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드래곤의 심장 (1)
“재미있는 소식이라기보다, 조금 이상한 일은 있었어요. 황실에서 보내는 밀사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는 보고는 받으셨지요?”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보 중 하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밀사의 발걸음이 끊겼더군요. 알퐁스 내부에 첩자를 심어 뒀는데, 확실히 황실에서 오는 연락이 뜸해졌다고 해요.”
“역시 예상대로 돌아가는군.”
“혹시 황도에 가셨을 때 무슨 일이 있으셨을까요?”
시몬은 황도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황태자에게 직접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진은 깜짝 놀라면서도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크튜러스에서 후계자를 가리는 대회를 연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었군요.”
“그렇지.”
“그보다 공자님. 말씀을 듣다 보니 개인적으로 여쭙고 싶은 게 생겼는데요. 왜 가문을 잇지 않으시려는 걸까요?”
“그건 좀 선 넘는 질문인데?”
아무리 정보력이 뛰어난 진이라고 해도 시몬이 가문을 잇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선뜻 이해할 수는 없었다.
“제가 공자님을 보좌하는 데 있어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여쭤본 거예요. 혹시 다른 계획을 세우고 계시거나…….”
“다른 계획이라면, 어떤?”
“독자적인 세력을 꾸리시는 거지요.”
약간은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마차 안에 있던 시몬과 라니에리는,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제국의 귀족이 아니라 군주가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이미 황실을 조사하고 있는데 이보다 더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요?”
“하긴, 그건 그렇지. 거기에 좀 사정이 있는데 그건 나중에 알려 주마.”
“그 사정, 라니에리 경은 알고 계시겠지요?”
“알고 있긴 한데 다 알고 있진 않아.”
“아쉽군요.”
진은 대놓고 라니에리를 견제했다. 마치 참모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러나 흥미롭게도 라니에리는 그 도발에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숨통을 쥐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지만,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공자님께서 큰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더 많은 두뇌가 필요하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겠지. 이 점에서 진 경은 중요한 인재야.’
그녀는 분명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완전히 아크튜러스 가문으로 전향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었다. 가짜 충성이 진짜 충성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일단 공자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건 한적한 시골 마을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농사요?”
라니에리의 말에 진은 깜짝 놀랐다.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다니?
시몬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왜 말하고 있어?”
“농사를 잘 지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진 경께 미리 조언하는 것입니다. 공자님의 성공적인 수확을 위해서 말이죠.”
“하아…….”
진은 라니에리가 말한 그 농사가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농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나라의 터를 미리 닦아 놓으신다는 말씀이군요.”
“그건 또 뭔 소리야?”
“저는 공자님께서 제국의 귀족으로 만족하지 않으실 것 같았거든요. 라니에리 경의 이야기를 들으니 제 추측이 맞았다는 확신이 드네요.”
“마음대로 생각해라.”
시몬은 진짜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는데 두 브레인이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일이다.
나중에 아주 큰 오해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당사자들은 대단히 허탈해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일이 가문에 도움이 될 테니까.
케나드의 부담을 훨씬 줄여 줄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서둘러 확인해야 하는 건, 황실이 아크튜러스 방계 중 누구와 접선을 하는가야. 진 너도 정보 수집에 도움을 줬으면 하는데.”
“물론이죠. 이런 큰일을 맡겨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실 거예요.”
“그런 말 한다고 해약이 잔뜩 가거나 그럴 일은 없는 거 알지?”
“어머, 아직도 제 진심을 몰라주시는 걸까요?”
“별로 관심 없는데.”
피식 웃은 시몬이 라니에리에게 지시했다.
“너는 이 길로 진 경과 같이 알데바란 성으로 가라. 나는 도중에 좀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어디로 가실 요량이십니까?”
“재료 좀 구하러.”
라니에리는 시몬이 좀 더 좋은 영약을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떤 재료요?”
호기심이 생긴 진이 물었다.
“몸에 좋은 영약을 하나 만들까 싶거든. 나름 후계전을 준비해야 해서 말이지.”
“알데바란 내에 존재하는 재료인가요?”
“그래.”
“그렇다면 제가 모시는 건 어떨까요? 이래 봬도 영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제 손바닥 안에 있답니다. 지형도 마찬가지죠.”
“너도 모를걸?”
시몬은 자신 있게 대꾸했다. 그러자 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살아 있는 드래곤의 심장이 필요한 거라서.”
“드래곤……이요?”
두 사람이 동시에 놀랐다.
드래곤은 초차원적인 존재다. 게다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물론, 아주 먼 과거에는 인간과 드래곤, 그리고 각종 이종족이 한 대륙에 공존하던 시기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먼 옛날이야기.
결국 드래곤은 신화 속에서만 살아 숨 쉬게 되었다.
“드래곤이 실존합니까? 그것도 알데바란 영지에?”
“진짜 드래곤의 심장을 얻으면 나도 좋겠지만, 그건 무리야. 내 실력도 실력이지만 라니에리 네가 얘기한 것처럼 실존하지 않으니까.”
“그럼 어떻게 드래곤의 심장을 얻는다는 말씀입니까?”
“드래곤과 비슷한 놈이 있다. 레서 드레이크. 바람의 협곡에 곤히 잠들어 있지.”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향후 10년 내로 레서 드레이크가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레서 드레이크는 드래곤보다 훨씬 약한 이종이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결국 알데바란 영지를 비롯해 그 주변까지 큰 피해를 입히고 시몬에게 토벌당하게 된다.
‘레서 드레이크의 심장이 오러를 늘리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지.’
그때는 심장만 따로 섭취했지만, 지금은 그 심장을 재료로 하여 영약으로 만들면 더 효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심장을 구하러 가려는 것이다.
“레서 드레이크라면 그것도 전설 속의 지룡인데, 공자님 혼자서 되겠습니까?”
“돼. 예전에 한 번 잡아 봤거든.”
“그래도 로빈 경이라도 데려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혼자가 편해. 그리고 로빈 경을 데려가면 너는 누가 지키나? 여기가 안방도 아니고 알데바란인데.”
그런데 그때, 진이 의외의 제안을 꺼냈다.
“공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바람의 협곡까지 수행하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입고 있던 로브를 활짝 벌렸다. 유려한 몸매를 따라 각종 투척 무기와 장비가 걸려 있었다.
시몬은 그녀의 몸매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다만, 걸려 있는 무기들이 하나같이 장인이 벼려 낸 것이라는 점에는 관심이 생겼다.
“오러는?”
“조금 쓸 줄 알아요. 아직 1서클이지만.”
“그 정도로는 레서 드래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없을 거다. 오히려 걸리적거리기만 할 테니 이번엔 물러나 있어.”
“아쉽네요.”
“다음엔 아쉬운 일 없게 해 주마.”
오크와의 전쟁이 수월하게 풀리면 시몬은 진의 공로를 치하할 계획이었다.
현재 1서클이라면, 비약 네 개 정도만 먹여서 3서클로 만들어 줄 수 있다.
1서클 정도는 하급 기사와 경지가 비슷하다.
물론, 세레스 가문의 비전을 전수받아 암살 특화 기술이 매우 강력하긴 하겠지만, 딱 그뿐이다.
“도착하는 대로 타이온 각하께 압박을 넣어. 지금 아크튜러스의 후계자가 둘이나 이곳에 있으니 정신 차리라고. 괜히 나와 케나드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곤란해지잖아? 그래도 안 되면 내가 직접 가서 제언하지.”
“알겠어요.”
“라니에리 넌 알퐁스에 심어 둔 첩자와 다시 연락해 보고.”
“예.”
그로부터 다음 날, 시몬은 진이 구해다 준 말을 타고 바람의 협곡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휘이이잉!
높게 뻗은 산 사이로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보통의 바람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강하게 불면, 피부가 베일 것같이 따가웠다.
말에서 내린 시몬은 온몸에 오러를 둘렀다.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군. 아직 잠들어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전생에서 레서 드레이크가 인근 영지에 큰 피해를 준 것은 깨어난 뒤 힘을 회복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잠들어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힘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목을 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운이 좋으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로 심장을 구할 수도 있다.
‘간다.’
시몬이 다리에 강력한 오러를 부여했다.
파앗!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지면을 박차고 점프한 것이다.
마치 비행 마법을 사용한 것처럼, 시몬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다리 밑으로 몬스터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좋은 부산물을 얻을 수 있는 개체도 있었다.
하지만 시몬은 몬스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이 기억하는 지점을 향해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시몬은 뜀박질을 멈추었다.
거대한 절벽이 앞길을 막았던 것.
‘분명 이쯤이었을 텐데?’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레서 드레이크를 물리치고 나서 전리품을 얻기 위해 둥지를 수색한 적이 있었다. 바로 이 지점이었다.
시몬은 손을 뻗어 오러를 흘렸다. 그러자 절벽 너머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레서 드레이크의 힘이 느껴졌다.
‘찾았군.’
구오오오!
‘환영의 검’을 꺼낸 시몬이 검에 오러를 불어 넣기 시작했다.
그 아티팩트는 사용자의 오러 수준을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려 주는 마법검.
강력한 푸른빛이 맺히더니, 시몬은 아주 조심스럽게 절벽에 구멍을 냈다.
쿠르르르…….
돌이 무너지며 거대한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시몬은 미리 준비한 랜턴을 꺼내 불을 붙였다. 거기에 눈에 오러까지 주입하자, 마치 대낮처럼 환하게 내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나아가며, 시몬은 저편에서 느껴지는 힘이 변화하지 않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이윽고 거대한 공동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엎드려 잠들어 있는 레서 드레이크의 모습이 드러났다.
10미터가 족히 넘는 거대한 몸체. 거기에 아무리 예리한 검이라도 꿰뚫을 수 없어 보이는 탄탄한 비늘이 불빛에 반짝였다.
머리엔 두 개의 뿔이 달려 있었다. 외형은 드래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크기는 확실히 작았다.
‘좋아. 깨우진 않았군.’
시몬이 매우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거대한 레서 드레이크는 바닥에 엎드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랜턴을 적당한 곳에 세워 놓고, 검에 오러를 가득 불어 넣었다.
‘단번에 잘라 낸다.’
시몬이 검을 들어 목을 겨냥하려던 바로 그때.
번쩍!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레서 드레이크의 눈이 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