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크튜러스의 방식 (4)
존슨은 며칠 묵은 뒤 다시 마이너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시몬은 그가 머물 곳을 직접 알아봐 주었다.
밀렸던 여러 이야기를 마치고 상단 본사에서 나오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날씨 좋고. 내 기분도 좋고.”
해맑게 웃은 시몬은 마차에 올랐다. 바로 그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다.
미소가 그의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들뜬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아직도 신선했다. 열병을 앓기 전까지는 이러지 않았었으니까.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당연한 걸 물어? 너같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바람둥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너도 첫사랑이라는 게 있긴 하냐?”
시몬은 편지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미묘하게 변하는 라니에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는 분명 어떤 여자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내 추억을 흩날리고는 웃고 말았다.
“첫사랑은 그저 흘러 지나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풍은.”
“그보다 루아 아가씨께서 상경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찌하긴. 자주 보는 건 그렇고, 일주일에 일곱 번만 볼 생각이다.”
라니에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 점이 시몬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냐? 그 표정은.”
“공자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시는군요.”
“뭐 하루 이틀이야?”
“황녀님께서 첩자를 붙일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자주 만나는 건 위험할 겁니다.”
“판도가 바뀌었잖아.”
시몬은 편지를 조심스레 접어 품 안에 넣었다.
“나를 감시하는 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을걸? 곧 아크튜러스 가문의 후계자를 뽑는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대륙에 쫙 퍼질 거야. 파혼 타이밍을 언제 잡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겠지.”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공자님도 전생에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고.”
“오, 드디어 내 회귀론을 지지해 주는 건가?”
“저는 합리론 이외의 것은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관념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지요.”
시몬은 혀를 찼다. 가끔 라니에리와 대화하다 보면 아카데미의 수업 시간이 떠올랐다.
“그보다 이제 다음 행보를 결정해야 하는데. 의견 있나?”
“둘 중 하나겠지요. 저택에 머물며 전황을 살피는 것. 다른 하나는 알데바란으로 가는 것.”
“전황을 살피는 거야 그렇다 치는데 알데바란은 왜?”
“아무리 세레스 가문이 알데바란에서 신임을 얻고 있다고 해도 진 경 혼자서 전황을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가서 도와주자는 거야?”
라니에리가 냉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진에게 조금의 자비심도 베풀고 싶지 않았다.
“겸사겸사 알퐁스 백작가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공자님께서 오크와의 전쟁에 협력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하긴.”
일각에서는 동생만 사지로 내몬 게 아니냐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몬은 그 소문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어쨌든 시몬은 아크튜러스의 군단사령관이었고, 대외적으로 더 강하다는 인식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알데바란으로 가 있으면 황실하고 엮일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일석이조지.’
예상할 수 있는 변수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만약 케나드가 위기에 빠진다면 바로 구원병을 이끌고 갈 수도 있고.
“좋아. 그럼 가서 후방 지원 정도만 해 볼까?”
“알겠습니다. 저택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알데바란행을 준비하겠습니다.”
“바로는 좀 그렇고. 사흘 뒤에 출발하지. 아직 비약이 좀 남았거든.”
“몇 개나 만드신 겁니까?”
“네 개 만들었어. 그중 하나를 먹였으니 이제 세 개 남았지.”
시몬은 나머지 세 개를 이용해 로빈의 서클을 두 개까지 늘려 볼 생각이었다.
‘운이 좀 좋아야 해. 잘되면 좋을 텐데.’
전에 드뇌브 후작에게 말했던 것처럼, 서클이 없는 사람이 3서클의 경지에 이르는 데 필요한 비약이 최소 다섯 개였다.
하지만 재료가 충분하지 않아 네 개밖에 만들지 못했다.
그래도 시몬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로빈의 몸이라면 3서클까지 충분히 만들어질 거야. 서클의 자리가 이미 뚫려 있으니.’
필요한 것은 비약을 먹고 몸을 회복하는 시간뿐이다.
사흘이면 조금 빠듯하지만, 부하를 강하게 만드는 것에 여유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
곧 마차가 멈춰서고, 시몬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아버지!”
로빈의 목소리였다.
시몬이 돌아보니 켈로그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고집스러운 풍채를 보였으나, 처음 만났을 때보다 복장이 깔끔해졌다.
이제 그는 마크스먼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즉, 정식으로 아크튜러스의 가신이 된 것이다.
로빈이 켈로그에게 달려가더니 와락 껴안았다.
“이 녀석. 공자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이곳은 아크튜러스의 저택이다. 기사라면 체통을 지켜야지.”
“아, 죄송해요.”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로빈은 급하게 떨어졌다.
환하게 웃은 시몬이 팔을 벌려 그를 환대했다.
“생각보다 늦었군. 켈로그.”
“공자님께 인사드리오.”
“그래. 소식은 들었지? 영지는 마음에 드나?”
켈로그는 시몬을 빤히 바라보았다. 할 말은 많았으나, 나오는 말은 짧았다.
“은혜에 감사드릴 따름이오.”
“아직 감사하긴 이르지. 내가 네 아들을 사냥개로 쓰지 않는지 계속 감시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사냥꾼이라면 톡 쏘는 맛이 있어야 하거든. 작위를 받았다고 세상과 타협하면 그게 사냥꾼이던가?”
시몬은 손을 내밀었다.
켈로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민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뒤늦게 깨달은 켈로그가 악수했다.
한편으로는 놀랐다. 다분히 권위적이어야 하는 아크튜러스의 대공자가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일 줄은 몰랐다.
“동료들은?”
“같이 돌아왔소. 지금 영지로 가서 열심히 사냥하고 있겠지.”
“잘했다. 약속대로 세금 문제는 처리해 주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잘 먹고 잘살라고 전해.”
“고맙소.”
“고마우면 그 뭐냐, 육포. 그것 좀 가끔 만들어 주고.”
“안 그래도 잔뜩 가져왔소. 영주님께도 진상했으니 필요하면 가져다 드시오.”
“각하께 인사는 드렸나?”
켈로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로빈이 오자마자 활쏘기 내기를 했다고 하시더군. 참, 그 말을 듣고는 면목이 없었소. 죄를 지은 기분이더군.”
“아아 그거? 로빈이 진 내기였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사람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하던데?”
“소문이야 뭐 늘 부풀려지는 거 아니겠나?”
시몬은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로빈에게 손짓했다.
“예. 공자님.”
“오늘은 이만 퇴근해라. 오랜만에 아버지가 오셨는데 나눌 말이 많을 것 같군. 모시고 나가서 우리 아크튜러스 수도의 위엄을 보여 드리고 오너라!”
그런데 로빈이 눈을 깜빡이며 머뭇거렸다. 곧 그가 라니에리에게 돌아서더니 물었다.
“라니에리 님. 저, 오늘 외출 좀 해도 괜찮을까요?”
“공자님께서 그러라 하셨으니 응당 그래야겠지. 굳이 나한테 물을 것까지야.”
“감사합니다.”
“…….”
시몬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지만 라니에리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기 때문에 로빈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다음에 만나자고.”
“살펴 가시오.”
켈로그 부자와 헤어진 시몬은 드뇌브 후작을 찾았으나, 마침 저녁을 드시러 갔다는 말에 바로 식당으로 움직였다.
시몬이 안으로 들어가자 모두가 사뭇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는 좀 피하고 싶은데.’
친모 헤라는 최근 연이어 충격을 받았다.
시몬이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거기에 아크튜러스의 후계자를 정하려는 대회를 연다는 소식이 방계에 퍼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몬과 케나드를 낳은 그녀는 납득하지 못했다.
못하면 케나드에게 후계위를 주면 되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니까.
“왜들 그렇게 보십니까?”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저녁 먹으러 왔느냐?”
드뇌브 후작이 묘하게 비꼬듯이 묻자, 시몬은 그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식당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열병을 앓고 난 이후부터.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들 모여 계실 줄은 몰랐군요.”
“만찬은 가족 모두가 모여 먹을 걸 나누는 일종의 의식이다. 오로지 너만이 지금껏 무시해 왔지.”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시몬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귀여운 이올린의 옆에 앉으려고 했으나, 그보다 헤라가 먼저 의자를 빼 주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말씀 들었지? 앞으로는 자주 좀 오너라.”
역시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일이 터져도 제대로 터질 것 같은 느낌.
곧 식기가 준비되고 요리가 하나둘 나왔다.
케나드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원래라면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띄우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몬이 선뜻 나서기도 애매한 상황.
헤라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미온 부인은 이제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당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헤라의 시선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가시방석이라는 말을 왜 쓰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가슴이 답답해졌다.
식사는 나중에 따로 준비시키기로 하고 일단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아버지. 갑작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사흘 후에 알데바란으로 떠날 계획입니다.”
“무슨 일로?”
“후방에서 케나드를 지원할 계획입니다. 알데바란에 있는 협력자들 관리도 좀 해야 하고요.”
굳이 세레스 가문이라는 이야기까진 꺼내지 않았다. 그러기엔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가면 가는 것이지, 왜 내 허가를 받는 것이냐?”
“제2기사단 중 일부를 차출하려고 합니다.”
“언젠 허가도 받지 않고 기사들 모아 놓고 선동하더니. 알아서 하거라.”
드뇌브 후작은 킬스톤의 오크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미온.”
“예. 각하.”
“전쟁이 끝나는 대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는 들었겠지?”
시몬은 아버지가 저렇게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마이너 마을 말씀이실까요?”
“그래. 케나드가 돌아오면 다 같이 내려가면 좋을 것 같군.”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시몬이 그러더군요. 뱃놀이하기 아주 좋은 곳이라고요.”
“허허허. 그렇지. 아주 근사한 호수가 있으니까 말이오.”
시몬은 거기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역시나 참지 못한 헤라가 테이블을 탁 쳤다.
“각하! 지금 둘째 아들이 사지로 떠났는데 한가롭게 여행이나 이야기하실 때입니까? 정말 실망스럽군요.”
“흐음. 뭐…… 그렇다고 매번 전쟁 이야기만 할 수는 없지 않소?”
“승전보가 올 때까지는 자중하셔야지요. 장병들의 사기가 꺾일까 저어됩니다. 그들도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다는 걸 잊으신 걸까요?”
“알았소.”
시몬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었다. 그러다 드뇌브 후작과 눈이 마주치곤 급하게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기왕 말이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각하. 대체 왜 방계들을 불러들이려는 것이지요?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