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격돌 (2)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거대한 마울을 들고 있던 뮬라타는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곳엔 케나드가 서 있었다.
“Krrrrrr…….”
굵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리는 뮬라타.
실로 한 마리의 거대한 야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형님의 말씀대로야.’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오크 부족을 하나로 통합한 시대의 영웅.
대족장 뮬라타는 겉으로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오크였다.
몸집은 거의 3미터에 육박했고, 양손으로 들어도 힘겨워 보일 거대한 마울을 한 손으로 휘젓고 있었다.
‘생포할 수 있을까?’
시몬은 케나드에게 가능하면 뮬라타를 생포해 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두고 보니, 쉽게 생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반드시 해낸다.’
지이잉!
케나드는 남은 오러를 끌어올렸다.
오러는 검신에도, 그리고 왼손으로 쥐고 있던 방패에도 맺혔다.
‘오러가 얼마 남지 않았어. 이대론 오래 싸울 순 없다.’
물아일체의 경지에 들어섰을 때 정말 수많은 오크를 베어 냈다. 덕분에 수세에 몰리던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많은 수의 오크 샤먼들이 전사했고, 그보다 많은 수의 오크 전사들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만큼 오러가 많이 소진되기도 했다.
오러의 양은 유한한 것.
이대로 전투를 멈추고 심법으로 채워 주지 않으면 맞서 싸우기 힘들다. 하물며 대족장을 상대하기에는 무리다.
“금방 끝내 주마.”
“Tapa see!”
동시에 뮬라타도 적의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선공은 뮬라타의 몫이었다.
콰아앙!
거대한 마울의 머리가 방패를 내리찍었다. 엄청난 격통이 왼팔을 엄습했다.
“크윽.”
마치 멱살을 잡힌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만약 오러가 아니었다면, 단단해 보이던 이 방패도 종잇장처럼 우그러들었을 것이다.
뒤로 주춤 물러난 케나드는 여전히 방어 태세를 취했다.
“Verdkorno!”
쾅! 콰광!
뮬라타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마울을 휘둘러 댔다.
이제는 양손으로 쥐고 힘껏 내리쳤다.
부우웅!
오러만으로는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케나드는 방패를 버리고 몸을 날렸다.
쿵!
마울이 방금까지 케나드가 있던 땅을 찧었다. 땅이 갈라졌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주변 땅을 흔들 정도의 괴력이었다.
“Timema unu!”
뮬라타가 케나드를 도발했다.
하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겁 많은 놈이라는 뜻은 전해지지 않았다.
다시금 뮬라타가 움직였다.
위력적으로 휘둘러지는 거대한 마울.
부우웅!
오러를 아껴야 한다.
거기에 방패까지 버린 상황이었다. 이제는 피하거나 검으로 비껴 낼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케나드.
바로 그때 기적처럼 과거의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형님이 보여 주신 그때 그 체술. 그걸 이용한다면……!’
진보된 아크튜러스 체술을 완벽히 익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케나드는 시몬의 가르침을, 물 만난 스펀지처럼 완전히 빨아들였다.
그래서 일전에 시몬이 보여 주었던 그 놀라운 체술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사삭!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마울을 살짝 피했다.
‘마울은 둔한 무기야. 필연적으로 틈이 생길 거다. 그 틈을 노리고 파고든다면 승산은 있어.’
단 한 방.
모든 오러를 끌어올린 그 한 방을 뮬라타에게 찔러 넣기로 했다.
턱!
뒷걸음질 치며 피하던 케나드는 거대한 바위까지 몰리게 되었다. 찰나의 순간 뮬라타는 사정 봐주지 않고 마울을 내리찍었다.
콰아앙!
바위가 부서져 파편이 휘날렸다.
하지만 케나드는 이전보다 수월하게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이제는 뭔지 알 것 같아. 형님이 그때 보여 주셨던 그 체술의 비밀을.’
시몬의 움직임을 본 것만으로도 회피술을 익힌 것이다.
이후로도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 낸 케나드가 오러를 끌어모아 검을 내질렀다.
푹!
그런데 갑옷과 질긴 피부에 막혀 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Porko!”
거칠게 윽박지른 뮬라타는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케나드의 검을 움켜쥐더니 쑥 뽑아 버렸다.
“크윽!”
실로 괴물 같은 악력이었다.
손에서는 녹색 피가 철철 흘렀지만, 뮬라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뮬라타는 무기를 다시 집지 않았다.
두 손을 꽉 움켜쥐더니 케나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쿵!
주먹이 검에 막혔다.
이번엔 케나드 차례였다. 그는 차분히 아크튜러스 검법의 초식을 전개했다.
‘베어 낸다.’
사악!
검이 횡으로 그어지며 푸른 궤적을 남겼다.
텅!
오러가 서린 검이었는데도, 뮬라타는 가뿐히 주먹을 날려 검을 쳐 냈다. 뮬라타의 주먹에도 녹색 빛의 자연의 힘이 서려 있었다.
‘내려친다.’
쐐애액!
빠른 속도로 이어진 초식.
‘속도와 패도를 살려서.’
케나드의 검은 아크튜러스 검식의 기본 초식, 베어 내기에 이어 내려치기를 전개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눈속임이었다.
‘응용의 묘리를!’
내려치던 검을 잡아당긴 케나드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푸우우욱!
‘이거다!’
검 끝이 파고드는 감각이 아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실제로 찔린 뮬라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Estas interese…….”
돌연 뮬라타가 씨익 웃었다.
놀라운 힘이 느껴졌다.
과한 오러의 사용 때문이었을까. 순간적으로 힘이 풀린 케나드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쑤욱!
가슴에 박힌 케나드의 검을 뽑아낸 뮬라타는, 쇠붙이를 집어 던지고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낸 인간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이 치욕적인 순간을 잊지 않겠다는 것 같은 강렬한 눈빛.
이윽고 뮬라타가 자신의 무기를 챙겨 홱 돌아섰다.
“기다려라!”
케나드는 떨어진 검을 다시 줍곤 몸을 일으켰다.
그때, 한 무리의 기사들이 몰려왔다.
“공자님!”
“위험합니다! 놈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뮬라타는 이미 오크들 사이로 사라진 상황. 오크들은 전투를 멈추고 케나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전투가 중지되었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합군의 병사들도 천천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그저 한 것이라곤 뮬라타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힌 것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때 저 너머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retiriĝi!”
“retiriĝi!”
“retiriĝi!”
사방에서 오크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크들이 돌아온 길을 따라 물러나기 시작했다.
케나드를 포함한 연합군의 기사들은 오크가 자의적으로 물러나는 장면을 처음 보았다.
그들은 한동안 그 장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추격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때 기사 하나가 제언했다. 하지만 케나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피해도 크다. 놈들이 왜 물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겠어. 놈들을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정말이지 질긴 놈들이네요.”
“후우, 그보다 큰일이군. 형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이행하지 못했는데…….”
시몬은 케나드에게 명했다.
뮬라타를 생포해 오라고.
그때 제1기사단장 파월이 검을 검집으로 갈무리하며 합류했다.
“공자님. 또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때는 저희도 돕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케나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녹색 피로 얼룩진 붉은 망토가 펄럭이며 그의 몸을 감쌌다.
* * *
베이론 평원에서의 대전이 끝나고, 며칠째 오크들은 잠잠했다.
케나드는 정석대로 정찰병을 꾸준히 보냈다. 그러나 오크족의 진영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이번 정찰병의 보고도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중얼거린 케나드는 손을 저어 정찰병을 물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1기사단 파월 단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쪽 사기가 오른 것을 의식하는 것 아닐까요? 시간을 끌어 사기가 떨어질 때쯤 다시 공격할 것 같습니다만.”
“일리가 있는 말이야. 우리 쪽 군량은 얼마나 남았지?”
“보름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보급이 끊길 위험은 없으니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샤먼까지 동원했다면 무슨 계략을 펼칠지 알 수 없어. 놈들은 짐승이 아니다. 지능을 가진 이종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예. 공자님.”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제2기사단장 한스가 한마디 했다.
“이대로 놈들이 그냥 물러가면 좋겠습니다. 놈들도 베이론 평원에서 병력을 많이 잃지 않았습니까?”
케나드가 무어라 대답하려던 바로 그때, 막사의 입구가 확 젖혀지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썩 좋은 생각이 아니야. 한스 경.”
“형님!”
“공자님!”
케나드도, 기사들도 깜짝 놀랐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시몬이었기 때문이다. 라니에리와 로빈도 함께였다.
“여기에서 치명타를 날리지 않으면 놈들은 다시 세력을 모아 북진할 거다. 최대한 살려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해. 아니면 철저히 무력으로 굴복시키거나. 그래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지.”
“과연, 그렇군요.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보다 케나드, 멋지게 잘 싸웠다면서?”
시몬이 웃으며 케나드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하지만 동생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형님의 명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놈을 상처입히는 데에는 성공했는데, 생포하진 못했네요.”
“샤먼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쉽지 않은 전투였겠지.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구나.”
“형님.”
그 부분은 전생과 조금 다른 일이었다.
‘내 기억으로 그때는 샤먼들이 이리 많지는 않았었는데…….’
베이론 평원으로 내려오며 접한 정보로는 꽤 많은 샤먼들이 전투에 동원되었다.
‘뭔가 변수가 생긴 건가.’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하면 뮬라타 생포를 케나드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새로운 계획이 떠오르기도 했고.’
케나드가 물었다.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니? 동생이 걱정되어 온 형에게 서운한 말을 하는군.”
“아뇨, 그게 아니고…….”
“군량을 좀 가져왔다. 알퐁스에서 군수 물자를 지원해 줬거든. 무기도 좀 챙겨 왔으니 필요하면 나눠서 써라.”
“예!”
케나드는 자연스레 부관 자리로 옮겼다.
아크튜러스의 사령관이 온 이상 자리를 시몬에게 넘겨줘야 했다.
지도 앞에 선 시몬이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우리 쪽 피해는?”
“천여 명이 죽고 이천 정도가 다쳤습니다.”
“끔찍하군.”
연합군의 병력은 2만에 달했다. 오크보다 두 배는 많았으나 피해는 오히려 이쪽이 더 컸다.
“뮬라타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했지? 꽤 깊숙이.”
“맞습니다. 왼쪽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그냥 돌아갔다고?”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더니, 뭐라고 외치면서 모두 퇴각했습니다.”
“대족장이 상처를 입었으니 전투에서 패한 거라 여겼을 거야.”
“예?”
뜻밖의 해석에 기사들이 놀랐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것은 라니에리였다.
시몬이 오크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은 대규모 회전이 아니라 일대일 결투가 될 거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뮬라타가 케나드 너에게 결투를 청하겠지. 그것이 오크들의 방식이다.”
“얼마든지 싸우겠습니다. 놈에게 지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시몬이 손을 들어 막았다.
“아니, 이 싸움은 내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