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알퐁스 백작가 (2)
그 비둘기는 라니에리가 평소에 애용하던 전서구였다. 무슨 소식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팔에 앉은 비둘기가 얌전해졌다. 라니에리는 비둘기를 한번 쓰다듬어 주곤 다리에 묶여 있는 통에서 쪽지를 꺼냈다.
“마침 수도에서 소식이 왔군요. 루아 아가씨가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오, 그래?”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마이너 마을까지 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서 루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설마 소식이 그게 끝은 아니겠지?”
“새집이 참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서둘러 가 보시는 게 좋겠군요.”
“그렇다고 바로 갈 수는 없지.”
시몬은 잘 참아 내었다. 마음만은 이미 아크튜러스의 수도로 출발한 상황이었다.
라니에리는 먼 길 오느라 고생한 비둘기를 위해 모이를 먹여 주었다.
“앞으로 루아 양과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 당연한 걸 물어? 결혼해서 애 낳고 잘 먹고 잘살아야지.”
“황녀님과의 약혼은 성립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주께서 두 분의 관계를 허락하실지 걱정이군요.”
엄청난 반대가 있을 거라는 건 시몬도 예상하고 있다.
아무리 드뇌브 후작이 약속한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켜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한미한 준남작가라면 모를까, 아크튜러스는 제국의 후작가다.
하지만 시몬은 결국 친모인 헤라만 잘 설득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아버지가 반대할 명분은 없거든.’
이올린의 친모이자 둘째 부인인 미온도 평민 출신이니까.
만약 이 관계를 반대한다면 누워서 침을 뱉는 것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네 말대로 어차피 황녀와의 관계는 끝이야. 지금 문제는 허락이 아니라 황녀와 안전 이별을 할 수 있냐는 건데…….”
“방계 쪽에 붙는 걸 원하고 계신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남부에서 아예 관심을 끊게 만드는 게 가장 좋긴 하지.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제국이 분열되지 않는 한.”
“가장 좋은 건 역시 알퐁스 가문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것밖에 없겠지요.”
시몬은 살짝 놀랐다.
“웬일이야? 평화주의자께서 전쟁 이야기를 다 하고?”
“전쟁만이 귀족 가문을 몰락시킬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자멸시키는 방법도 있지요.”
“어떻게?”
“가장 이상적인 건 우리와 알데바란이 항구적인 동맹 관계를 맺는 겁니다. 그 후 지속적으로 압박을 넣으면 이도 저도 못 하겠지요.”
“으음.”
고민해 볼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라니에리가 말한 항구적인 동맹을 맺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번 연합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다고 하더라도 두 가문 사이에 쌓였던 과거를 지우는 건 어려울 터.
그때 시몬은 문득 이상한 생각을 떠올렸다.
“라니에리. 너 혹시 진 경에게 반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갑자기 또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즘 서로 나누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설마 벌써 했냐?”
“뭘 합니까?”
“그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 골수 아크튜러스파가 알데바란하고 항구적인 동맹 어쩌구 하니까 사상이 의심되잖아.”
라니에리는 이마를 짚었다. 잘 나가다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었다.
“저는 공자님께서 빠르고 확실한 은퇴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그건 내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그러셨다면 다행입니다.”
비둘기를 쓰다듬은 라니에리는 다시 창밖으로 날려 주었다. 다음에 돌아올 때는 더 좋은 소식을 가져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 * *
생각보다 알퐁스 백작가의 대접은 나쁘지 않았다.
“오늘의 갑작스러운 만남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군요. 망망대해를 헤매다 빛나는 별 하나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시몬 공자.”
이 정도면 거의 극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몬은 인생 2회 차의 시니어였다. 이 정도 찬사에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크튜러스의 후계자가 온다는데 안 나올 수가 있어야지요? 정말 잘 왔습니다. 안 그래도 한번 초대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알퐁스 가문의 가주, 딜리토 백작은 피부가 창백한 남자였다. 굉장히 말랐고, 나른하면서도 신경질적인 분위기의 사람이었다.
‘아무에게나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방심했다가는 큰일 나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조금도 유쾌했던 기억이 없다.
딜리토 백작.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로 가문을 이은 운 좋은 사내.
실제로 보기에도 무척 젊어서, 누가 보면 알퐁스 가문의 대공자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각하. 부담스럽습니다.”
“가문을 이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입버릇처럼 굳어졌지 뭡니까? 양해해 주시지요. 자, 이쪽으로.”
딜리토는 시몬과 라니에리를 귀빈 대우했고, 둘을 안쪽으로 직접 안내했다.
“이곳이 알퐁스의 두 번째 성입니다. 본성은 따로 있는데 전시에만 사용하지요.”
“아주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멋지군요.”
“그러고 보니 아크튜러스엔 성이 없었지요?”
“있긴 합니다만 뭐 장식용이죠. 적들이 수도까지 진격해 올 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시몬은 자신감을 보였다. 아크튜러스 후작가의 강력한 군사력을 드러낸 것이다.
“하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군요. 가문이 세워진 이후로 그 누구의 도전도 용인하지 않았으니까.”
세 사람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딜리토 백작은 주변 사람을 모두 물렸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서로 원하지 않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요. 그대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유는 역시 남부의 일 때문이겠지요?”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오크족의 침공 때문이지요. 저는 이 자리에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 가문을 대표하여 찾아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으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병력까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전쟁을 수월하게 치를 수 있도록 보급 물자를 부탁드리죠.”
“보급 물자라.”
딜리토 백작이 난색을 표했다. 누가 봐도 주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순망치한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물론. 알데바란이라는 완충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 영지가 평화로운 것 정도는 알고 있지요.”
돌연, 딜리토 백작이 씨익 웃었다.
“그렇다고 그게 억울해서 이사 가거나 하진 않을 거 아닌지요?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렇게 받아들여야겠지요.”
“지원을 해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군요.”
“우리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사방에 몬스터들이 들끓고 있지요. 게다가 작년에 흉작이 찾아와 식량 사정도 좋지 않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시몬은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이 시기의 알퐁스 가문이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했는지는 시몬도 잘 알고 있었다.
몬스터는 엄살이고, 흉작은 눈속임이다.
애초에 알퐁스 가문이 부를 축적하는 주요 루트는 상업이었다.
영지가 황도와 남부를 잇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데다가, 여러 생산품이 황실 진상품으로 지정되어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황실의 외척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마시고 있더군요. 오면서 보았습니다.”
“아크튜러스에서 귀한 분이 온다는데 추한 모습을 보일 순 없지요.”
“가능하면 협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엇 때문에?”
더 활짝 웃으려던 딜리토 백작은, 씨익 웃는 시몬의 표정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때에 따라선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달라진단 말이지요?”
“Mi akceptas vian proponon!”
처음 듣는 언어로 말하는 시몬.
하지만 남부의 현자 라니에리는 그 언어가 무슨 언어인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설마…….”
시몬은 라니에리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각하.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셨습니까?”
“잘 모르겠군요. 북방의 이민족이 쓰는 언어인가? 아크튜러스의 대공자가 언어학에 관심이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오크어입니다.”
“뭣…….”
“너의 제안을 수락한다, 라는 뜻이지요.”
응접실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오크어를 빗대어 말했다. 그렇다면 무슨 제안이란 말인가?
딜리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저는 오크어에 능통합니다. 오크어에 능통한 사람은 아주 드문데, 귀족 중에서는 아예 없다시피 하죠. 일례로 여기 있는 라니에리. 남부를 대표하는 지식인입니다. 자네, 오크어 할 줄 아나?”
“못 합니다. 다른 사람이 흉내 내는 것을 몇 번 들었을 뿐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는 거죠. 즉, 저는 그쪽 지도자와 얼마든지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이라는 한마디가 이리도 무거운 것이었나, 딜리토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무슨 협상을?”
“뭐, 불가침 조약을 맺는 거죠. 때에 따라선 북쪽으로 길을 터 줄 수도 있고 말이죠. 그들이 원하는 건 비옥한 영토일 테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말이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제국의 안위를 위협한 역도로 몰릴 테니까 말이죠. 하지만 각하께서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계시는지는 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시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용건이 없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명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각하십니다. 남부의 두 가문은 서로 힘을 합쳐 오크를 막아 내고 있는데, 그 후방에 있는 귀하의 가문은 그간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문책을 피하려면 말이죠.”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의 일을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마땅히 교류가 없었기에 딱히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몬이 이곳으로 찾아와 상황이 바뀌었다.
이 자리에서 지원을 거절한다면 비겁한 가문이라고 손가락질당할 수도 있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백작이라면 피하고 싶은 전개일 터.
“더는 할 이야기가 없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지요.”
“잠깐.”
시몬이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니, 한껏 고민하는 딜리토의 얼굴이 보였다.
“으음…… 내가 생각이 좀 짧았던 것 같군요. 그에 대해선 사과하겠습니다. 우리 영지만 생각했군요. 제국 전체의 안위를 생각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형편이 어려우시다는데 어찌 강요를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아크튜러스의 대공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요. 군량 창고를 열지요. 무기도 지원하겠습니다.”
주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찔끔 주고 생색을 낼 게 뻔하다.
“고맙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리고 타이온 각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일단 앉으십시오.”
딜리토는 시몬과 라니에리의 손을 이끌고 다시 소파에 앉혔다.
“이대로 돌아가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못해도 하루는 쉬었다 가십시오. 좋은 방을 준비해 놓았으니까. 군수 물자는 바로 준비할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딜리토 백작이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시몬이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정말 밥맛이네. 빌어먹을 놈. 정중한 척하기는.”
“오랜만이요?”
“전생에서 몇 번 봤거든.”
“……그보다 대체 오크어는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두 사람은 같은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 외의 것, 특히 오크어를 배운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는 너도 알잖아. 일일이 설명하기도 입이 아프다.”
“또 회귀론입니까.”
“내가 회귀했다는 증거가 착착 쌓여 넘치고 있는데 회귀론을 부정한다는 것 자체가 비합리적인 거 아니냐?”
라니에리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현상을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공자님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해야겠어. 분명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을 거다.’
라니에리가 깊은 생각에 잠길 바로 그 무렵.
베이론의 넓은 평원에서는 아크튜러스-알데바란 연합군과 오크족 대군이 격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