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꿈보다 해몽 (1)
잠시 후, 케나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라니에리는 두 사람이 편히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시몬은 지나치게 깍듯해진 케나드의 태도를 지적하려다가 말았다.
분명 이곳은 전장이고, 자신은 사령관을 따르는 입장이니 예를 차리는 게 당연하다고 답할 것이다.
한숨을 내쉬며 시몬이 말했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읊어 봐.”
멍한 표정을 짓던 케나드가 흠칫 놀라곤 차려 자세를 취했다.
“형님은 우리 명예로운 아크튜러스의 후계자이자 위대하신 군단 사령관이십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예?”
“좀 더 사적인 거 말이야.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거야.”
“그야…… 형님이시죠.”
시몬은 이마를 짚었다.
케나드는 절대적으로 자신을 따랐다. 동생이 아니라 추종자에 가깝다는 라니에리의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질문을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에게 좋은 형님이냐?”
“그럼요. 멋진 형님이고, 제가 본받고 싶은 형님이기도 합니다!”
“그래. 고맙다.”
굳이 묻지 않아도 동생의 마음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왜 불렀는지, 동생의 궁금증을 풀어 줄 때가 되었다.
“실은 너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
“하지 않은 말이요?”
“좀 심각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에겐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케나드의 허리에 힘이 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시몬은 손을 내저으며 편히 앉으라 권했다.
“아닙니다. 저는 들을 준비가 됐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내가 안 편해서 그런다니까?”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다고!”
시몬이 버럭 화를 내자 그제야 케나드가 눈치를 살살 보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제야 시몬이 입을 열었다.
“나는 회귀했다.”
그런데 케나드의 반응이 애매하다.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시몬을 바라볼 뿐이다.
오히려 궁금해진 것은 케나드가 아니라 시몬이었다.
“왜 놀라지 않지?”
“그……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귀라는 개념이 다시 과거로 돌아오셨다는 말씀이 맞습니까?”
“그래. 맞다.”
다시금 확인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케나드는 침착했다. 지나칠 정도로.
“실은 전에 아버지께 살짝 들었습니다. 형님께서 긴 악몽을 꾸신 것 같다고요.”
“그 말만 하셨어?”
“당연히 아니죠! 형님께서 제국군의 선봉에 서서 대륙 통일에 앞장섰고, 그리고 우리 가문을 공작가로 승작시켰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고도 말씀하셨지요!”
그 말과 동시에 케나드의 어깨가 펴졌다. 멋진 형을 둬서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런데도 여전히 표정이 평온해 보였다.
시몬에게 잠시 혼란이 찾아왔다.
“케나드. 아버지에게 그 말을 듣고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냐?”
“앞으로 당연히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형님의 지략과 무용은 누구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시니까 말이지요. 이번 일대일 전투를 보고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형님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요!”
한마디로, 앞으로 일어날 일이니까 굳이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시몬은, 새로운 강자가 출연한 것 같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진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넌 내가 회귀했다는 걸 인정해 주는 거야?”
“어…… 그게……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말씀드리면…….”
“조심스럽게 말 안 해도 된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긴 꿈을 현실처럼 받아들이신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드뇌브 후작이 세운 ‘꿈’ 프레임이 제법 설득력을 얻고 있는 모양이다.
시몬은 낙담했다.
하긴,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믿어 주는 사람이 대륙에 한 명이나 있으면 다행이겠지. 소꿉친구 둘도 헛소리로 치부하는 마당에.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형님께서 현실이라고 하면 저는 그렇게 믿겠습니다. 가끔 꿈과 현실이 모호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케나드가 애정 어린 눈을 빛냈다. 시몬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
“아니…… 아, 됐다. 그건 그만 이야기하고,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후계자 건도 들었겠지?”
“예.”
“내가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들었을 거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 반응이 없어?”
시몬은 한편으로 아쉽기도 했다. 그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달려와서 제발 그 발언을 철회해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했었어야 했나요?”
“당연한 거 아냐? 내가 가문을 잇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연히 너를 생각할 텐데. 가신들도 죄다 너에게 들러붙을 거고.”
“그건 아닙니다.”
케나드는 단호했다. 이렇게 앞에서 단호하게 말하는 건 또 처음이다.
“아크튜러스의 정통한 후계자는 오로지 형님뿐입니다. 후계전을 여신 것도 다 형님의 책략이잖습니까?”
“책략?”
시몬은 갑자기 마음 한편이 불안해졌다. 대체 이 순진한 동생이 뭘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제가 알기로 우리 가문에서 마지막 후계전이 열린 건 백 년도 전의 일입니다. 최근 형님이 큰 병을 앓기도 하셨고, 또 남부의 상황이 어수선하니까, 형님께서 아버지께 간청해서 승계전을 여신 거죠. 아크튜러스의 진정한 주인의 힘을 보여 주기 위해서!”
“야.”
“……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진짜.”
시몬이 정색하자 케나드가 당황했다. 좋은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어느 부분에서 시몬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설마 남부의 어수선한 상황이 그렇게 연결될 줄이야.’
열병은 그렇다 칠 수 있다. 건강은 후계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
하지만 남부의 상황은 황태자와 황녀, 그리고 알퐁스 백작가가 꾸며낸 책략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방계의 모의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막을 모르면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지. 완전 헛다리 짚었는데?’
어디서부터 바로잡아 줘야 하나 고민이 길어졌다. 그럴수록 케나드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케나드야.”
“예, 예!”
“내가 화난 건 아니고. 좀 어이없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라.”
“오, 다행입니다…….”
“네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방계에서 뭔가 책략을 꾸미는 기미는 없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럼 대체 왜……?”
“아크튜러스의 가주는 네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케나드가 벌떡 일어났다.
“형님! 그건 안 될 일입니다. 어떻게 형님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제가 가문을 잇겠습니까?”
“아, 멀쩡해서? 그럼 잠깐 기다려. 가서 팔이라도 하나 자르고 올 테니까.”
“형니임!”
일어난 시몬이 케나드를 위압적으로 내려보았다.
“케나드 너, 나를 존경한다고 했지?”
“예…….”
“그럼 내 말 들어.”
“예……?”
“가문을 잇는 거야.”
“제가 어떻게…….”
“저지르는 거라고.”
“제가 어떻…….”
“제가 어떻게가 아니고! 어? 제가 잇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이지!”
“제가 어떻…… 아니, 제가 잇…… 아니…… 제가 어떻…… 아아?”
큰 혼란이 온 것 같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시몬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차피 승계전에서 이기는 건 너다. 아버지도 너를 후계자로 인정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정신 차리고 보면 그렇게 되어 있을 테니까.”
“하, 하지만 저는 형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있어. 그 방법이라면.”
“형님…….”
“전생에서는 내가 가문을 이었다. 그러다 보니 널 불행하게 만들었지. 춥고 척박한 북방으로 보내서 평생 이민족과 싸우게 만들었다. 난 그런 형이었던 거야.”
그것 외에도 시몬은 전생에서 있었던 일을 케나드에게 차근히 들려주었다.
자기가 해 왔던 것들. 그리고 후회했던 일들.
그것들이 하나둘 모여 이런 결론이 나왔다.
“나는 그 짓을 다시금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너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다. 너도 가문의 영광을 누리며 살 자격이 있으니까.”
“형님…….”
케나드는 진심으로 감격한 모양인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시몬은 동생의 등을 따뜻하게 다독여 주었다.
그런데 그때.
“형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형님은 전생에 가문을 잇고 우리 가문을 공작가로 키워 내셨다고 하셨죠?”
“그래. 그러니까 너한테 검식을 가르쳐 줄 수도 있었던 거지.”
“그렇다면…… 오히려 형님이 더 가문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력자니까요. 기사를 뽑을 때도 경력을 좀 보지 않습니까?”
“…….”
“농담입니다.”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이렇게 동생과 오래도록 떠든 건 오랜만인 듯한 느낌이라서.
“형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는 형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고맙구나.”
“하지만 어디까지나 승계전에서 제가 이겼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면 충분하다.
시몬은 한시름 덜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아버지께 눈속임은 통하지 않을 겁니다.”
“눈속임 같은 거 안 해. 나는 그저 내가 아버지께 배운 것으로 최선을 다할 거라서.”
시몬이 씨익 웃자 케나드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일을 제대로 꾸미고 있는 느낌이었다.
* * *
다음 날, 망루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보고가 이어졌다.
“사령관님! 오크족 전사가 와서 또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야, 부지런하네. 아침부터. 뮬라타야?”
“예! 어제와 같은 오크입니다!”
다른 오크가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뮬라타가 다시 나왔다는 건, 아직 부족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건가.’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첫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물러났다.
그리고 두 번째 설욕전에서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패하게 된다면 세 번이나 적에게 등을 보인 셈이 된다.
‘뮬라타가 권력을 잃는다면 오크족이 또다시 분열되겠지만,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지.’
기지개를 켠 시몬은 갑옷을 입으려다 말았다. 대신 망토만 걸치고 검을 허리춤에 걸었다.
그 상태로 본진 밖으로 나가려 하자 기사들이 기겁했다.
“공자님! 갑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투구는 또 어쩌셨습니까?”
“귀찮아서.”
“공자님!”
“실용주의 몰라? 공부 좀 해라.”
시몬은 기사들의 손을 뿌리치며 밖으로 나갔다.
또다시 일대일 결투가 시작된다는 소식이 퍼지자 모든 기사가 망루로 뛰어 올라왔다. 알데바란 측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크 측 대군도 몰려나왔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대족장의 기세를 올렸다.
『크르르…….』
누런 송곳니를 드러내며, 뮬라타가 무서운 눈으로 시몬을 노려보았다.
『결투다. 애송이!』
『누가 누굴 보고 애송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약한 놈이랑은 안 싸운다. 좀 더 강한 전사를 데려오도록.』
『그 잘난 입을 찢어 주지!』
쿵! 쿵! 쿵! 쿠구궁!
뮬라타가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진동이 울릴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자랑했다.
이번에 들고나온 무기는 거대한 도끼.
오크는 크고 무거운 무기를 잘 다룬다. 압도적인 근력으로 모든 단점을 상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봐야 오크는 오크일 뿐이지.”
그렇게 뇌까린 시몬이 검을 꺼냈다.
“어제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슬슬 보여 줄 때가 되었군.”
처억!
시몬이 검세를 취했다.
그의 검 끝엔 아크튜러스의 최종 검식, ‘심검’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