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아크튜러스의 방식 (3)
“마이너 마을에서 사람이 찾아왔다고?”
몽롱한 눈으로 시몬이 물었다.
소식을 전한 아크튜러스 상단의 고위 직원은 매우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공자님. 그곳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존슨이라는 자가 만남을 청했습니다. 공자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공자님이 아니라 사이먼이라는 사람이겠지.”
“아, 죄송합니다.”
시몬이 사이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지금 눈앞에 있는 직원이 바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일단 상단 본부에서 대기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신원은 확실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 상단과 체결한 계약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 처리 확실해서 좋네.”
“감사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시몬이 라니에리를 바라보았다.
“본부까지 가기 귀찮은데 이쪽으로 오라고 할까?”
“괜히 의심 갈 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사이먼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왜 만들었는지 잘 생각해 보시길.”
“쳇, 까다롭구만.”
시몬이 상단 직원에게 말했다.
“곧 찾아가겠다. 귀한 분이니 극진히 모시도록.”
“예? 아, 예!”
상단 직원이 방을 나섰다.
곁에 있던 라니에리가 의아한 듯 턱을 괴었다.
“마이너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그런 보고 없었잖아? 오크 놈들이 우리 연합군을 쓸어버렸다면 모를까.”
그러다 문득, 루아의 집에서 떠나올 때 남겼던 쪽지가 떠올랐다.
“혹시 쪽지를 보고 너무 그리운 마음에 상사병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그래서 나에게 찾아와 부탁하는 거야. 한 번만 딸을 보러 와 달라고.”
시몬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그를 바라보는 라니에리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공자님. 제가 요즘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있는데 말입니다.”
“뭔데?”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실 게 아니라 소설을 써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회귀한 후계자가 가문의 뜻을 저버리고 멋대로 행동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죠.”
“비꼬는 것도 좀 적당히 해라.”
시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가 보자고. 루아가 같이 왔을 수도 있잖아?”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아무튼 가시죠.”
“안 왔으면 네 탓이다.”
“설레발은 필패라고 하신 건 공자님이십니다.”
두 사람은 간단히 변장을 마친 뒤 바로 아크튜러스 상단 본사로 향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상단답게 본사 건물은 굉장히 크고 웅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많은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상인들이 대륙 각지에서 올라온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마치 상업지구에 들어온 것 같은 분위기.
그만큼 아크튜러스 상단 본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고위 인사는 직위값을 했다. 시몬과 라니에리가 안쪽으로 편히 들어갈 수 있도록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안에서 시몬을 기다리고 있는 건 존슨 혼자였다. 루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시몬이 탄식했다.
“이따 죄를 묻겠다. 라니에리 베텔게우스.”
“저는 라니에리가 아니라 라니입니다.”
“머리 쓰려고 해도 소용없어. 왜 불경스러운 추측을 해서는.”
시몬은 상업적인 미소와 함께 존슨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존슨 씨. 그간 어떠셨습니까?”
“아아, 저는 아주 잘 지냈습니다. 장사도 예전보다 더 잘되고 말이죠. 하하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으리!”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게 참 쉽지 않아서…….”
“아무튼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반갑네요. 앉으시죠.”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적당히 마실 것들이 테이블에 놓였다.
“알피나 마을 분점은 잘 준비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십니까?”
“너무 빨리 되는 것 같아서 제가 다 걱정입니다. 하하하하. 안 그래도 동생 녀석에게 준비 단단히 시키고 오는 길이지요.”
“혹시 빵집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시지요? 연락도 없이 오셨다길래 좀 놀랐거든요.”
“아, 그게…….”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다. 존슨의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 좀 송구한데…… 혹시 저희 집에 계실 때 좀 불편하셨습니까?”
그건 시몬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불편이라뇨?”
“아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갑자기 돌아가셔서 다들 놀랐습니다. 특히 딸아이가 많이 아쉬워해서요.”
시몬은 진지하게 라니에리를 노려보았다. 편지가 아니라 간단히 쪽지만 남기라고 한 아이디어를 낸 것은 라니에리였다.
― 네 말대로 하면 잘될 거라며?
― 왜 이리 성급하십니까?
― 아니 장인어른을 수도까지 오시게 만들었잖아!
― 누가 장인어른입니까?
― 그러게.
― 두고 보십시오. 공자님께서 만족스러운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눈빛을 교환하곤 시몬이 환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너무 편하고 좋았습니다. 매번 존슨 씨의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어서 아주 행복했지요. 그런데 좀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모두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아시다시피 접경에서의 문제도 있고 해서 말이죠.”
“오,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크튜러스의 대공자께서 평화 협정을 맺고 오셨다는 이야기 말이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다들 공자님을 칭송하고 있지요!”
“실은 대공자님을 좀 수행하느라 바빴습니다. 하하하.”
“저,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이 정도 허풍은 할 만했다. 어차피 대공자가 사이먼 본인이니까.
“그런데 도중에 또 일이 생겨서 급하게 나오게 됐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빵집에 들러서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군요. 마음이 불편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시몬이 고개를 숙이자 존슨이 깜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나으리! 저희는 그저 실수한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좀 사족이긴 한데, 영주님을 비롯한 가문의 많은 분들이 존슨 씨의 빵에 감탄했습니다. 식탁에 오를 정도로 유명해졌지요.”
“오오…….”
“앞으로 많이 바빠지실 겁니다.”
존슨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아크튜러스 영지에는 정말 많은 빵 장인들이 있다.
그런데 영주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 말은, 영지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솜씨를 갖추고 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보다 사이먼 님. 제 딸이 좀 전해 달라는 게 있었습니다.”
존슨이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편지였다.
시몬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루아가 많이 섭섭해했습니다. 나으리께서 이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다고 말이죠.”
“이거 미안하게 됐군요.”
시몬은 바로 편지를 열어 보았다.
루아의 글씨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고작 한 장짜리 편지였지만, 전생의 기억이 더해지며 감성이 풍부해졌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잘 지내고 있고, 다시 한번 꼭 뵙고 싶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시몬이 라니에리와 눈빛을 교환했다.
― 과연 남부의 현자다운 발상이었어. 베텔게우스 가문에 포상을 내리지.
― 벌써 밀린 포상이 세 건 정도 되는 것 같군요.
― 기분 탓이야. 하하하하!
시몬이 편지를 곱게 적어 품에 넣었다.
“따로 답장을 하진 않겠습니다.”
“……예?”
“조만간 마이너 마을로 내려갈 일이 있습니다. 그때 얼굴 보고 말을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걱정을 끼치게 한 것에 대한 가벼운 사과라고 할까요.”
“오오!”
잠시 당황했던 존슨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떻게든 딸과 잘 이어 주고 싶었는데, 사이먼의 마음이 아예 없진 않은 것 같아서.
시몬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이걸 전하기 위해 여기까지 오셨다고 하니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 겸사겸사 올라온 겁니다. 마침 납품해야 하는 빵도 많았고, 수도에 온 김에 자리를 좀 봐 둘까 해서요.”
“자리요?”
“예전에 권유해 주신 분점 말입니다. 그걸 한번 해 볼까 해서.”
예전에 루아에게 권한 적이 있었다. 제빵술을 빨리 배워서 분점을 운영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지만 아버지인 존슨은 제빵술을 익히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꾼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루아가 보낸 편지만큼 기쁜 일이었다. 잘 회유하면 루아를 수도에 머물게 할 수 있으니까.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크튜러스 가문의 인정을 받은 빵집이라면 당연히 수도에 분점이 있어야 하지요. 마음 같아서는 본점을 수도로 옮기라고 제안드리고 싶지만, 역시 마이너 마을을 찾는 여행자분들의 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이죠.”
“맞습니다. 으음, 제가 고민하던 것도 그 부분이었습니다. 저희 가게가 클 수 있었던 것도 마을을 찾아 주시는 모험가님 덕분인데, 괜히 본점을 옮기게 되면 뭔가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았습니다.”
“역시 존슨 씨는 크게 되실 분입니다. 그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너무 욕심부리다가는 망하지요. 하하하하.”
그때 시몬이 은밀히 라니에리에게 시선을 보냈다. 잠시 생각하던 라니에리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따님을 수도의 분점으로 보내시는 건 어떠십니까?”
“루아를요?”
“예. 뭐 큰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이 기회에 견문도 넓히고 이것저것 배우면 좋지 않나 싶어서 말이죠.”
“으음…….”
존슨이 쉽게 선택을 내리지 못하자, 시몬이 쐐기를 박았다.
“무엇보다도 루아 양이 수도에 계시면 제가 좀 더 잘 챙겨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매번 마이너 마을로 가는 건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아서 말입니다.”
“오…….”
그 이야기는 솔깃했다.
루아의 부모는 시몬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혼담을 넣고 싶었는데, 비즈니스가 걸려 있어 섣불리 말을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리적인 거리가 좁혀지고 서로 만날 기회가 많다면 자연스레 관계가 발전하지 않을까?
존슨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수도에 낼 분점에 루아와 아내를 같이 보내면 되겠군요. 녀석이 제대로 된 빵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좀 시간이 걸릴 테니 말이죠.”
“그럼 저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군요.”
시몬이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위 간부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여기 계신 존슨 씨가 어떤 분인진 알고 있지?”
“물론이지요.”
“수도에 분점을 내신다는군. 목 좋은 데 하나 잡아 드리고, 아내와 따님이 상경할 예정이니 집도 하나 알아봐.”
“얼마 전 오브렌 남작이 매각한 저택이 하나 있습니다. 그 정도면 될까요?”
“오브렌 남작의 저택? 너무 허름하지 않으려나…….”
“흠흠!”
그때 라니에리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제야 시몬은 자신이 너무 나갔음을 깨달았다.
“아니야. 저택보다는 지금 사시는 곳과 비슷한 곳으로 잡아 드리는 게 좋겠어. 너무 부담 느끼실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고위 인사가 밖으로 나갔다. 시몬이 환하게 웃으며 존슨에게 말했다.
“자, 일할 가게도 머무실 곳도 모두 해결됐습니다. 이제 올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존슨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단지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는데,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가게에 집까지 생겼으니까.
“정말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이제는 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모셔야 하는 분들이 되었지요. 투자라고 생각하시고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저희도 영주님께 좀 잘 보이고 싶어서 말이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이먼 님!”
“자자, 편하게 한잔 드시죠.”
시몬은 찻잔을 들었다.
오늘따라 차향이 너무나 감미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