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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69화 (69/120)

69화: 새로운 대족장 (1)

시몬은 눈을 한쪽만 치켜뜨고 기사를 바라보았다.

한스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기사가 그래도 단장급이라 시몬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귀찮다는 내색을 풀풀 내비치며.

“열심히 싸우고 온 사람 쉬지도 못하게 하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무슨 일인데?”

“오크 전사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괴성을 지르며 본진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또 뮬라타야?”

“아닙니다. 다른 오크입니다! 온몸이 시뻘건 놈인데, 아주 흉악해 보였습니다.”

시뻘건 오크라.

잠시 전생의 기억을 더듬던 시몬은 어렵지 않게 그 오크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블러드본. 그놈인가?’

오히려 뮬라타보다 호전적인 오크라고 불리는 놈이다. 전생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정말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녔던, 악명이 자자한 오크였다.

‘뮬라타가 다른 전사를 내보내다니. 확실히 내부에서 입자가 좁아진 모양이군.’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패배했다. 그것도 일대일 대결에서 말이다.

거기에 목숨까지 살려 줬으니 명예가 땅으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온몸이 시뻘건 놈이라면 붉은바위부족 족장인 것 같은데. 갈 테니까 소란 떨지 말라고 전해.”

“이번에도 사령관께서 직접 나서시는 겁니까?”

“하루에 두 탕 뛰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파월 경 선에서 컷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은 상대를 안 해 줄 거야. 이젠 나한테 원한이 생겼을 테니까.”

“어…… 저는 어떻습니까?”

“너? 애석하지만 조금 더 수련해야 하지 않을까?”

시무룩해진 한스를 다독인 시몬이 검을 쥔 채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시몬을 바라보며 함성을 질렀다.

“오오오!”

“시몬 공자님 만세!”

“아크튜러스에 영광을!”

“위대한 승리를!”

그들은 이미 시몬의 승리를 낙점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환호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 한편으로는 이런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

시몬은 알데바란과의 일촉즉발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해 냈다. 이번에도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몸조심하십시오. 공자님.”

“닭이나 한 마리 잡아 놔. 돌아오면 엄청 배고플 거 같거든. 약초 좀 넣고 푹 고아 먹으면 든든할 거 같은데.”

“알겠습니다.”

“아니, 나 혼자 먹기는 좀 그러니, 병사들에게도 술과 고기 좀 챙겨 줘. 아마 오늘은 조금 새로운 장면을 보게 될 테니까.”

“명을 받듭니다.”

라니에리에게 저녁 메뉴를 달아 놓고 시몬은 전장으로 나섰다.

끼이이이!

본진의 문이 열리자 소란을 피운 주인공이 시야에 잡혔다. 시뻘건 피부와 건장한 체구의 오크가 누런 송곳니를 보이며 씨익 웃고 있었다.

『크큭. 이런 젖비린내 나는 인간에게 패하다니. 뮬라타도 이제 퇴물이 된 모양이군!』

블러드본의 등엔 날카로운 재블린이 수십 개 달려 있었다. 그는 투창의 명수였다.

적이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심장을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거기에 양손엔 쌍도끼를 쥐고 있다. 수많은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지만, 그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두 자루의 도끼였다.

지난 전투에서도 저 도끼에 희생된 기사와 병사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연합군 병사들은 ‘붉은 피부의 오크’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당연히 시몬은 아니었다.

『오랜만이다. 블러드본.』

『……으음? 어떻게 인간 따위가 내 이름을 알고 있지?』

블러드본은 시몬을 이번 전쟁에서 처음 보았다. 하지만 상대가, 그것도 젊은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벌써 내가 인간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모양이군…… 큭큭큭! 미개한 인간들 따위의 숭배도 제법 기분이 좋은데?』

『뭔 개소리야.』

이번엔 시몬이 이를 보이며 대꾸했다.

『이름만 아는 게 아니다. 네가 ‘잡종’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 있지.』

시몬은 잡종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었다.

잠시 멍해진 블러드본이 정신을 퍼뜩 차리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 닥쳐라!』

『그럼 왜 피부가 그렇게 빨갛지? 너희 아비와 어미도 피부가 빨갰나? 내가 알기로 아닐 텐데.』

『이노오오오오옴!』

블러드본이 포효했다.

그는 재빨리 손을 드는 듯했는데,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재블린을 날렸다.

슈슉!

눈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건, 평범한 기사들의 입장에서나였다.

시몬은 달랐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으로 공격을 피해 냈다.

휙!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몬을 지나친 재블린은 마치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망루 쪽으로 날아갔다.

너무 빠르고 강력한 공격이라, 갑옷을 걸친 기사 두어 명 정도는 꿰뚫고 지나가기에 충분해 보였다.

나와서 구경하던 기사들이 위험에 빠질 찰나.

피웅!

채앵!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재블린을 쳐 냈다.

로빈이었다.

“오오…… 로빈 경!”

“역시 신궁이란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군!”

만약 로빈이 그냥 화살을 날렸다면 재블린을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충실히 오러를 연마하고 있었다.

어설펐던 세 개의 서클도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아 제 성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로빈은 방금 날린 화살 한 방으로 그간의 수련을 입증한 셈이었다.

시몬이 망루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제법 창 좀 던지는데, 어쩌나? 우리 쪽에도 활 잘 쏘는 친구가 한 명 있거든. 괜한 짓은 안 하는 게 좋아. 힘만 빼는 거니까. 그보다 네 부모 이야기를 좀 더 해 볼까? 전부터 너무 궁금했거든. 네 모친이 이종족에 관심이 많았나 보지? 어떻게 하면 피부가 빨간…….』

『크르르르…… 닥쳐라 인간! 널 반드시 죽인다! 으아아아아아!』

시몬이 약점을 제대로 건드렸다.

다른 욕도 아닌 부모를 건드렸다. 블러드본은 태어나면서 잡종 소리를 수도 없이 듣고 자랐다.

그가 붉은바위부족의 족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분노를 통해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같은 오크도 아닌, 하찮은 인간 따위가 역린을 건드렸다.

그의 분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쉭쉭!

재블린 두 자루고 동시에 날아들었다. 시몬은 여유롭게 검을 빼 들어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챙! 채앵!

공격은 간단히 막혔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눈속임이었다. 어느새 거리를 좁혀 온 블러드본이 크게 점프하며 뛰어들었다.

『네 뇌수를 쪽쪽 빨아 먹어 주마!』

카앙!

시몬은 머리를 노리는 도끼를 가뿐히 막아 냈다. 한 템포 늦게 허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다른 도끼가 시야에 잡혔다.

검을 비틀어 막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뭐 이쯤이야.’

시몬은 왼손에 오러를 주입한 뒤 힘을 꽉 주었다.

쩌엉!

도끼와 손등이 부딪치며 유리로 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푸른 오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오러를 더욱 강화시켜 깨지지 않게 하면, 오히려 내부 장기가 손상될 우려가 있다. 충격을 흡수해 깨지게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시몬은 블러드본의 연속 공격을 모두 막아 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블러드본이 광폭했다.

안 그래도 시뻘겋던 몸이 더욱 새빨개졌다. 등에 그려진 문신에서 붉은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자연의 기운이 사방으로 확 퍼졌다.

『나오기 전에 샤먼하고 면담하고 왔구나? 눈속임을 하다니. 오크답지 않은 비겁한 방식이군.』

『비겁? 크하하하! 어차피 전투에서 이기면 그만이지!』

『그러니까 너희 붉은바위부족이 멸족하게 되는 거야.』

『헛소리!』

미친 듯한 도끼질이 시작되었다.

시몬은 양손으로 검을 잡고 오러를 쏟아부었다.

쾅!

쾅쾅! 콰직!

도끼에 실린 붉은빛과 검에 서린 푸른빛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장관을 연출했다.

『오래 끌면 배고프고 피곤하니까 슬슬 끝내자.』

『흐흥! 싸움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부웅! 쉬이익!

체술을 써서 가뿐히 공격을 피한 시몬이 검세를 잡았다.

애매한 거리.

블러드본은 단번에 뛰어들 만한 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처음 보는 저 검세가 대단히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하지만 이 입만 산 인간 놈을 쓰러트려 난도질하고 싶다는 본능이 조금 앞섰다.

그래서, 블러드본이 다시금 높게 점프했다.

『하하하! 멍청한 자식!』

동시에 시몬의 검식이 확 변했다.

전방에서 짓쳐 들어오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식의 검세였다면, 이제는 날아오는 무엇이라도 베어 넘길 것 같은 패도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시몬은 오러를 강하게 발출하며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동시에 블러드본의 도끼도 휘둘러졌다.

서걱!

하지만 들려오는 절삭음은 딱 한 번뿐이었다.

바닥으로 내려서며 시몬을 스쳐 지나간 블러드본은 재빨리 몸을 돌려 도끼를 휘두르려고 했다.

『……컥.』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피가 입에서 쏟아졌다. 온몸에 힘이 빠졌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휘두르려던 도끼는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크어……억…….』

푸화학!

붉은바위부족에서 가장 용맹한 오크는, 허리째로 잘려 나가 그대로 절명했다.

오크 진영에서 무섭도록 잔인한 침묵이 흘러나왔다.

반면, 인간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공자님이 오크를 물리쳤다!”

“아크튜러스 만세!”

“공자님 만세!”

이번에도 오크 전사를 살려 보낼 거라는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시몬은 친히 블러드본을 베어 버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칵!

시몬의 검이 휘둘러지더니, 이미 죽은 블러드본의 머리를 베어 냈다. 이어 시몬은 그것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툭, 데구르르…….

머리통이 멀리 날아가 오크의 본진 쪽으로 굴러 들어갔다.

오크족에게 있어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면 또 덤벼라.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까.』

피식 웃은 시몬이 다시 본진으로 돌아왔다. 마치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모든 장병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몬을 맞았다.

“이번에도 살려 보내실 줄 알았는데요.”

라니에리가 천막까지 따라오며 물었다. 시몬은 검을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 오크의 군대가 얼마나 많은 부족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냐?”

“잘 모릅니다.”

“열두 종족이다. 그중 붉은바위부족은 꽤 세력이 큰 부족이지.”

그 순간 라니에리의 눈에 반짝, 총기가 맺혔다.

“설마, 뮬라타를 제외한 모든 부족장들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시몬은 흡족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라니에리를 가리켰다.

“난 네가 이런 점이 참 마음에 든다니까? 파월 경이나 한스 경도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그럼 앞으로 열한 번, 아니죠. 대족장 뮬라타가 패배했으니 열 번은 더 싸우시겠군요. 대족장을 제외한 모든 족장을 죽이고, 내부 분열을 일으켜서, 다시금 뮬라타를 결투로 끌고 나온다는 전략.”

“정확히 봤다.”

대족장인 뮬라타의 부족을 제외한다면 남은 부족은 열 곳이다. 블러드본이 죽었으니 다른 부족의 족장들이 나설 가능성이 크다.

라니에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시몬을 바라보았다.

절로 존경심이 드는 전략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좀 든든히 먹어 둬야 해. 준비는 다 됐냐?”

“아직입니다. 이제 막 불을 올렸을 겁니다.”

“왜들 그렇게 굼떠? 사령관은 부지런히 나가서 뺑이 치고 있는데. 윗물이 맑은데 아랫물이 탁하면 쓰나?”

“그럼 전투를 좀 천천히 하십시오.”

혀를 찬 시몬은 눈을 붙였다.

그날 밤, 연합군의 기사와 병사들은 사령관이 하사한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겼다.

반면 오크 진영은 침통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크르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로군.』

거대한 오크가 붉은 안광을 빛냈다.

그 오크의 시선은 아크튜러스-알데바란 연합군의 본진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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