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알퐁스 백작가 (1)
영약의 핵심 재료인 ‘드래곤의 심장’을 모은 시몬은, 이 기세를 몰아 나머지 재료까지 모조리 채집했다.
탐사와 추적에 특출난 진의 도움 덕에 시간을 꽤 절약할 수 있었다.
“이런 영약은 처음 보네요. 저희 가문도 약초학에 조예가 꽤 깊은데 말이죠.”
진은 둥근 단약에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약재가 배합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하지만 시몬이 가문에서 미리 챙겨 온 재료도 있기 때문에, 완벽한 제조법은 알 수 없었다.
“너희 가문은 사람 죽이는 데 도가 텄으니 그럴 수밖에. 사람을 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사람을 살리는 독약도 있는 법이지요. 연하게 희석시키면 좋은 약이 되는 독도 있거든요.”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다르지.”
햇볕을 피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시몬은 단약을 입에 넣었다.
그가 앉은 주위로 오러의 기운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잘 지키고 있어라. 좀 집중해야 하니까.”
그곳은 숲 한가운데였다. 위험한 동물이나 몬스터가 출몰할 수도 있는 상황.
혹은 불순한 마음을 품은 자들이 칼을 빼 들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손을 써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시몬이 눈을 떴다.
“됐다.”
시몬은 심장에서 꿈틀거리는 다섯 번째 오러 서클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여섯 번째 서클이 들어설 자리까지 만들어졌다.
‘영약의 효과가 생각보다 좋았군.’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진은 묻고 싶었다. 몇 서클로 올라선 거냐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먼저 묻는 것은 실례였다. 무엇보다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중독시켜 꼭두각시로 이용하려고 했었는데 경지를 묻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아직은 믿음이 부족함을 느꼈다.
“성공하신 걸까요?”
“완벽히.”
진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애쓰셨습니다. 이 근처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는데요. 조금 쉬었다 가실까요?”
“내 목숨을 노린 여자와 어떻게 한방을 쓰나?”
“한방을 쓰겠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게 그거지.”
시몬이 다시금 다리에 오러를 주입했다. 그는 이대로 뛰어서 라니에리를 따라잡을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면 라니에리가 어디쯤 갔을까?”
“아마도 드보렌 마을에 머물고 있을 거예요. 그리 서두르진 않았으니까요.”
“앞장서라.”
진이 먼저 숲 저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예상대로, 라니에리 일행은 드보렌 마을의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규모가 꽤 있는 마을이었다.
여관을 보면 마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3층으로 되어 있었고 건물도 컸다. 오가는 여행자들이나 상인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귀족들이 머물 수 있는 방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라니에리와 로빈은 특실을 쓰고 있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뭘 걱정하고 그래? 내가 이러는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레서 드레이크를 잡으러 간다고 했는데도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충성심이 없다며 비웃음을 살 겁니다.”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라고 하면 되지, 뭘 그렇게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냐.”
그만큼 레서 드레이크는 대단한 몬스터였다. 만약 시몬에게 전생의 경험과 기억이 없었더라면 무사히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터.
전생의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일이 조금 꼬이는 바람에 의복을 다 버릴 뻔했다. 진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라니에리가 이번엔 진에게 인사했다.
“진 경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쁘군요.”
“정말 기쁘신 걸까요? 제가 돌아오지 못했다면 더 좋아하셨을 것 같은데.”
“설마요.”
“후훗. 농담이에요.”
분위기가 묘해졌다.
‘재미있군. 서로 견제하는 건가?’
두 사람이 너무나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은 학문과 무예를 동시에 익힌 여자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능력의 우위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라니에리는 단호했다.
표정을 보니 죽었다 깨어나도 무예를 익히지 않기로 한 결심을 더욱 굳힌 듯했다.
“심장은 구하셨습니까?”
시몬은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지금은 배 속에 있지.”
“아쉽군요. 실물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5서클의 오러를 갖추게 됐다. 경지로 따진다면 중급 소드 익스퍼트.
거기에 6서클이 들어설 자리까지 만들어졌다. 이다음 영약을 먹을 때에 좀 더 쉽게 서클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레 ‘환영의 검’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검의 능력은 오러를 5서클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전부.
이제는 그저 영롱하게 빛나는 좋은 검 정도의 가치만 있게 되었다.
‘그래도 더 좋은 녀석을 찾을 때까지는 가지고 있는 게 좋겠지. 아버지가 반환하라는 말씀은 아직 안 하셨으니.’
시몬은 나름의 계획을 세우며 짐을 풀었다.
“전선에서 별다른 소식은 없었고?”
“보고에 의하면 아직 대치 중인 모양입니다. 그보다 역시 풍토병에 대한 걱정이 큰 것 같더군요.”
“감염자가 벌써 생겼나?”
“그런 건 아니지만, 파월 경이 남긴 말에 따르면 오래 버틸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
시몬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 상태로 진에게 명령했다.
“지금 바로 가서 타이온 각하께 전해라. 베이론으로 전역을 옮기지 않으면 아예 철군시키겠다고.”
“명을 따릅니다.”
진이 바쁘게 방을 나섰다.
시몬은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생하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 왔다.
‘그래도 좀 버텨라. 다 너와 가문을 위한 일이니까.’
* * *
며칠 후, 시몬은 알데바란 성에 도착했다.
진은 먼 길을 오느라 지친 시몬을 위해 좋은 소식을 준비했다.
“각하께서 전역 변경을 허가하셨어요. 지금 막 전선으로 전령을 보낸 상황이에요. 이제 제대로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가 진즉 와서 얘기했으면 좋았잖아.”
먼저 가서 후작을 설득하라고 했는데, 그러지 않고 레서 드레이크를 잡는 걸 도와서 시간을 낭비했다는 지적이었다.
당연히 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최선이 아니라는 것은 공자님도 아시지 않나요?”
“결과론을 맹신하면 큰코다치는 법이지. 과정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그보다 퇴각 작전은?”
“말씀하신 대로 알데바란 기사단에 일부러 패한 척하고 물러나라 지시했습니다.”
오크는 호전적인 종족이다.
이성적인 인간과는 달리 전술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쫓아올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시몬은 제1기사단을 킬스톤으로 파병할 때 그 점도 일러 놓았다.
“우리 기사단과 손발이 잘 맞아야 할 텐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몬은 쉴 틈도 없이 바로 타이온 후작을 만났다. 그는 다소 불만인 표정으로 아크튜러스의 후계자를 맞았다.
“각하를 뵙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군. 일어나시게.”
타이온 후작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잠시 입을 다물던 그가 시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성으로 오는 것보다 전선으로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진 경이 고생하고 있다고 들어서 말이지요.”
“허허, 기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네만, 전선을 위로 끌어올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아는가?”
타이온 후작은 생색을 냈다. 이만큼 양보를 했으니 너희들도 이만큼 양보해야 한다, 이런 뉘앙스로.
“압니다.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온 것 아니겠습니까? 태자 전하와 황녀께서 더 머물고 가라고 하시는 것도 뿌리치고 온 것입니다. 동생도 걱정되지만 알데바란의 신민들도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요.”
“흐음.”
“알데바란에 피해가 가는 일 없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염려 놓으시길.”
타이온은 불쾌했다.
예전에 보여 줬던 예의 바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시몬은 마치 동등한 입장에서 테이블에 앉은 외교관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곳에서 무엇을 할 생각인가?”
“전황을 지켜보면서 필요하다면 지원을 나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2기사단의 정예들도 끌고 왔지요.”
“처음부터 힘을 보태는 게 좋을 텐데?”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의 심기는 무척이나 불편할 것이다. 아크튜러스의 군대가 점점 영지를 잠식해 나가는 기분일 테니까.
‘주둔권’은 단순한 권리가 아니다.
부대가 머물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지나치는 과정에서 주변 지형을 측량할 기회를 얻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세밀한 지도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시몬은 솜씨 좋은 지도 제작자를 기사로 둔갑시켜 제1기사단에 숨겨 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에서 알퐁스는 그리 먼 곳이 아니지.’
시몬은 입가가 올라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타이온 후작에게 제언했다.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좀 해 볼까 합니다만.”
“그게 무엇인가?”
“알퐁스 백작가.”
타이온의 눈이 반짝였다. 이 타이밍에 나올 만한 이름치고는 대단히 흥미로운 곳이었다.
“우리는 서로 힘을 합쳐 싸우고 있는데, 인근에 있는 알퐁스에서는 식량 한 톨 보내 주지 않으니 좀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원을 요청하려는 건가?”
“그들의 군대는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는 성의 표현을 해야 옳다고 사료됩니다. 각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성의 표현, 좋군. 이 상황에 아주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네!”
“그렇다면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제가 이끌고 온 병력은 남부 전선으로 파견해 놓지요.”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가겠다는 말인가?”
“황녀님의 외가이기도 한 곳인데 호위가 필요하겠습니까?”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네.”
“풍문은 풍문일 뿐이지요.”
시몬은 자신 있게 웃었다.
“아크튜러스의 후계자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넣어 두십시오.”
“좋은 소식을 기대하지.”
“전령이나 보내 주십시오. 시몬 아크튜러스가 찾아간다고.”
가볍게 예를 올린 시몬은 알퐁스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허리 좀 펴며 쉴 수 있다고 생각한 라니에리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알퐁스로 가시는 건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전선에서 멀어지는 게 좀 걱정되는군요.”
“남의 동생 걱정하지 말고 네 허리나 걱정해.”
“후우…… 공자님께서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운동 좀 해라.”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 같습니다만.”
피식 웃은 시몬이 의자에 다리를 올렸다.
“그냥 좀 궁금하잖아. 가문을 잇지 않는다는 소문이 제국 전체에 퍼졌을 텐데, 이해관계가 이미 성립된 알퐁스 백작가에서 나를 어떻게 맞이할까?”
“장담하는데 귀빈 대우는 못 받을 겁니다.”
그때, 하늘 저편에서 비둘기가 푸드득하고 날아들었다. 차창을 연 라니에리가 팔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