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전쟁의 끝 (2)
“정말 대단한 검술이었습니다. 공자님!”
“오오! 믿기지 않는 대결이었습니다! 마치 주군께서 놈들을 베어 넘기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이 엄청난 대결을 주군께서 보지 못하신 게 너무 아쉽습니다!”
기사들의 찬양이 시작되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굳이 힘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싸움을 길게 가져가지도 않았다.
그 말은, 진보된 아크튜러스 검식을 거의 노출시키지 않았다는 것.
노골적인 눈속임이었으나, 격전 끝에 승리하는 것보다 한두 합에 적을 쓰러트리는 게 더 포장하기 쉬울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은 이걸 심검의 경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미래의 검술이지.’
시몬은 굳이 기사들의 착각을 바로잡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케나드를 통해 새로운 검술을 조금씩 공개할 생각이었으니까.
“공자님.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그동안 왜 힘을 숨기셨습니까?”
파월 경이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기사들도 같은 눈빛으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힘을 숨기다니?”
“제가 알기로 공자님은 3서클 오러 유저입니다. 그런데 오늘 결투를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족장 열한 놈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제국에 몇 명이나 될까요?”
검술명가 아크튜러스의 지배자, 드뇌브 후작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 외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뿐이 아닙니다. 저번엔 심검의 경지를 보여 주시기도 했지요.”
시몬이 씩 웃었다.
“너희들에게 내 실력을 드러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건 아닙니다만…….”
“아크튜러스의 기사들은 용맹하지만 때론 머리를 쓰지 않아 아쉬울 때가 있지.”
직접적인 비판인데도 기사들은 그 누구도 불쾌감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조아리며.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다. 나는 오크에 대해 잘 안다. 그들의 연합이 끈끈하지 않고, 대장전을 걸어올 걸 미리 알고 계책을 짰던 거야. 그게 놈들의 문화니까.”
여러 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기사들은 오크를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동물 같은 이종족이라고만 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떤 문화가 있고 전통이 있는지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뮬라타 혼자 살려 보낸 것도 내분을 일으킬 목적이었던 거다. 조만간 오크 연합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겠지. 하지만 너희들은 어땠지? 족장들을 죽일 생각만 했잖아. 뒤에 서 있는 전사들이 룰을 어기고 몰려올까 걱정했고. 그치? 그러니까 날 돕겠답시고 나온 거잖아.”
“부끄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기사라면 대인 전투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게 중요하지만,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라면 판을 짤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교훈을 잊지 말도록. 미리미리 공부하고 계획을 세우란 말이야.”
“예! 사령관.”
시몬을 향한 충성과 존경이 한층 더 올라간 듯, 기사들이 일제히 군례를 취했다. 케나드는 이미 시몬의 연설에 푹 빠져 있었다.
뒷짐을 진 시몬이 기사들을 둘러보며 연설을 이어 갔다.
“오늘 우리는 승리했다! 오크들은 더 이상 이곳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고기와 술을 내와라. 병사들을 위해 연회를 열 것이다!”
“명을 따릅니다.”
그날 밤, 아크튜러스-알데바란 연합군 진영에서 큰 연회가 열렸다.
그에 비해 오크족 진영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몇몇 오크 부족이 진영에서 이탈했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려왔지만, 시몬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진형이 와해되는 분위기입니다. 공자님 말씀대로 이번 전쟁은 완전히 끝났군요. 이 정도 피해를 내고 놈들을 물리쳤다는 건 정말 대단한 업적입니다. 주군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뭐, 케나드가 초전을 잘 치러 준 덕분이지.”
“그러기엔 공자님의 결투가 너무 압도적이었습니다. 오크족장을 모조리 베어 버린 위업은 순식간에 대륙 전체에 퍼지겠지요.”
“그건 좀 곤란한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크 샤먼이라는 변수가 있었으니까. 만약 시몬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기사와 병사들이 더 많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그래도 시몬은 만족했다.
‘이번 전투를 계기로 케나드가 더욱 성장할 수 있었지.’
오크와의 전투는 영지에 출몰한 도적 떼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과는 질 자체가 달랐다.
실제로 케나드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시몬의 결투를 눈으로 보았고, 머릿속에 새겨 즉시 수련에 들어갔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검술 천재라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그 증거로, 지금 연회엔 케나드가 참가하지 않았다.
“너무 수련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해. 쉴 때는 쉬어야지. 음식하고 술 좀 챙겨서 갖다줘라. 먹지 않는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해.”
“알겠습니다. 공자님.”
라니에리가 자리를 뜨자, 손에 술잔을 든 제2기사단장 한스가 자리를 청했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근데 과연 뮬라타가 이곳으로 찾아올까요?”
“아마도?”
“오크족 군대의 절반 정도가 탈주했다고 합니다. 곳곳에서 서로 싸우는 정황도 포착되었다고 하고요.”
“원래 이기적인 성향이 강한 놈들이야. 거기에 족장들이 모조리 죽었으니 일단 튀고 보는 거지.”
“그보다 공자님.”
말의 톤이 달라졌다. 한스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시몬에게 물었다.
“혹시, 검선의 길을 걸으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뭐?”
“검선 말입니다.”
검선.
속세를 버리고 검의 길을 걷는 선인들.
일전에 제1기사단장 파월이 처음 제기한 의문이기도 했다. 한스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으나,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난 또 뭐라고. 내가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하니까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온 거야?”
“파월 경이 그러더군요.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아무래도 그것 외에는 달리 이유가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추측이네. 나중에도 그런 말이 나오면 맞는 것 같다고 슬쩍 흘려라.”
“예?”
“묻지 말고 하라는 대로 좀 해.”
“아, 옙.”
실제로 검술명가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오로지 검의 극의에 닿기 위해 가문을 포기하고 속세를 떠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특히나 검술로 추앙받는 아크튜러스 가문이라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가문 기사들과 알데바란 기사들이 허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참 좋군.”
“그러게 말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몬이 얼마 전, 그들에겐 죄가 없다며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연회장이 아니라 전장에서 서로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한스는 사람 일이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모시는 공자의 혜안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새삼스레 느꼈다.
“한스. 너한테만 살짝 이야기해 주는 건데, 저택으로 돌아가면 바로 비상벨 누를 거야. 준비 잘하라고.”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저희는 준비를 끝내 놓았습니다.”
여러 사건을 거치며 제2기사단엔 징크스가 하나 생겼다. 바로 숫자 7. 그것을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본래라면 행운의 숫자라고 여겨지지만, 제2기사단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출동 시간 7초, 그리고 주사위 숫자 7.
제1기사단과의 모의 대결에서 모조리 패한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 징크스를 깨기로 다짐한 상황.
“하하하. 잘해 봐.”
시몬은 한스의 어깨를 다독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뮬라타가 단신으로 인간 연합군의 본진을 찾았다.
* * *
뮬라타는 매우 지친 기색이었다.
그의 표정만 봐도 오크 본진의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 병사들은 근처에 쉬이 다가가지 못했다.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거대한 마울이 그의 등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막사에서 시몬이 나와 그를 맞았다.
『약속을 지켰군.』
『크르르르…….』
뮬라타가 낮게 그르렁거리자, 시몬을 호위하던 기사들의 손이 재빨리 검으로 움직였다.
시몬이 손을 뻗어 멈추게 했다.
“그만둬라. 손님에게 무슨 무례냐?”
“하지만 놈이 살기를…….”
“그르렁거린 거? 그냥 한숨 쉰 거야. 아직도 오크를 모르나?”
시몬이 꾸짖자 기사들의 손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시몬은 뮬라타를 막사 안으로 들였다.
안에서는 라니에리가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은은한 향이 막사 안에 가득 찼다.
『앉아라.』
시몬과 뮬라타가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체구가 큰 뮬라타를 위해 커다란 의자를 미리 준비해 놓아서,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라니에리가 찻잔을 각각 시몬과 뮬라타 앞에 놓았다.
찻잔만큼은 크게 만들 수 없어서, 뮬라타의 거대한 체구에 비해 찻잔이 아주 귀여워 보였다.
『마셔라. 인간들은 친교 목적으로 차를 나눠 마시곤 하지.』
『차라는 게 무엇이지?』
『식물의 잎을 뜨거운 물에 우려낸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심신 안정에 아주 좋은 약이기도 해.』
커다란 손으로 찻잔을 쥔 뮬라타가 킁킁거리며 차향을 맡아 보았다.
향은 나쁘지 않았다.
뮬라타가 입을 벌리더니 찻물을 한꺼번에 입 안으로 끼얹었다.
그 장면을 본 시몬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그렇게 한 번에 마시는 거 아닌데. 향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셔야 하는 거라고.』
『으음…….』
『미안하군. 내가 좀 더 설명을 해 줬어야 했는데.』
뮬라타는 입맛을 다시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눈치 빠른 라니에리가 다시금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차 안에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뮬라타는 개의치 않았다.
목숨을 취하려고 했다면 이미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니까.
시몬이 물었다.
『부족 상황은 어떤가?』
『……엉망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많은 부족들이 전장을 떠났지.』
『정확히 어느 정도야?』
『반 정도 남았다. 우리와 계속하겠다는 부족은 다섯 부족에 불과하지.』
『그래도 그 정도면 선방했네.』
그것은 뮬라타가 짊어져야 하는 몫이었다. 시몬에게 두 번이나 패했으니까.
『앞으로의 계획은?』
『그대가 아량을 베풀어 준다면, 남은 부족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더군…….』
『그 점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그보다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뭔데?』
『전에 우리가 한번 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언제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더군.』
시몬이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신경 쓸 거 없다니까?』
『나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대는 마치 우리 종족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 말은 맞지.』
시몬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다리를 꼬았다.
『꿈에서 봤다. 계시라고 할까. 거기에서 너와 오크족의 미래를 아주 생생히 봤지.』
『꿈……?』
『너희들에게도 낯선 일이 아니지 않나? 샤먼들이 계시를 받는 건 흔한 일일 텐데. 그렇게 정착지를 찾기도 한다고 알고 있다.』
『맞다. 그대가 본 우리의 미래는 어땠지?』
『우리에게 탈탈 털리고 뿔뿔이 흩어져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지. 잡힌 놈들은 노예로 팔려 나가고, 나머지는 굶주리며 떠돌다 굶어 죽게 되고…… 뭐 그런 운명이지.』
뮬라타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테이블을 내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잘 참아 냈다.
『그 미래를 피할 수 있나?』
『당연히. 그러려고 너를 여기로 부른 거야.』
『무엇을 원하지?』
시몬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뮬라타는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저 주먹보다도 작은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팽팽히 긴장이 당겨지는 순간.
시몬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