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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54화 (54/120)

54화: 아크튜러스의 방식 (2)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걸 알면서도 그러신 겁니까?”

시몬은 씨익 웃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문득 과거의 여러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는 건 그런 거다. 불합리한 방법으로 가문과 영지가 잠식당할 뻔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없다니까.”

시몬은 단호했다.

“우리는 오히려 시간을 번 거야. 당분간 그쪽은 내부 단속에 시간과 인력을 낭비하겠지. 대체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거든.”

라니에리는 다시금 시몬의 회귀론을 떠올렸다.

시몬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했다. 과거로 회귀했기 때문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시몬의 말이 맞다.

아무리 내부를 단속한다고 해도, 정보가 새어 나가는 채널을 찾지 못했을 테니까.

“아무튼, 각하는 어떻게 설득하실 생각이십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려야지. 이런 일일수록 당당히 나서야 한다. 죄지은 사람처럼 굴면 진짜 죄지은 사람이 되는 거야.”

“그래도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황녀와 혼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실 거다. 후계 문제는 미궁으로 빠져들겠지만.”

라니에리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나름 방책을 생각하려는 듯했다.

한참 후, 마차가 아크튜러스 본가에 도착했다.

많은 수의 기사들이 영지를 떠났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평소라면 여기저기서 훈련하는 소리가 들려야 했지만, 고요했다.

‘케나드는 잘하고 있으려나?’

슬슬 전선에서 소식이 올 때가 되었다.

진은 알데바란의 영주가 전역을 다시 설정하는 것에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만약 임무에 실패한다면 해약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변수가 발생하지 않아야 할 텐데.’

조금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몬은 케나드의 잠재력을 믿었다.

“공자님!”

시몬이 마차에서 내리자 마침 후작 부인을 모시고 정원을 거닐고 있던 드비안느가 재빨리 걸어왔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오늘도 농땡이 피우느라 바쁘군.”

“무슨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실까? 마님하고 같이 있었어요. 그리고 사람이 고생 많으셨다고 인사까지 했으면 좀 좋게 대답해 주면 안 돼요?”

“응. 안 돼.”

드비안느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린 시절이었다면 주먹이 바로 나갔을 텐데.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후우우…… 참, 부탁하신 약초는 다 구해 놨어요. 아버지께서 단약으로 만들고 있어요. 다음 주엔 납품할 수 있을 거예요.”

“기대되는군. 로이드 가문이니 나를 실망시키진 않겠지?”

“공자님이라면 없는 것도 만들어서 실망했다고 하실 분이긴 하죠.”

“오, 잘 아네.”

“그보다 황도는 어떠셨어요?”

드비안느는 시몬이 황녀와 혼인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지인 찬스로 황실의 시녀가 될 수 있으니까.

물론 남몰래 숨겨온 속마음은 조금 달랐으나, 현실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진 않았다.

“파혼 결정을 좀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내릴 수 있었던 뜻깊은 여정이었지.”

“……진심으로요?”

“내가 굳이 너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하지. 너보다 아버지께 먼저 보고드리는 게 순서야.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

“인사는 하고 가세요!”

“나중에.”

저 멀리서 헤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시몬은 도망가듯 드뇌브 후작을 찾았다. 그리고 황도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고했다.

당연히 후작은 충격을 받았다.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그것도 황태자께?”

“예.”

“…….”

이마에 핏줄이 솟을 정도로 분노했으나, 의외로 시몬을 다그치거나 하진 않았다.

라니에리도 그렇고 시몬도 놀랐다.

불호령은 물론이고 의자가 통째로 날아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로스테 남작의 자백을 받긴 했으나, 일을 더 키운 건가.”

그 한마디로 끝이었다.

후작은 화를 거두었다. 화를 낸다고 해서 해결될 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시몬이 가져온 정보는 사건의 새로운 국면을 드러나게 했다.

후작은 그 부분에 흥미를 느꼈다.

“의외이십니다.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요?”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너의 부실한 밑천과 허풍이 동시에 드러날 거라고 생각했단다.”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어디 솔직하게 해 볼까?”

드뇌브 후작이 오러를 끌어 올리려고 하자 시몬이 빙긋 웃었다.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듯한 저 자신만만한 미소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문의 장남이었다.

“어디 핑계 한번 들어 보자꾸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기 황제가 되실 분에게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했던 너의 태도에 대해서.”

“모든 일의 배후에 태자 전하가 있다는 아주 귀중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전하의 속내도 직접 들었고 말입니다. 이 정도면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확실히 좋은 정보이긴 했다.

심지어 황태자는 후계로 지목된 케나드의 혼처까지 물었다. 시몬이 후계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후작의 엄정한 시선이 라니에리에게 향했다.

“라니에리. 네 생각은 어떠한가?”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저도 공자님과 같습니다. 분명 태자 전하는 황녀님의 치부를 가리려고 했습니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보일 테지요. 이 상황에서 알퐁스 백작가를 떠올리지 않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겁니다. 결국 황실만 유리한 정략혼이 되겠지요.”

“으음.”

시몬은 황태자가 제국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를 위해 알퐁스 백작가를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

그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알데바란과 전쟁을 벌였다면 가문이 통째로 넘어갔을지도 모르겠군.’

알데바란에게 승리를 얻는다고 해도 남부에서 오크들이 난동을 피웠을 터다.

그렇다면 황실과 인근 귀족들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알데바란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백기를 들진 않을 테니까.

드뇌브 후작은 오랜만에 소름이 돋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 이기더라도 이긴 싸움이 되진 않았을 터.’

전쟁이 끝나더라도 빚을 갚아야 하고, 심하면 도움의 대가로 영지의 일부를 할양해야 할 수도 있다. 주요 전력들이 부상을 입거나 전사해 기사단의 힘이 대폭 약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시몬의 ‘회귀론’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드뇌브 후작은 시몬의 통찰력까지 인정하지 않을 순 없었다.

‘어쨌든, 최선의 결과를 낸 것인가…….’

드뇌브 후작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울화의 불씨를 어느 정도는 없앨 수 있었다.

주인의 표정을 읽은 서기관 칼림이 껄껄 웃었다.

“이거 주군께서 한 방 먹으셨군요. 잘하셨습니다! 시몬 공자님.”

“웬일로 칭찬을 다 하십니까?”

“공자께서 전쟁을 막지 않았더라면 남부의 패권이 완전히 알퐁스 백작가로 넘어갔을 테지요. 게다가 케나드 공자께서 카펠라 공작가와 연결되어 있으니 함부로 나서지도 못할 겁니다.”

“이야, 칼림 경.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라 그런지 기분이 아주 좋군요.”

“후계를 포기한다는 말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결심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요. 이 점도 분명히 하고 싶군요.”

칼림이 다시금 드뇌브 후작에게 고했다.

“각하께서도 공자님의 공을 마땅히 치하하셔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득과 실이 같은데 어찌 공을 세웠다 할 수 있겠나?”

“각하.”

“……뭐, 칼림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시몬. 너의 수고를 폄하하진 않으마. 하지만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후계 문제를, 그것도 가주가 인정하지 않은 것을 태자 전하께 고했다는 것은 큰 문제다.”

황실에 알려졌다는 것은 황도에 있는 사교계에까지 이야기가 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황도를 넘어 제국 전역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대륙 전역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유감입니다. 아버지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따르겠느냐?”

“이 자리에서 약속합니다.”

“네가 가문을 잇지 않겠다는 소문이 퍼졌으니, 케나드는 물론이고 여러 사람이 곤욕을 치를 것이다. 나 또한 뻔한 구설에 휘말리겠지.”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가문의 방계들은 어떨지 생각해 보았느냐?”

아크튜러스 정도의 거대 가문들은 방계조차도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시몬에게도 작은아버지가 둘이나 더 있었다.

그들은 좀 떨어진 곳에서 다른 성씨로 살아가지만, 만약 후계 자리가 빈다면 지체 없이 아크튜러스 영지로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장남이 가문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차남과 방계의 다른 친족들도 가문을 이을 자격이 생기게 된다.

“그 누구도 케나드의 경지를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저 또한 이렇게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는데 감히 후계에 도전할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군요.”

“그건 네 추측일 뿐이다. 열병을 앓지 않았더냐? 너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그런데, 시몬은 오히려 웃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이 끝나면 후계위를 건 대회를 열어 주십시오. 어떤 방식이든 좋습니다. 케나드는 분명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겁니다.”

“대회라.”

“지극히 아크튜러스 가문다운 방식이지요.”

“설마 모두가 지켜보는 신성한 자리에서 케나드에게 일부러 지는 추태를 보이거나 하진 않겠지?”

“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오히려 그쪽이 케나드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결과를 낼 테니까요.”

“내 눈을 속일 생각은 하지 않길 바란다.”

드뇌브 후작이 경고했다. 시몬은 예를 취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방계들을 본가로 불러들이겠다. 칼림. 공정하게 후계위를 결정할 수 있는 무대를 기획해 보도록.”

“명을 받듭니다.”

“그럼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시몬은 방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침대에 누우니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라니에리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자로 뻗은 시몬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다 방법이 있으니까.”

“제 다음 질문이 뭔지도 아시겠지요?”

“아크튜러스의 방식이라면 역시 무투 대회가 열리겠지. 내가 방계 놈들을 다 쓸어버리고 케나드와 결승에서 만나면 돼.”

“누가 보더라도 공자께서 우위 아닙니까? 주군의 눈을 속일 수는 없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도 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뭔지 한번 잘 생각해 봐라. 머리 쓰는 게 너의 일이잖아?”

무책임하게 한마디를 툭 내뱉은 시몬은 속 편히 낮잠을 청하려 했다.

그런데 때마침 찾아온 손님이 잠을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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