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친구들 (1)
헤라의 목소리가 식당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헤라에게 있어선 지금이야말로 후계 이야기를 꺼낼 좋은 타이밍이었다.
시몬이 우연히 자리에 합석하기도 했고, 미온 앞에서 자신이 정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주고 싶었다.
이올린이 가문을 이을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시몬이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쳐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죠. 그런데 케나드가 있는데도 왜 방계를 불러들이는 거지요?”
“그게 전통이기 때문이오.”
드뇌브 후작은 딱 잘라 말했다. 헤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공자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걸 승인하는 것도 그 잘난 전통인가요?”
“허어, 말을 삼가시오!”
“당장 방계에 보낸 소식을 철회해 주세요. 후계의 자리는 마땅히 시몬의 것입니다. 그게 안 된다면 마땅히 케나드가 이어야겠지요.”
시몬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첫째 아들의 친모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둘째에게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모든 방계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만약, 혹시라도 방계에서 가문을 잇게 된다면 지방으로 쫓겨날 것이고 변변치 못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뜨게 될 테니까.
“시몬! 너도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라!”
“어머니. 진정하십시오.”
“너라면 진정할 수 있겠니?”
“무엇이 걱정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아는 녀석이 이런 일을 벌이다니. 나는 이해할 수 없구나.”
다분히 원망 섞인 한마디. 시몬은 차분히 대응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습니다. 장자가 가문을 잇지 않게 된다면 방계에도 기회를 주는 게 맞습니다.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잇고 케나드에게 물려주면 되잖니!”
“그건 편법입니다. 정도를 추구하는 우리 아크튜러스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죠. 정정당당히 검을 겨루고 강한 사람이 모든 것을 취하는 게 우리 가문의 전통이지요.”
헤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당장이라도 그릇을 집어 던질 것 같은 기세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계에서 올라올 녀석 중에 저와 케나드를 능가할 자는 없습니다.”
적어도 시몬을 능가할 사람은 없다. 그는 현 아크튜러스 검식을 압도하는 진보된 검식을 습득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시몬은 그 검식을 케나드에게 전수할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이론상 두 사람을 능가할 수 있는 방계는 없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주머니 속의 송곳니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오는 놈은 없었지.’
대륙 전쟁 때만 하더라도 전공을 세운 방계가 없었다.
놓칠 리는 없었다. 논공행상 자리에 분명히 참석했었으니까.
이론과 경험이 더해지니 확신이 되었다. 시몬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 대회가 치러질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모조리 때려눕힐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케나드와 만나게 되겠죠.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대체 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어서는!”
“그 부분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황녀와의 일, 그리고 그 배후에 황태자 카인이 마수를 뻗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는 곤란했다. 헤라는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다.
드뇌브 후작의 신임을 간신히 받아 낸 상황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이와 관련된 일은 가능하면 퍼트리지 않기로 했다.
“후우…… 이만 실례하겠어요. 도저히 음식이 넘어갈 것 같지 않네요.”
헤라가 식당을 나가 버렸다. 남겨진 미온과 이올린은 드뇌브 후작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시몬이 드뇌브 후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스럽군요.”
“내가 잘 타이를 테니 떠날 준비나 하거라.”
“예. 아버지.”
시몬도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로빈이 출근하는 것을 기다린 시몬이 바로 그를 침소로 불렀다.
그런데 혹이 두 개나 딸려 들어왔다.
라니에리와 드비안느였다.
“라니에리는 그렇다 치는데, 드비안느 넌 무슨 일이야?”
“비약 효과가 어떤지 좀 보려고요.”
“한가해? 어머니가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텐데.”
“누구 때문에 한 소리 들었네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얌전히 나가 있어야죠.”
불똥이 엄한 데로 튄 모양이다. 그게 자신 때문인 것을 잘 알았지만, 시몬은 웃었다.
“시녀라는 게 쉬운 직업이 아니지. 팔자라고 생각해라.”
“예예, 그럼요.”
이번엔 시몬이 로빈에게 물었다.
“어젠 잘 놀았나?”
“덕분에 즐겁게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무척 기뻐하셨어요.”
“기뻐했다고? 그것도 무척?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
“티는 잘 안 내시는데, 좋아하시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로빈이 쑥스럽게 말했다. 그 어색한 모습을 상상하니 시몬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켈로그도 마찬가지였군.”
“감사합니다. 공자님. 덕분에 아버지도 편히 모시게 되었고요. 아저씨들도 떠돌아다니지 않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목숨을 다해 충성하도록.”
“네!”
“그렇다고 너무 목숨을 내놓지는 말고.”
시몬이 자리를 권했다. 로빈은 얌전히 바닥에 앉았다.
“내 목표는 네 오러 서클을 3개까지 늘리는 거야. 너에게 먹일 비약이 총 3개 남았는데, 문제는 3개라는 숫자가 좀 애매하다는 거지.”
“어떻게 애매한데요?”
“비약 하나가 부족하다. 뭐, 사람 체질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넉넉잡아 앞으로 네 개를 먹어야 3서클을 찍을 수 있거든.”
시몬은 솔직하게 걱정스러운 부분을 공유했다. 그쪽이 더 효과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 로빈은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시몬은 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제가 해낼 수 있을까요?”
“나는 해낼 수 없는 사람한텐 일도 안 맡긴다. 처음보다 통증은 좀 덜할 거야. 오러 서클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도 충분하니까 어렵지는 않을 건데, 그래도 최대한 집중해야 한다.”
“예!”
시몬은 약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시일을 두고 천천히 오러 서클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사흘이라는 기일을 정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이 좀 바뀌었다.
비약을 한 번에 다 먹여 보기로 했다.
‘기왕에 운에 맡겨야 하는 거라면 좀 더 큰 리워드에 걸어 보는 게 좋지.’
시몬은 비약 세 개를 한 번에 먹여 오러의 양을 폭발적으로 늘릴 계획을 세웠다.
‘이론상으로는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내가 혈맥을 만져 주면 다르다.’
시몬은 상자를 열어 비약을 내밀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는 단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세 개를 한 번에 다 먹어야 한다. 지난번과 복용법은 똑같아.”
“한 번에 다요?”
“그래. 걱정할 건 없다. 오러가 흐트러지지 않게 내가 조절해 줄 테니까.”
로빈은 비약 세 개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이윽고 꿀꺽 삼켰다.
쏴아아아!
마치 목구멍에 폭포가 생긴 기분이었다. 청량한 기운이 목에서부터 시작해 배 속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몬은 눈을 감고 손끝에 감각을 집중시켰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시몬은 자신의 오러를 이용해 로빈의 혈맥 곳곳을 만져 주었다. 그의 오러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 결과일까.
“으윽!”
짧은 탄식과 함께, 로빈은 심장이 단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러 서클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하나가 아니었다. 시몬이 예고한 대로, 두 개의 서클이 심장에 추가로 자리를 틀었다.
“세 개…… 세 개가 됐어요!”
“역시 해냈군.”
시몬은 손을 털었다. 벌떡 일어난 로빈이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정말 3서클 유저가 된 건가요?”
“본인 입으로 세 개가 됐다면서 뭘 또 묻고 그래?”
“믿기지 않아서요.”
시몬을 만난 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다. 평범해 보였던 사냥꾼의 아들은, 이제 3서클이나 되는 오러 유저가 되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경우라 할 수는 없지.’
결국 전생의 경험으로 로빈의 잠재력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로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3서클 달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혈맥의 분포부터 다시 잡아 줘야 하니까.
“믿기지 않을 땐 그 힘을 직접 사용해 보면 되겠지. 잠시 활 좀 쏘러 나갈까?”
“예!”
시몬과 로빈, 그리고 구경꾼 두 사람이 근처에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지금은 준전시 상황이라 연무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위치에 선 로빈이 활을 꺼냈다.
직선으로 멀리 떨어진 전방에 과녁이 놓여 있었다.
“일단 3서클의 오러를 전부 끌어내서 한번 쏴 봐라.”
“예.”
구오오오!
로빈의 몸이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시작된 격렬한 파동이 그의 양손으로 고루 뻗어 나갔다.
이윽고 푸른빛이 한 점에서 만났다.
날카로운 화살촉까지 푸르게 물들이는 것에 성공한 로빈이 자신만만하게 시위를 놓았다.
콰아아아!
강한 파동과 함께 화살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빛의 화살이 과녁에 명중했고, 오러의 힘에 의해 과녁이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그런데 로빈의 표정이 영 시원찮았다.
“저, 이상한데요. 공자님.”
“뭐가?”
“위력이 그렇게 세진 것 같지 않아요. 3서클을 모두 회전시켰는데…….”
서클을 처음 만든 뒤 쏘아 낸 화살과 위력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 부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시몬은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연하지. 비약으로 만든 서클은 그리 단단하지 않아. 아니, 단단하지 않다는 건 좀 잘못된 표현이고…… 음, 뭐랄까. 숙성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오러를 좀 더 많이 쓸 수 있는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을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잘 숙성시켜야지.”
직감적으로 로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많이 써 보는 거죠?”
“그래. 서클이 텅 빌 때까지 쓰고, 채우고 또 쓰고를 반복하다 보면 품질이 좋아진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몸에 맞는 오러 심법을 익히게 되지.”
“공자님이 가르쳐 주신 심법은 완성되지 않은 건가요?”
“완성된 심법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검식과 마찬가지지.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누적된 결과물이 바로 심법이다. 그러니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어.”
“저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똑똑하군.”
이 장면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던 드비안느가 슬쩍 끼어들었다.
“저도 오러 서클 만들 수 있어요? 오러를 쓸 줄 알면 시중들 때 편할 것 같아서요.”
“2억 5천만 실링만 가져와. 바로 오러 유저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거 납품가 아녜요? 직원 할인도 안 해 주고 그대로 받으시려 하다니…… 완전 공자님다운 발상이네요.”
“공자님이라는 말이 도둑놈처럼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인가?”
“그럼요. 완전히 기분 탓이죠.”
그렇게 말하며 드비안느는 생긋 웃었다. 날이 갈수록 가면이 두꺼워지고 있었다.
“쯧. 정작 오러를 익혀야 할 녀석은 생각이 없고 쓸데없는 녀석만 관심을 보이는군.”
시몬이 라니에리를 바라보며 쓴소리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라니에리를 오러 유저로 만드는 것이었다. 호신 무술을 가르쳐 주면 로빈을 붙여 주지 않아도 된다.
“무술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나중에 목숨이 간당간당해질 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한번 지켜보자고.”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위험에 빠지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만.”
“흥, 정색하기는. 됐고. 배고픈데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가문 식당은 좀 그렇고, 나가서 먹자고.”
“으응? 아까 다 같이 드시지 않았어요?”
“체할 것 같아서 안 먹었어.”
“어머, 그러셨구나. 공자님이 사 주시면 갈게요. 헤헤.”
“언젠 안 사 줬다는 듯이 이야기하지 마.”
시몬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