라면 궁금해할 시간에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를 것 같은데. 그게 더 도움이 되는 일 아닌가? 세상엔 오크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들이 많다. 가문과 영지민의 안녕이 우리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늘 명심하도록.”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아크튜러스에 영광을!”
기사들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기사들이 전쟁에 나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기회를 얻지 못해서 실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몬의 말을 들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몬은 다시 변장을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새로 얻은 집이 구시가지 쪽이라고 했었지? 펠릭스 잡화 상점 옆의 파란색 2층집이라면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군.’
일전에 상단에서 보고받은 걸 잊지 않고 있었다. 원래 소소한 걸 기억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아의 일이었으니까.
아크튜러스 상단은 일 처리를 제대로 해냈다.
그들이 애초에 유능한 것도 있지만, 시몬과 라니에리의 입김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루아와 가족들의 편의를 위해 2층짜리 건물을 준비했다. 1층에서는 빵을 만들어 팔고, 2층은 생활 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곧 가게도 오픈하니 뭐라도 하나 사 가고 싶은데…… 좀 지나친가?’
다른 건 몰라도 루아와 관련된 일엔 아직도 서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에도 집을 구해 주는 과정에서 실수할 뻔했다. 라니에리가 없었더라면 부담을 줄 뻔했다.
‘전생에서는 이렇게 길게 인연을 이어 가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상대가 메르세데스 황녀였다면 알아서 척척 준비해 대충 던져 줄 수 있다. 황녀의 취향과 허영심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루아는, 시몬에게 있어 너무나도 특별한 여인이었다.
‘일단 가 보자고.’
시몬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말을 달렸다.
목표는 구시가지.
수도의 구시가지는 말 그대로 과거에 시가지였던 곳으로, 지금은 상대적으로 쇠락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구는 신시가지 못지않게 굉장히 많았다.
서민들을 비롯한 하급 관리의 저택이 많이 모여 있기 때문에 빵집을 열기 적당하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구시가지에 도착한 시몬은 말을 한쪽에 걸어 두고 걷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만, 펠릭스 씨의 잡화점이 어디입니까?”
“저쪽에 빨간 지붕 보이쇼? 거기요.”
“오, 고맙습니다.”
시몬은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어 펠릭스 잡화상점에 도착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그쪽에 2층짜리 푸른색 지붕 건물이 보였다.
‘여기로군.’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1층이 한창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건물 벽 쪽에 빵 모양이 들어간 간판이 걸려 있어 알 수 있었다. 그 모양은 마이너 마을에서 본 것과 완전히 같았다.
2층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문이 닫혀 있었고, 안에 사람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고생이 많군.”
“응? 누구요?”
나무를 자르던 목수가 시몬을 응대했다. 시몬은 아크튜러스 상단의 표식을 들어 보였다.
“상단에서 나왔다.”
“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으리.”
“작업은 잘되고 있는지 궁금한데.”
“문제없습니다! 이대로라면 한 달 내로 모든 공사가 끝날 겁니다.”
“한 달? 너무 길지 않나?”
“어엇…….”
목수가 당황했다. 주변에 있던 기술자들의 손이 모두 멈출 정도로 파급력이 있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시몬이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아. 혼잣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거기 너희들도 계속 작업하도록. 음, 그런데 마이너 마을에서 온 분들은 안에 계시나?”
“아뇨. 그분들은 아까 나가셨습니다. 광장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왜?”
“개선문에 꽃장식을 돕는다고 하더군요. 그 집 아가씨께서 시몬 공자님의 영웅담에 큰 감동을 받으신 모양이었습니다.”
“그래?”
시몬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은 공개할 수 없는 정체였다. 시몬이라는 사람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는다면, 나중에 정체를 밝혔을 때 거부감이 줄어들 것이다.
“그보다 그 아가씨 보셨습니까? 참 예쁘더군요. 하하하. 다들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마침 시집도 안 갔다고 해서 말이죠.”
“너, 이름이 뭐지?”
“예? 아. 찰스입니다.”
“가여운 찰스. 내가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오래 살고 싶으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예?”
“그냥 그렇게 외워 둬.”
시몬은 눈을 껌뻑이는 목수를 뒤로하고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광장에 도착했다.
아크튜러스의 군대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개선문이 세워졌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꽃을 붙이고 있었다.
백 명이 넘는 여인들이 있었으나, 시몬은 단번에 루아를 알아볼 수 있었다.
‘도시 사람 다 됐군.’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당장 내가 시몬 아크튜러스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청혼을 한다면 받아 줄 테니까.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직 황녀와 파혼한 것이 아니다. 또한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마음을 강제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평민 여자가 후작가 공자의 청혼을 거절할 수 있을까?
전생에서의 인연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나중에 정체를 밝히더라도, 사이먼이라는 신분으로 매듭을 짓고 싶었다.
“루아 양.”
감미로운 목소리에, 루아가 살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몬이 후드를 벗자 루아가 환하게 웃었다.
“어머, 사이먼 님!”
“꽤 오랜만인 것 같군요. 댁에 찾아갔는데 이곳에 계신다고 이야기를 들어 찾아왔습니다.”
“잠시만요!”
루아는 붙이고 있던 꽃을 마무리한 뒤 시몬 쪽으로 달려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시몬은 화가를 부르고 싶었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한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그 안에 담긴 꽃보다도 청초해 보였다.
“바쁘신데 방해한 건 아니지요?”
“아녜요. 전에 아버지께 이야기 들었어요. 말씀 전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실은 좀 놀랐거든요. 갑자기 떠나셔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젠 괜찮아요.”
잠시 대화가 끊겼다.
시몬을 바라보던 루아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라니에리의 말이 맞았다.
그리움.
만약 그때 사정을 충분히 설명하고 마이너 마을을 떠났더라면 이런 감정이 싹트진 않았을 것이다.
“아크튜러스 기사단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전쟁에서는 보급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이제 전쟁이 끝나서 오늘 막 도착한 참입니다.”
“앗, 그럼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좀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죠.”
시몬은 굳이 그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개선문 옆에서 이렇게 만났는데 말해 무엇 할까.
그 한마디가 마음에 와닿았는지, 루아는 다시금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곤 얼굴을 붉혔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이거 받아 주시겠어요?”
루아가 건넨 것은 바구니에 담겨 있던 하얀 꽃이었다. 시몬은 그것을 받았다.
“멋지게 싸워 주셔서 감사해요. 사이먼 님.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되었어요.”
“저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싸운 건 아크튜러스의 기사님들이지요. 특히 시몬 공자님은 대단한 용맹을 보이셨습니다. 감탄만 나오더군요.”
“맞아요. 그 얘긴 저도 들었어요.”
고개를 끄덕인 루아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제야 시몬과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사이먼 님도, 상단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셨잖아요? 기사님들이 잘 싸울 수 있게 도와주셨으니 충분히 공을 세우셨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그때 뒤에서 루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루아가 돌아보더니 곧 가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괜찮으시면 다음에 저희 집으로 와 주시겠어요? 아직은 좀 부족하지만, 빵 만들어 드릴게요.”
“기꺼이 그러지요.”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개선문으로 돌아간 루아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꽃장식을 이어 갔다.
시몬은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전생에서 경험한 그 어떤 순간보다도 살아 있다는 느낌이 이렇게 강하게 든 적이 없었다.
‘나만의 인생을 산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건가?’
마음속으로나마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