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격돌 (4)
『닥쳐라!』
당연히 뮬라타는 화가 났다.
피부도 허옇고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일 뿐인데, 몸놀림이 범상치 않았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들고 있는 마울이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럽다.
그렇다고 무기를 바꿀 수도 없는 상황.
『운이 좋아서 공격이 한 번 통했을 뿐이다!』
『오크들은 수에 대한 관념이 없나?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야. 네 애완견 엉덩이 찔리고 도망간 거 못 봤어?』
『크으으…….』
시몬은 생글생글 웃으며 계속 도발을 넣었다.
『내 동생한테 다치고 나서 군대를 물린 오크치고는 너무 변명이 초라하잖아. 쯧, 너희들이 말하는 전사의 명예라는 것이 고작 그것뿐인가? 대족장도 아무나 하는 건가 보네.』
『이번엔 다를 것이다!』
뮬라타의 기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크르르!』
두 손으로 마울을 쥔 그가 달려들었다. 무척 빠르고, 날렵했다. 관절 하나하나에, 근육 하나하나에 분노가 서린 듯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어느새 시몬의 머리를 노리는 뮬라타.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시몬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너무 느리다니까 그러네.』
이번에도 뮬라타는 공격에 실패했다.
『크아아아!』
시몬이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의 표정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진보된 아크튜러스 체술 덕분이다.
체술은 말 그대로 몸을 움직이는 기술.
전생에 그것을 완벽히 마스터한 시몬에게 이 정도의 공격을 피하는 건 별로 큰일도 아니었다.
‘좀 어린 시절로 회귀했다면 이렇게 마음껏 쓸 수는 없었겠지만, 지금 몸이라면 다르지.’
시몬의 나이는 18세. 물리적으로는 거의 성장이 끝날 시기다.
그래서 시몬은 더욱 자유롭게 체술을 발휘했고, 뮬라타는 마울을 휘두르는 족족 땅을 때리거나 허공을 가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헛방이 계속 나왔다.
뮬라타는 분개했다.
『비겁한 인간! 전사답게 정정당당히 승부해라!』
『이기는 게 중요하지 뭔 정정당당을 찾아?』
『크르르! 무기를 들고 맞서라!』
『무기? 그게 너한테 더 불리할 텐데. 뭐, 먼 길 온 손님이니 해 달라면 해 줘야지.』
시몬은 검을 들었다.
뮬라타는 이제야 한 방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달려들었는데, 애석하게도 그보다 시몬이 훨씬 더 빨랐다.
쐐액!
선공은 시몬의 몫이었다.
『허윽!』
뮬라타는 마울을 내리치기도 전에 손을 멈춰야 했다. 차갑고 따가운 것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놀랍게도 시몬의 검 끝이 뮬라타의 목에 닿아 있었다.
숱한 사냥과 전투로 단련된 뮬라타의 동체 시력도 잡아내지 못한, 매우 빠른 공격이었다.
『크으…….』
조금만 움직이면 그대로 목이 잘려 나갈 상황.
누가 보더라도 시몬의 승리다.
『항복하지?』
『위대한 오크는 항복하지 않는다! 패하면…… 죽을 뿐!』
『네가 이대로 죽어 버리면 뒤에 서 있는 병풍들이 슬퍼할 텐데.』
힐끗 뒤를 바라보니 오크 진영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당장 달려와서 구하기라도 하려는 듯, 오크들이 늑대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뮬라타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그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Haltu!”
아주 큰 목소리로 뮬라타가 외치자, 오크 진영의 혼란이 잦아들었다.
멈추라고 외친 것이었다.
『이야, 상황 파악 빠른데?』
『죽여라.』
뮬라타는 눈을 감고 최후를 준비했다.
하지만 시몬은 그의 목을 찌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하나 알려 주는데, 위대한 오크는 상대의 실력도 모르고 멍청하게 맞서 싸우다 죽는 그런 오크가 아니야. 부족이 처한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해 주는 존재여야 하지.』
『슬기롭게……? 그게 무슨 말인가?』
『목숨을 아끼라는 말이야. 뭐, 아직 너에게 말해 주기엔 이른 것 같지만.』
시몬은 검을 거둠과 동시에 오러가 실린 발길질로 뮬라타를 밀어 찼다.
대족장은 꼴사납게도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크윽!』
『돌아가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는 놈 잡아서 좋을 것 없으니.』
『인정할 수 없다! 인간!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뮬라타가 다시금 마울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누런 송곳니를 드러냈다.
『싸우긴 뭘 싸워. 무기 안 내려놔? 넌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시몬은 홱 돌아섰다.
“형님! 등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공자니이임!”
사방에서 기사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시몬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힘을 숭상하는 오크족, 그것도 대족장급 전사라면 패배를 인정해야 할 터. 그래서 부하들에게 멈추라고 소리친 것이다.
오크 전사라면 스스로의 힘으로 매듭지어야 하는 거니까.
‘놈은 절대 나를 공격하지 못한다.’
시몬의 예상대로 뮬라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오크 진영으로 돌아가 버렸다.
“형님!”
“오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시몬이 귀환하자 기사들이 모여들어 환호했다.
다들 기쁨 반, 의아함 반 이런 표정이었다. 시몬이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뮬라타는 제1기사단장 파월도, 제2기사단장 한스도 제대로 붙는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
그런 그를 거의 가지고 놀다시피 이겨 버렸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형님! 놈을 그렇게 쉽게 상대하시다니! 가문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였습니다!”
케나드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시몬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굳이 역사에 남길 거 없다. 앞으로 몇 번 더 있을 거니까.”
“예? 몇 번 더 있다뇨?”
“놈이 또 덤빈다는 말씀이십니까?”
기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시몬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자신의 새로운 계획을 그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기사들이 시몬의 행동에 납득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적의 대장을 사로잡을 좋은 기회였는데 시몬이 그냥 놔줬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어떤 불만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며칠 뒤면 내 행동이 옳았다는 걸 깨달을 테니 조금만 참도록. 다들 돌아가 자리를 지켜라. 오크 놈들이 꽤 화가 났을 테니까.”
“예!”
기사들이 각자 자리로 흩어지고, 시몬은 막사로 돌아왔다. 그러자 라니에리가 따라 들어왔다.
“케나드 공자님도 상당히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공자님은 차원이 다른 느낌입니다. 그간 마음 졸였던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네요.”
“이야. 라니에리 선생 입에서 반성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보다 무예의 무 자도 모르는 네가 평가할 만한 일인가?”
“그래서 느낌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시몬은 픽 웃고는 허리춤에 걸린 무기를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갑옷도 분리해 옆으로 내려 두었다.
평소였다면 갑옷 정도는 입고 있으라고 잔소리를 할 타이밍.
하지만 라니에리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시몬이 보여 준 대단한 무위라면 갑옷은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절멸이 아니라 굴복시키는 걸 택하신 것 같더군요.”
“어떻게 알았어?”
“아까 힌트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치명타를 날리거나, 아니면 굴복시켜야 한다고 말이죠.”
“그건 그냥 해 본 말이었고.”
“게다가 사로잡지도 않고 풀어 주셨지요. 기사들이 불만을 품을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 말은, 몇 번이고 놈의 도전을 받아 주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더군요.”
“정확하군.”
라니에리는 오랜만에 밥값을 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시몬에게 끌려다니기만 했기 때문에.
시몬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물통을 집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갈증이 싹 사라졌다.
“먼 동방 지역에 내려오던 전설이 떠오르는군요. 야만족 족장을 몇 번이나 사로잡고 풀어 주면서 그들의 진정한 신임을 얻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딱히 그 전설에 영감을 받은 건 아냐.”
“그럼요?”
“그냥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거지.”
회귀하고 나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이라면 싸워서라도 빼앗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굳이 쟁취하지 않아도 잘 사는 방법이 있지 않나를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아마도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욕심은 바로 아크튜러스 가주라는 자리.
당연히, 회귀론을 지지하지 않는 라니에리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굴복시키는 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제가 아는 오크족 전사라면 죽을 때까지 계속 도전을 해 올 것 같습니다만.”
“나도 몰라. 그냥 해 보는 거지.”
“확실히, 놈들을 아크튜러스로 편입시킬 수 있다면 매우 큰 전력이 될 것입니다.”
라니에리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시몬이 생각한 것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이대로 결투가 계속된다면 군대는 쉴 수 있고 피해가 더는 누적되지 않겠지요. 거기에 오크족은 상비군처럼 활용될 수 있습니다. 사이가 좋아지면 그들의 전투 기법을 배울 수도 있겠지요.”
시몬이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반짝였다.
“생각보다 똑똑했군.”
“공자님께 그런 말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군요. 기뻐해야 하는 걸까요?”
“놈들한테 필요한 게 뭔 줄 알아?”
“비옥한 땅입니다.”
시몬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놈들이 호전적이었던 건 아냐.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지. 싸우지 않고선 살아남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으니까.”
“그럼 그들에게 정착지를 제공하실 계획이십니까?”
“이야기가 잘 풀리면 그렇게 되겠지.”
“반대가 심할 텐데요.”
부작용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오크를 영지 안에 주둔시키면, 마치 품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을 테니까.
“어차피 놈들이 필요한 건 식량이야. 식량 문제만 해결되면 돼. 나머지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 불과하고.”
“정말 공자님의 대범함은 따라갈 수가 없는 것 같군요.”
“대범함이라기보단,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잘 활용하는 것에 불과하지.”
이 순간만큼은 라니에리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몬은 정말 인생을 한 번 더 살아 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오크에 대한 것이 그랬다. 어쭙잖게 주워들은 지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보다 케나드는 별말 없었어?”
“당연히 공자님 칭찬만 하셨죠.”
“안 들어도 알 것 같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만 열 번은 하신 것 같습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동생이 아니라 추종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이상하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후계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더라고.”
이제 시몬이 가문을 잇지 않겠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그런데 케나드는 그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
장남이 잇지 않으면 자연스레 주목받는 것이 차남인데도 말이다.
실제로 수도에서는 가신들이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줄을 잘 서지 않으면 말년이 피곤해지는 상황이 도래했으니까.
“신경 쓰일 만한 일이군요. 하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고 계시진 않을 것 같습니다. 공자님을 향한 케나드 공자님의 마음이야말로 진심이니까요.”
“너도 그렇게 생각해?”
“공자님만큼 케나드 공자님을 오래 보아 왔습니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니에리가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문득 추운 북방에서 이민족과 싸우다 쓸쓸히 죽어 가야 했던 동생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번만큼은 케나드가 주인공인 세상을 만들어 줘야지. 따뜻한 곳에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게…….’
시몬이 눈을 떴다.
“라니에리. 가서 케나드 좀 불러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