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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73화 (73/120)

73화: 전쟁의 끝 (3)

『협상이라는 말의 뜻을 아나?』

『……협상?』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항복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달랐다.

시몬은 나른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희 부족에서는 좀 의미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너희들은 힘의 논리로, 그러니까 싸우고 때려 부수는 게 전부 아니었던가?』

『…….』

뮬라타는 침착했다.

은근히 비꼬는 시몬의 말에도 반응하지 않고, 시몬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인지 생각해 볼 따름이었다.

뮬라타가 답했다.

『그랬다면 협상이라는 말 자체가 오크어에 없었겠지.』

『너무 바보 취급은 하지 말고. 내가 모르는 속뜻이 있을까 싶어서 혹시나 물어본 거다. 뭐, 우리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전통이나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건 없다. 협상은 거래와 비슷하지. 서로의 것을 주고받는 행위와 다를 게 없다.』

『그래?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시몬이 본론을 꺼냈다.

『너희 부족이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식량이겠지? 남부의 황량한 곳에서는 동물이 많이 살기 어려울 테니까.』

『그렇다.』

오히려 남부 지방은 동물보다 몬스터가 더 많다.

몬스터의 주식은 살로 된 모든 것들이다. 인간이건 오크건 동물이건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상황에서 오크들은 몬스터들과 싸우며 거점을 만들고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거기에 부족한 건 식량만이 아니다. 식수도 부족하다.

사막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남부 지방은 비도 잘 내리지 않는다. 농사는커녕 목축지를 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히 머릿수를 늘리기에 너무나도 가혹한 환경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크들이 북진하려는 것이다.

정착해서 살 만한 땅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다분히 그들만의 방식으로.

『너희 오크들은 곡식을 못 먹나?』

『먹는다. 고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때에 따라선 풀도 뜯어 먹지.』

『그렇다면 다행이군. 우리가 식량 문제를 해결해 주면 어떻게 할래?』

뮬라타가 흠칫 놀랐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우리가 정기적으로 식량을 대 주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너희들이 머물 만한 땅을 내어 줄 수도 있는 거고.』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뮬라타가 경험한 인간은 모두 그랬다.

하나를 받으면 둘 이상을 내어놓으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족이었다.

그럼에도, 뮬라타는 ‘머물 만한 땅’이라는 표현에는 귀가 솔깃했다.

『우리에게 땅을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아아, 이곳 알데바란의 땅을 내줄 수는 없지만, 아크튜러스는 다르다. 비어 있는 땅, 그러니까 개척해야 하는 곳이 많지.』

『우리를 노예로 쓰겠다는 것인가?』

뮬라타가 경계했고, 시몬은 입꼬리를 올렸다.

『노예로 쓰려고 했다면 진즉 너희들 잡아다가 황무지에 풀었을 거야. 내가 몇 번이나 전면전을 피했다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나? 이길 수 있는데도 말이지.』

『크르르…….』

『전면전을 피했다는 건 너희들을 사로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해. 나는 오크족을 하나의 종족으로서 대우하고 싶다.』

『진심인가?』

『대족장이나 되는 인물을 불러다 놓고 농담할 정도로 난 한가하지 않아. 그리고 너, 전에 내가 한 말에 느끼는 바가 있어서 이렇게 온 거 아냐? 진정한 대족장이란 무엇인지 말이다.』

곁에 있던 라니에리가 넌지시 눈빛을 보냈다. 많이 궁금할 것이다. 시몬은 이야기가 잘 풀리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나?』

『노동력. 그리고 기술.』

『노동력은 이해했다만, 기술이라 하면?』

『너희들의 전투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 기사들이 배웠으면 하는 것들이 좀 있거든.』

오크 전사의 대인 전투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제국의 정규군처럼 잘 짜인 전술을 선보이진 못하지만, 개개인의 무력 하나만큼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자체로 교본이 될 수 있다.

‘우리 기사와 병사들에게 가르치면 큰 도움이 되겠지. 몬스터 토벌에도 도움이 될 거고.’

그들의 야생적인 전투 능력은 마치 인간형 몬스터와도 닮아 있어서 실전과 비슷한 경험을 쌓게 하기엔 아주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정착지와 식량까지 공급해 주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이야기가 잘 풀린다면 아크튜러스 입장에서는 개척지를 확보할 수 있고, 세수가 늘어나며 유사시에 오크들을 용병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실로 부가 가치가 어마어마한 계획이었다.

『문제는 너희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냐 하는 거야. 자존심이 좀 센 놈들이 아니니까. 얼핏 보기엔 인간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잖아?』

시몬은 솔직하게 말했다.

뮬라타의 표정도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이대로 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우리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이미 이긴 싸움인데 더 해서 뭐 해? 너희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곧 철군할 거다.』

그러자 뮬라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의 제안을 수락하겠다!』

곁에서 듣고 있던 라니에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때 들었던 그 말이군.’

일전에 시몬이 알퐁스의 영주를 협박할 때 말했던 오크어와 완전히 동일한 말이 뮬라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야기가 잘 풀린 것이다.

새삼스레 소름이 돋았다.

마치 시몬은, 이 상황을 미리 보기라도 한 것같이 행동했으니까.

『하하하! 깜짝 놀랐네. 갑자기 벌떡 일어나길래 거절할 줄 알았거든. 일단 앉아. 아직 이야기 덜 끝났다.』

뮬라타가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라니에리는 다시금 빈 잔을 차로 채웠다.

『일단 우리가 협상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지.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어떤 문제인가?』

『우선, 인간들의 시선이 그렇게 곱지 않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뮬라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 과거에는 우리 인간과 오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낼 때도 있었지. 대륙에 침입한 악의 무리를 몰아낼 때 말이야.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야.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다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흥분하지 말고 들어. 일단은 아크튜러스 가문 내에 복속하는 형태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흥분하지 말라니까? 형식적인 복속이고, 실제로는 너희들에게 자치권을 줄 거다. 일종의 자치령이라고 생각하면 돼. 가능하면 간섭하지 않게 하지.』

『……약속할 수 있나?』

『약속하지. 이래 봬도 나는 아크튜러스 가문의 후계자라고. 유사시엔 영주 대리의 권한이 있다.』

만약 방금 한 말을 라니에리가 이해할 수 있었다면 옆에서 한 소리 했을 것이다. 유리할 때만 후계자 찾는다면서.

『나는 인간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간교엔 넘어가지 않아. 우리는 무장할 수 없게 될 거고…….』

『무장해도 된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인간들의 노예로 전락하겠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인간들은 협상할 때 문서를 남긴다. 그리고 내용을 만천하에 공개하지. 그걸 어기면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되는데, 우리같이 명예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귀족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추해지는 거야.』

시몬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라니에리가 미리 준비한 문서를 가져왔다. 종이가 아닌,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문서였다.

그 위에는 깨알같이 공용어와 오크어가 적혀 있었다.

아크튜러스와 오크족이 서로 협력한다는 조항이 매우 상세하기 적혀 있었다.

시몬은 두 문서 중 하나를 뮬라타에게 건넸다.

『한번 읽어 봐. 읽어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 가능하면 바꿔 줄 테니까. 오크어로 번역한 건 밑에 있는 제국어와 내용이 똑같으니까 의심할 필욘 없다. 정 마음에 걸리면 공용어 할 줄 아는 오크 데리고 와도 돼. 없으면 어쩔 수 없고.』

뮬라타는 차분히 오크어로 번역된 부분을 읽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시몬이 말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믿을 수 없군…….』

『뭐가?』

『우리에게 이렇게 온정을 베푸는 이유가 뭐지?』

『온정이라고 할 정도야? 마음에 들었나 보네.』

시몬이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이번엔 아예 팔짱까지 꼈다.

『온정이 아니라 서로 이용하는 거야. 너희들이 필요한 양식과 땅을 우리에게 얻는 것처럼 우리도 너희들의 기술과 힘이 필요한 거라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크르르르.』

『어때? 서명할래? 말래?』

잠시 고민하던 뮬라타는 허리춤에 걸린 단검을 빼 들었다. 라니에리가 살짝 놀랐으나, 태연하게 그 장면을 보고만 있는 시몬의 모습을 보곤 침을 꿀꺽 삼켰다.

『좋다. 하지.』

단검을 꺼낸 뮬라타가 검 끝으로 손바닥을 슥 그었다. 흘러나오는 녹색 피를 손바닥에 골고루 바르고, 계약서 위에 쿵, 찍었다.

『그게 오크의 방식이군.』

『다른 놈들은 더러운 방식이라고 비난하더군.』

『아니, 전혀. 아주 인상적이었어.』

이번엔 시몬 차례였다.

하지만 시몬은 본인이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 케나드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여기에 네 이름 좀 적어라.”

“제 이름을요?”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던 케나드는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시몬은 빨리하라며 펜을 건넸다.

“여기. 이쪽에 사인하면 돼.”

“아, 예…… 그래도 한번 읽어 보면 안 됩니까?”

“사인하고 나서 읽으면 되잖아. 형 못 믿어? 말로만 형님형님 했던 거야?”

“아, 아닙니다. 할게요.”

케나드가 펜을 움직여 근사하게 서명했다. 시몬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동생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케나드 아크튜러스의 이름으로, 우리 아크튜러스와 오크족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사실은 전 대륙에 공표될 것이며, 모든 이가 이 협정의 증인이 될 것이다.』

『좋다!』

시몬은 계약서 하나를 둘둘 말아 뮬라타에게 던졌다. 그사이, 케나드는 저게 무슨 말이냐며 라니에리에게 묻고 있었다.

당연히 라니에리는 그냥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이제 돌아가서 떠날 채비를 해라. 참고로 우리는 일주일 정도 후에 철군할 예정이야.』

『내가 더 해 줘야 하는 일은?』

『우리를 따라올 오크들의 수를 정확히 파악해 주면 좋겠군. 식량 배급을 해야 하니까. 뭐, 떠날 놈은 굳이 붙잡지 말고. 나중에 귀찮아지니.』

『알겠다.』

뮬라타가 돌아갔다.

“아우, 이 지긋지긋한 일도 이제 끝났구만!”

기지개를 켠 시몬은 곧장 침대로 걸어갔다. 그러곤 대자로 뻗었다.

“너무 서두르신 건 아닌지 걱정이군요. 가능하면 본가에 계신 주군께 의견을 여쭙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본가까지 왕복 열흘 넘게 걸리는데 어떻게 일일이 허가를 받아? 안 그래도 군량 축낸다고 사방에서 삿대질하고 있는데.”

“이종족과의 협정입니다. 이번 일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입니다. 신중하게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그사이 케나드는 서류의 공용어 부분을 읽고는 사색이 되었다.

엄청난 일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다.

“혀, 혀, 형님…… 이거, 여기에 제 이름이 들어가면…….”

“괜찮아. 아버지께서 아주 좋아하실 거다. 힘세고 오래가는 일꾼들이 생겼으니까.”

“…….”

“케나드.”

“예?”

“이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히 해 주마. 잘 기억해.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예에?”

“다들 나가 봐. 낮잠 좀 자게.”

시몬은 느긋하게 누워 눈을 감았다. 한숨을 내쉰 라니에리는 덜덜 떨고 있는 케나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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