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친구들 (2)
시몬은 두 친구와 함께 도시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빈은 방해하지 않겠다며 저택에 남았다.
열병을 앓기 전, 종종 이곳에 와서 식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헐뜯고 있는 두 친구를 바라보니 절로 미소가 그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전선으로 떠난 동생 케나드에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이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너희들은 질리지도 않냐?”
“뭐가 말입니까?”
“그렇게 치고받고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옛날하고 전혀 다를 게 없잖아? 서로 묘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감정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불쾌한 표현이군요.”
“빨리 사과하세요!”
두 사람이 동시에 시몬을 비난했다. 시몬은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항복을 표했다.
“알았으니까 메뉴부터 골라. 배고파 돌아가시겠거든?”
그때 드비안느가 묘하게 비꼬며 라니에리를 도발했다.
“우리 멋진 라니에리 경께서 직접 골라 주지 않으시겠어요? 레이디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메뉴 정도는 머릿속에 들어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어려울 것 같군요.”
“어머~ 부끄러우신가 봐요? 의외네.”
“이곳에 레이디가 없으니까.”
그렇게 한마디 툭 쏜 라니에리는 무심한 눈으로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드비안느는 당연히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한마디로 무시당했다.
자신은 여자가 아니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기에.
“방금 뭐라고?”
“이곳에 레이디가 없다는 말을 못 들은 겁니까, 아니면 자기는 레이디가 맞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까?”
“야!”
“아 진짜. 그만들 좀 하라고!”
시몬이 버럭 화를 내고 나서야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었다.
“아크튜러스의 이름에 먹칠할 생각이냐? 너희들은 대체 언제 철들래?”
“…….”
“…….”
두 사람은 동시에 어이없다는 듯 시몬을 쳐다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철들라는 말을 공자님께서 하시면 안 되죠.”
“드비안느 양의 의견에 적극 공감합니다.”
“알았어. 나 양심 없는 거 알았으니까 빨리 주문이나 해. 어? 제발. 현기증 난다고.”
라니에리는 벨을 누르더니 고상한 어투로 메뉴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접수하는 메뉴 모두 시몬과 드비안느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웨이터가 돌아가자 라니에리가 입을 열었다.
“조금 갑작스러운 말이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공자님의 안목이 정확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군요.”
“갑자기?”
“로빈 경 말입니다. 보면 볼수록 인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로 배를 채우던 시몬은 피식 웃었다.
이토록 어린 소년이 어떻게 자신을 경호할 수 있냐는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게 엊그제였는데, 벌써 신임을 얻은 모양이다.
‘하긴, 3서클이면 소드 비기너 마지막 단계지. 그 정도 되는 기사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만약 로빈이 지금 상황에서 서클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된다면,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론상 나와 동급이라 할 수 있겠군. 하지만 지금 만들고 있는 비약으로는 익스퍼트로 진입하는 건 어려울 터.’
필연적으로 더 강한 비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각나는 약초의 조합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약초들.
‘어차피 내 서클도 늘려야 하니까. 적어도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자력으로 6서클은 넘어야 해. 언제 시간 내서 좀 나갔다 와야겠군.’
지금은 ‘환영의 검’의 도움으로 5서클 수준의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아티팩트로 끌어올린 서클이기 때문에 순수한 5서클에 비할 수는 없다.
‘게다가 얼마 전 황도에서 있었던 일이 많은 변수를 만들었을 거야. 무엇보다도 후계자를 결정짓는 일은 전생에서 없었던 일이지.’
전생에서의 시몬은 아무런 방해 없이 후계자에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태자에게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공개한 탓에 아크튜러스 가문에서는 방계까지 모두 참여할 수 있는 후계를 결정하는 대회를 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혹시 모를 참사를 막으려면, 역시 내 힘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검술만이 아니라 오러를 좀 더 끌어올려야 해.’
사실상 시몬은 진보한 아크튜러스 검식을 모두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오러가 4서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를 좀 더 끌어올려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효과를 더하는 것은 오러이기 때문이다.
‘황녀가 아니라 황태자께서 배후에 있는 이상 방심할 수는 없지.’
황녀는 그저 욕심이 많은 인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황태자는 거기에 권력까지 손에 넣은 사람이다. 황녀가 꾸민 계략보다도 더한 것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는 충분하다.
‘전생에서처럼 놀아나진 않을 거다. 기대하라고.’
시몬이 갑자기 눈빛을 빛내자 라니에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또 무슨 흉계를 꾸미시려는 겁니까?”
“일의 앞뒤가 좀 바뀐 것 같지 않냐?”
“무슨 말씀이신지.”
“내 옆에서 흉계를 꾸며야 하는 건 책사인 너인데 매번 나만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말이지. 밥값은 해야 하지 않냐?”
예전이었다면 충분히 반론할 수 있는 주제였다.
하지만 최근은 그렇지 않았다.
시몬이 짜 놓은 일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송구합니다. 좀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은 요즘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봐야 내 손바닥 안일 뿐이겠지만.”
“그럼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 봐.”
“후계위 대전은 어떻게 치르실 건지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공자님께서 계획이 있다고 하셨지만, 말씀을 안 해 주셨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라니에리는 시몬의 계획을 짐작하지 못했다.
결국 케나드 공자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부러 패배해야 하는데, 검의 극의에 오른 드뇌브 후작이 그것을 인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방계에서 오러 좀 쓰는 애들이 있나?”
“기껏해야 힐스트롱 가문의 장남과 미들즈웨이 가문의 차남 정도가 주목할 만합니다. 하지만 무예에 무지한 제가 보더라도 그들은 공자님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은 좀 다른데.”
라니에리가 말한 두 공자들은 시몬도 익히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구우우우!
시몬은 오러를 끌어올렸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강력한 오러 결계가 펼쳐졌다.
“만약 황실에서 아크튜러스의 적자들, 그러니까 나와 케나드를 찍어 누르고 그 자리를 방계에게 넘기려고 하면 어쩔래?”
“황실이라면, 태자 전하께서요?”
“그렇지.”
“후계 대전에서 뭔가 일이 생길 겁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 웨이터가 음식을 가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몬은 재빨리 오러를 거두고 태연하게 답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좀 더 강해져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귀한 약초를 좀 모아 볼 생각인데…….”
“약을 또 만드시려고요?”
“그래. 좀 더 효과가 좋은 약. 지금의 비약은 오러 비기너들에게나 효과가 있어. 익스퍼트부터는 다른 약을 먹는 게 좋다.”
“기대되네요. 또 어떤 레시피가 나올지.”
웨이터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내려놓자마자, 시몬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 약을 생산할 계획은 없어. 어차피 대량 생산이 어렵기도 하고.”
“재료 구하기가 힘든가 봐요?”
“그렇지. 그래서 겸사겸사 알데바란으로 가려는 거야. 약초만 필요한 게 아니라 몬스터를 잡아 부산물도 좀 챙겨야 하거든.”
필요한 재료를 찾아 영약을 만들고, 그 약을 먹어 서클을 늘린다. 그것이 시몬이 계획한 것이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의문이 하나 남았다.
라니에리가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럼 케나드 공자님이 공자님을 이기기는 더 어렵게 되는 거 아닙니까? 특별한 약을 먹고 더 강해지실 테니까 말이죠.”
“다 방법이 있다니까 그러네.”
시몬은 빵에 드레싱을 뿌려 입에 가득 넣었다. 빵을 먹고 있으니 절로 루아가 만들어 줬던 그 빵이 떠올랐다.
라니에리는 좀 더 집요하게 추궁하고 싶었지만, 시몬이 절대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빵을 집었다.
다시금 오러가 발동하며 방음막이 형성되었다.
“일단 우리가 살펴야 하는 건 황실에서 방계 중 누구와 접촉하는지에 관한 거야. 그러니 정보망을 가동하도록.”
“알겠습니다.”
“드비안느 너도 들은 게 있으면 좀 알려 주고. 어머니 통해서 뭔가 정보가 들어올 수도 있다.”
“걱정 마세요. 저는 누구와 달리 밥값은 잘하거든요.”
“그만 하라니까 좀.”
잠시 후 주문한 메인 요리가 나왔다. 방음막이 사라진 그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
며칠 후, 시몬은 아크튜러스의 접경을 넘어서 알데바란으로 진입했다. 출입국 심사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검은 망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공자님.”
망사가 거둬지자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처음 시몬을 만났을 때보다 더욱 아름답게 치장한 모양새였다.
“잘 지냈나? 진.”
“덕분에요. 잘 챙겨 주신 덕에 아직 팔다리가 썩어들어 가고 있진 않네요.”
“하하하. 다행이군.”
그녀는 세레스 가문을 이끄는 여인이었다. 시몬을 중독시키려다가 역으로 중독되어 지금은 아크튜러스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보다 처음 보는 분이 계시네요?”
“아, 저는 로빈이라고 합니다. 라니에리 경을 모시고 있어요.”
“어려 보이는데?”
진이 로빈에게 호감을 보이자 시몬이 나직이 경고했다.
“저 누나는 조심해야 한다. 사람 중독시키는 거 잘하는 분이거든. 방심하면 평생 노예가 될지도 모르니까 단둘이 있지는 마.”
“예? 아, 알겠습니다.”
진은 재미있다며 웃었다.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일을 이렇게 농담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배포가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빠져들게 만드는 남자였다.
“일단 자세한 건 가면서 이야기하지.”
“예. 공자님.”
진은 관문 책임자에게 마차를 통과시킬 것을 명령했다. 시몬은 진을 마차에 태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알데바란의 영주가 시몬을 환대하기 위해 가신인 진을 보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달랐다.
진은 알데바란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킬스톤 쪽 상황은 어때?”
“오크의 대군이 집결했어요. 다행히 아직은 대치 중이에요. 하지만 언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죠.”
“대군이라면 병력이 어느 정도 되는데?”
“1만 정도로 보고 있어요.”
시몬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크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장정 두어 명이 필요하다. 단순 숫자만 놓고 계산한다면 세 배 이상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아크튜러스에서 제안한 전략은 잘 설명했어요. 예상하시겠지만 반대가 굉장히 심한 상황이죠.”
“당연히 그러겠지.”
사막으로 유명한 킬스톤 지역은 풍토병이 만연한 곳이기도 했다. 장거리 행군에 지친 아크튜러스의 전사들이 싸우지도 못하고 전투 불능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크튜러스 사령부는 회의를 통해 전역을 킬스톤이 아닌 베이론 지역으로 설정하기로 했다.
“알데바란에서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거 같은데. 어떻게 보면 나름 동맹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거잖아.”
“베이론은 민간인이 많은 지역이에요. 킬스톤은 사막이 태반이라 주둔권을 허락한 것이었지만…… 베이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세레스 가문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건가?”
“그렇다고 말씀드리면 제 목숨이 위험해지겠죠?”
“아니. 뭐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그 말이 진에겐 큰 상처가 되었다. 열심히 해서 시몬의 인정을 받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서 담판을 지어야겠군. 그보다 알퐁스 쪽에서는 뭐 재미있는 소식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