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전쟁의 끝 (1)
시몬이 홀로 나서자 연합군엔 비상이 걸렸다.
일대일 결투와는 다른 상황이다. 지금은 오크족의 모든 족장이 나와서 시몬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우리도 어서 나가서 도와야 하오!”
스릉!
제1기사단장 파월이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공자님의 허락이 없었는데? 지켜보라고 하지 않으셨소?”
“무슨 순진한 소릴 하고 있는 거요! 이대로 지켜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리의 명예가 어떻게 되겠소! 설령 아무 일 없다고 해도 주군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오!”
이들이 서 있는 망루 아래로는 목책이 성벽처럼 세워져 있었다.
오크들은 늑대에 올라타 인간 기병만큼의 기동력과 파괴력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격을 막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시몬은, 마치 요새 밖으로 홀로 나간 상황에 처해 있었다.
“모두 몰려나오지는 말고, 한스 경과 자이모 경 이렇게 둘만 따라오시오!”
“그러지!”
“나도 가겠다.”
케나드도 나섰다. 하지만 파월은 그를 말렸다.
“안 됩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공자님께서 뒤를 맡아 주셔야 합니다. 저희끼리 다녀오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리는 없다. 형님은 강하니까. 좀 더 가까이에서 응원하고 싶어서 그래.”
“공자님…….”
“가자.”
케나드가 망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뒤이어 연합군을 대표하는 기사 세 명도 뛰어내려 시몬에게 달려갔다.
라니에리에게서 떨어질 수 없었던 로빈도 망루에 서서 활에 화살을 먹였다. 그리고 언제라도 쏘아 낼 수 있게끔 오러를 주입했다.
뒤를 힐끔 바라본 시몬이 씨익 웃었다.
“방해되니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라고 했던 건데 왜들 몰려나오고 그래?”
“뒤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공자님! 마음 놓고 싸우십시오!”
“너희들이 땀 빼는 일은 없을걸?”
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파월은 물론, 두 가문의 기사들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만큼 근거리에서 도열한 오크족의 족장들은 대단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양 진영에 긴장감이 고조되던 찰나.
시몬이 외쳤다.
『녹색 괴물들아! 제일 먼저 죽을 놈이 누구냐?』
『내가 상대하지…….』
붉은이끼부족을 이끄는 켈틱이 대형 도끼를 휘두르며 앞으로 나왔다. 그의 눈은 붉은 기운의 효과를 얻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뮬라타와 블러드본을 쓰러트린 인간이 있다기에 이렇게 왔는데 실제로 보니 형편없군.』
『다들 죽기 전엔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너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붉은이끼부족의 진면모를 보여 주마…….』
가래가 끓는 소리를 내며 켈틱이 돌진했다. 시몬은 태연히 검세를 잡고 그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쿵! 쿵! 쿵!
집채만 한 황소가 돌진하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블러드본 놈과는 좀 다르군.’
붉은 기운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두 눈은 차분했다. 뛰는 발걸음에도 분노가 서려 있지 않았다.
‘머리를 쓰는 타입인가?’
오크라고 해서 다들 근육질에 머릿속이 빈 놈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뮬라타나 잔발라처럼 지능이 뛰어난 자들도 종종 있었다.
지이잉!
시몬은 오러를 끌어올려 온몸을 감쌌다.
가까운 거리에 닿았을 때, 돌연 켈틱이 걸음을 뚝 멈췄다. 검을 휘두르면 간신히 빗나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크아아아!』
그러고는 켈틱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오른발을 쾅, 하고 바닥에 찍었다.
드드드드!
자연의 힘과 붉은 기운의 힘이 더해진 매우 강력한 충격파가 지면을 흔들었다.
쩌적! 쩍!
가까운 거리에 있던 시몬도 흔들림의 영향권에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아아, 이제야 생각나네. 분명 켈틱이라는 이름이었지?’
전생에서 한번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도 땅을 울려 자세가 흐트러지면 바로 뛰어올라 도끼로 적을 내려치는 방식으로 싸웠다.
결투 중 흙을 차서 상대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덕분에 굉장히 상대하기 까다로웠었다. 피해도 심했고.
‘하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아.’
시몬은 즉시 검을 역수로 쥐고, 오러가 맺힌 검을 바닥에 찍었다.
‘방법을 아니까.’
푸욱!
드드득!
맹렬히 시몬을 향해 달려오던 지진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아예 멈춘 것은 아니었고, 시몬을 피해 좌우로 갈라지며 뒤로 뻗어 나갔다. 마치 보호막에 막혀 빗나가는 그런 모양새였다.
『크아아아!』
어느새 뛰어오른 켈틱이 거대한 도끼를 두 손으로 꽉 쥔 채 힘껏 내리치려 했다.
그는 지진 공격이 통할 줄 알았다.
잔발라에게 붉은 기운까지 받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뛰어올랐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완벽한 준비를 마친 시몬의 모습이었다.
『죽으어어어어어!』
켈틱은 멈출 수 없었다.
부우웅!
대형 도끼가 수직으로 내려쳐졌다.
하지만 그곳에 시몬은 없었다.
『하암, 너무 느려서 하품이 나오는군.』
목소리가 뒤쪽,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켈틱은 도끼를 휘두르며 뒤로 돌아서려 했다.
푸우욱!
그러나 가슴을 꿰뚫고 나오는 푸른 검이 좀 더 빨랐다.
『크어어어…….』
『편히 쉬거라.』
털썩.
붉은이끼부족의 우두머리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그 장면을 지켜본 대족장들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믿을 수 없군!』
『붉은 기운을 받고도 패배하다니!』
켈트는 다른 전사와는 달리 머리를 쓰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시몬의 체력과 오러를 어느 정도는 빼 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우리 모두 죽고 말겠군.』
뮬라타가 찬물을 끼얹는 말을 했다. 당연히 다른 족장들이 분개했다.
『패배자는 조용하라!』
『인간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 받은 주제에!』
『…….』
뮬라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부족이 처한 위험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위대한 대족장이 될 수 있는지,
‘인간. 도대체 무슨 속셈인가?’
뮬라타가 시몬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검을 휘둘러 녹색 피를 털어 내곤 이렇게 외쳤다.
『다음!』
그 한마디 도발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온몸이 푸른 오크 전사가 거대한 둔기를 휘두르며 시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아아아! 인간에게 죽음을! 오크에게 명예를!』
『상당히 진부한 유언이군.』
스칵!
이번에도 시몬은 딱 한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끄어어어…….』
가슴을 크게 베인 푸른가시부족의 족장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벌써 족장급의 대전사 두 명이 시체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케나드와 기사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군.”
“검식은 같지만 오러의 위력이 완전히 달라. 계속 힘을 숨기고 계셨던 것인가?”
누구보다도 시몬의 수련을 가까이 봐 왔던 파월과 한스가 각각 그렇게 평가했다.
당연히 아크튜러스의 두 단장은 시몬이 5서클에 들어섰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케나드도 마찬가지.
“역시 형님…… 대단하십니다!”
최근에 시몬에게 들은 것은 그가 3서클의 오러 유저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몬의 검에 서려 있는 오러는 결코 3서클 유저가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다처럼 푸르고 깊었다.
“대체 공자님의 경지는 어디란 말인가?”
“검식의 경지만이 아니라 오러의 질 자체가 달라진 것 같은데…….”
서걱!
사각!
푸우욱!
그사이, 연이어 나온 족장들이 모조리 절명했다.
개중엔 독을 쓰는 족장도 있었고, 자연의 힘을 타락시켜 사용하는 잔발라도 있었으나 시몬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시몬이 압도적으로 강하기도 했지만, 전생의 기억이 하나둘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치열했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
‘큰 변수는 없었군.’
모든 것이 시몬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몬은 만족스럽게 적진을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오르투스와 뮬라타 둘뿐이었다.
『크르르르……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어찌 족장이란 자들이 저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인가!』
오르투스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분노한 상태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오.』
『닥쳐라!』
오르투스가 뮬라타의 멱살을 쥐었다.
하지만 뮬라타는 화난 내색 없이, 그에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이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오. 본진으로 돌아가 새로운 족장을 뽑고, 우리의 연합이 흐트러지지 않게 관리해야 하오.』
『크르르…… 닥쳐!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새로운 대족장이 된 오르투스는 간신히 들어온 권력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쪽을 향해 도발해 오는 저 작은 인간을 뭉개 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꺼져라!』
오르투스가 뮬라타를 밀쳤다. 그리곤 거대한 창을 치켜들고 시몬에게 다가갔다.
『형제들의 복수를 하겠다. 너를 죽이고 머리를 잘라 제단에 바칠 것이다! 이 빌어먹을 인간 놈아!』
『내가 할 소리 대신해 줘서 고맙다. 나도 마침 제물이 필요하던 차였거든? 서로 머리 걸고 한판 뜨자.』
땅!
따앙! 챙!
푸욱!
또다시 시몬이 오르투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반대편에 검날이 튀어나올 정도로 심장을 정확히 가르는 일격이었다.
『컥…… 끄어어어!』
피가 쏟아지는 상태인데도, 오르투스는 마지막 발악을 하며 창을 휘둘렀다.
탁!
하지만 시몬의 손에 잡혔다.
창을 빼앗은 시몬은 허공에서 반 바퀴 돌린 뒤, 날카로운 창날을 오르투스의 가슴에 박았다.
푸욱!
『커억!』
그제야 오르투스는 저항을 멈추고 쓰러졌다.
오크 진영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족장은 몰라도, 새로운 대족장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정말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시몬은 차분히 창을 버린 뒤 전방을 응시했다.
『이제 하나 남았군. 어이, 뮬라타. 너도 싸워 볼 테냐?』
하지만 뮬라타는 무기를 들지 않았다. 그 상태로 시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크르르르……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은데.』
『기억력이 형편없군. 말했었잖아? 시몬이다.』
『시몬…….』
뮬라타는 그의 이름을 새기기라도 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하나 궁금한 게 있소.』
『그보다 싸울 거야, 말 거야?』
뮬라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양손을 들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그 장면을 본 아크튜러스-알데바란 연합군은 웅성거렸다.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오크가 싸움을 피하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현명한 선택을 했군.』
시몬은 검을 갈무리했다.
뮬라타가 말했다.
『그때 그대가 했던 말을 계속 생각해 보았소. 진정으로 우리 부족을 위한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오.』
『그래서, 좀 깨달음을 얻었나?』
『내가 하려던 질문과 비슷한 결론이오. 왜 그대는 나를 죽일 수 있었는데도 살려 주었소?』
앞서 두 번의 결투에서, 뮬라타는 다른 족장들과는 달리 목숨을 잃지 않았다.
뮬라타가 대족장에 오른 것은 누구보다도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족장들과 그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내 목숨을 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은데.』
이번엔 시몬이 다가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뮬라타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나는 너희들에 대해 아주 잘 안다. 그리고 누가 부족을 이끌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지.』
『나는 그대와 만난 적이 없소.』
『아니, 만난 적 있다. 그때는 상황이 좀 안 좋았지만, 지금은 다르니까.』
뮬라타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시몬은 피식 웃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그냥 넘어가지. 이만 돌아가서 동족들을 살펴라. 방해꾼들이 모조리 죽었으니 통솔하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설마 일부러……?』
『으음, 그건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사흘 뒤에 우리 본진으로 와라. 느긋하게 차나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해 보자고.』
돌아선 시몬이 본진으로 돌아왔다.
입구 쪽엔 기사들이 잔뜩 몰려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