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꿈보다 해몽 (2)
“이번에는 어떨까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저 오크 놈 좀 봐. 아주 독기가 제대로 올라온 것 같지 않나?”
“게다가 무기까지 바꾸고 왔고 말이지.”
“오히려 사로잡히지 않고 풀어 줘서 기분이 무척 상한 것 같은데요.”
기사들이 저마다 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크튜러스의 기사들이 활발히 의견을 낸 것에 비해 알데바란의 기사들은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있기만 했다.
직급은 낮지만, 누구보다도 용맹한 한스의 조카가 말했다.
“방어구도 안 입고 나가셔서 걱정입니다. 저러다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하시려는 건지…….”
“그만큼 자신감이 있으신 거다. 상대를 도발하는 목적으로 가끔 쓰는 아주 고난도의 전략이기도 하다네.”
“이야, 정말입니까? 저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거 같은데요?”
아무리 오러 유저라고 해도 호신강기를 두르는 것엔 한계가 있다.
피할 수 없는 궤적으로 화살이 날아온다고 가정해 보자.
맨몸에 호신강기를 두르고 화살을 맞는 것과, 갑옷을 입은 채로 호신강기를 두르고 맞는 것은 말 그대로 천양지차다.
조금이라도 단단한 것에 오러를 부여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이야기다.
아무리 정당한 대결을 숭상하는 오크라고 할지라도, 모든 오크가 명예로운 것은 아니다.
특히 오크 샤먼들은 음습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비열한 방식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오, 드디어 싸우나 봅니다.”
뮬라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속도가 붙더니, 마치 황소가 뿔을 세우고 돌진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시몬은 태연하기만 하다.
뭔가 혼자 중얼거리는 듯하더니 검을 뽑았다.
이어서 검세를 잡았다.
“허허, 정말 대단하군요!”
“벽을 보는 느낌일 것 같은데요? 강철로 된 벽 말입니다!”
아직 수련이 더 필요한 하급 기사들은 시몬의 검세만 보고도 감탄했다.
전혀 빈틈이 없었다.
맞서 싸우는 게 자신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자세라 사방에서 감탄이 나왔다.
“과연 이번엔 몇 수 만에 놈을 굴복시킬지 궁금하군.”
제1기사단장 파월은 이미 시몬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제2기사단장 한스도 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윽고 시몬과 뮬라타가 충돌했다.
“오오……!”
“정말 대단해!”
하급 기사와 상급 기사의 구분은 단순히 명칭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취향이나 주량 차이는 더더욱 아니다.
다른 사람의 결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서 명백한 차이가 난다.
하급 기사는 자신의 편을 응원한다.
그리고 멋진 공격이 들어가면 주먹을 꽉 쥐며 환호성을 지른다. 자신의 편이 승리하면 기뻐하고 패배하면 기분이 우울해진다.
하지만 상급 기사는 좀 다르다.
“……저게 가능한 검로인가?”
“믿을 수 없군요…….”
하급 기사가 결투 자체에 감정을 이입한다면, 상급 기사는 결투의 주인공이 되려고 노력한다.
적이 내지른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는지.
따앙!
아군의 공격보다 더 효과적인 검로를 찾을 수는 없는지.
사악!
상대의 빈틈을 어떻게 파고들 것인지.
퍼어억!
누군가가 승패에 연연할 때, 노련한 기사들은 승패보다는 그 결투 자체를 교본으로 쓰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아크튜러스의 기사들은, 시몬이 단 세 번의 공격으로 뮬라타를 제압하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군.”
“혼란스럽군요.”
또다시 걷어차인 뮬라타는 꼴사납게도 바닥을 굴렀다. 그는 이미 무기를 놓쳤고, 차가운 검날에 목이 노출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뮬라타가 패배했다.
무기를 놓치는 시간까지 단 10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실력 차.
“아크튜러스 검식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한스의 조카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매우 불경스러운 말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크튜러스의 후계자의 검술을 그렇게 평가한 것이니까.
다행히 그 불경함을 짚는 상급자는 없었다.
오히려 다른 반응이 나왔다.
“저건 아크튜러스 검식이 맞다.”
파월이 말했다. 곁에 있던 한스도 부정하지 않는 듯한 눈치다.
“하지만 검로가 너무 다릅니다. 아크튜러스의 검식은 정말 정석처럼 딱 정해지는 맛이 일품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까 공자님께서 보여 주신 검로는 너무 무작위적인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그 검로를 전에도 한번 본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이긴 했지만.”
“본 적이 있으시다고요?”
“그래. 바로 주군께서 진심으로 검을 휘두르실 때였지.”
그 말에 주변이 술렁였다.
드뇌브 후작은 아크튜러스 검식의 마지막 단계, ‘심검’을 마스터했다.
즉 파월의 말은, 시몬이 보여 준 검술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검술이라는 말이었다.
바로 ‘심검’의 경지.
“단장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공자님께서 심검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세상에,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열병을 앓기 이전의 시몬은 가장 처음 단계인 격검 단계의 대성을 앞두고 있었다.
사실 그것으로도 정말 대단한 성취였다. 격검 다음 단계인 살검을 대성하지 못하는 기사들도 부지기수로 많았으니까.
그런데 그 단계마저 뛰어넘고 심검의 경지를 보였다?
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믿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아까의 그 공격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 어제 싸움도 이상한 점투성이였다. 내가 아는 공자님이 아닌 것 같았다.”
“역시! 오크가 자랑하는 대족장이 두 손 들 만한 일이군요!”
“시몬 공자님 만세!”
젊은 기사들은 기뻐했으나, 파월과 한스는 마음이 복잡해짐을 느꼈다.
‘시몬 공자님은 후계를 포기하셨는데 심검의 경지에 닿은 것인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가문의 비기인 ‘심검’이 아크튜러스의 장남에게 전수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 사실을 드뇌브 후작도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몬은 매우 우연한 계기로 ‘심검’의 묘리를 체득한 것일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공자님께서는 오히려 케나드 공자께서 더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하셨지. 그렇다면 케나드 공자님은 대체 어떤 경지에 닿으신 것인가?’
지금까지 모셔 온 사령관 시몬은 조금도 말을 부풀리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을 검과 함께한 두 단장은 쉬이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라니에리가 눈에 보였다.
파월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라니에리 경. 그대는 알고 있었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자님이 어느 경지에 올라 계시는지 말이오.”
라니에리는 겸손히 웃었다. 그사이 같은 주제에 관심이 있던 한스 단장도 가까이 붙었다.
“저는 무예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래서 공자님께 매번 잔소리를 듣지요.”
“열병을 앓고 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하나는 분명히 압니다.”
“말하시오.”
“공자님께서 아주 긴 꿈을 꾸셨다는 것.”
“긴 꿈?”
두 기사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라니에리가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과 비견할 만한 대단한 꿈. 대륙의 역사와 여러 가문의 흥망성쇠를 담은 그런 꿈을 꾸셨다는 건 분명합니다.”
“허어…….”
라니에리도 이번 결투로 확실히 느끼는 바가 있었다.
‘공자님께서 알고 계신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평소 시몬은 자신이 회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 인간이 이룩한 문명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경지의 일이었다.
그래서 라니에리는 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나름의 답을 찾았다.
‘꿈에서 검식의 묘리를 체득하신 거야. 고대 영웅들은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지.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시몬이 열병을 앓았던 것도, 그리고 지금까지 해 왔던 기적 같은 행적도 모두 설명이 된다.
“그 꿈속에서 어떤 기연을 얻으신 게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없을 겁니다.”
“경은 검술에 대해 잘 모르겠지. 방금 공자께서 쓰신 검식은 아크튜러스 검식의 최종 단계요.”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군요.”
“혹시 주군께서 공자께 전수하신 것이오?”
“아뇨.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열병을 앓기 전의 행보는 제가 다 알고 있고, 그 이후로는 훈련을 거의 하지 않으셨으니까 말입니다.”
라니에리가 확인차 한스를 응시했다. 시몬의 훈련 파트너였던 그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가…….”
결국 두 기사단장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시몬이 기연을 얻어 아크튜러스 검식을 모두 마스터했다고.
“이 일을 어서 주군께 알려야 할 것 같소.”
“알리는 것은 좋지만 당분간 병사들에겐 공표하지 않는 걸 권유드립니다. 방심은 뜻하지 않은 사고를 일으키는 법이고, 무엇보다도 공자께서 계획하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알겠소.”
“입단속 잘 시키지.”
두 기사가 돌아섰다. 파월과 한스는 어려서부터 함께 검을 수련한 사이였다. 그래서 뜻이 잘 통했다.
“한스. 나는 시몬 공자님이 왜 후계를 잇지 않으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뭐라 생각하나?”
“검선이 되기 위해서가 아닐까?”
검선.
말 그대로 검의 신선이다. 검의 극의에 오르기 위해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사람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버려야 한다고 전해진다. 세상의 모든 미련과 잡념을 버려야 비로소 검과 한 몸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최근 시몬을 여러 차례 모셨던 입장인 한스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시몬은 오히려 속세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은 여인도 만났다.
“으음…… 좀 더 지켜보자고. 지금은 전쟁에 집중할 때이니.”
“자네 말이 맞네. 참, 주군께 보낼 전령은?”
“내가 보내지.”
“꼭 밀봉하게. 라니에리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니.”
“그 정도는 알고 있네!”
그렇게 시몬에 관한 오해가 깊어지는 사이, 뮬라타의 목에 검을 들이댄 당사자는 그를 열심히 조롱하고 있었다.
『오크의 대족장도 별 볼 일 없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은 승리라 그런지 시시해.』
『크르르르…….』
『백 번 도전해도 너는 날 이길 수 없다. 돌아가라.』
이번에도 시몬은 검을 거두었다. 그렇게 돌아가려고 하자 뮬라타가 벌떡 일어났다.
『대체 왜 날 죽이지 않는 거냐!』
『너를 살려 보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이유?』
돌아본 시몬이 씨익 웃었다.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더 강한 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나와서 나를 상대해 보라고. 나 시몬은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네 목숨은 딱 이 정도 가치야.』
『이놈……!』
『농담 아니야. 가서 전하라고 살려 준 거다.』
그렇게 시몬은 뮬라타의 속을 박박 긁어 놓고는 다시 본진으로 복귀했다.
기사들의 환호를 물리치고 막사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공자님.”
“들어와.”
라니에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시몬은 누워서 편히 쉬고 있었다.
“아까 두 단장께서 이야기하더군요. 공자님께서 아크튜러스 검식의 최종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이죠.”
“오, 짜식들. 그래도 밥만 축내는 건 아니었네?”
“주군께 전령이 출발했다 합니다. 의도하신 일이셨겠지요?”
시몬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어느 수준에 있다는 걸 알릴 필요는 있거든.”
“이것으로 계승전에서 케나드 공자님께 패하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게 된 것 같군요.”
“왜?”
“그야, 케나드 공자님은 아직 그 단계에 접어들지 못하셨을 테니까요.”
“그렇구나.”
시몬은 무책임하게 한마디 내뱉더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라니에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시몬의 명치를 졸라 세게 때리고 싶었다는 드비안느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바로 그때.
“사령관님!”
기사 하나가 급하게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