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경고
“이렇게 마음 터놓고 친우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술기운이 적당히 오르자, 카인이 소탈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시몬도 꽤 취해 있었다.
이미 빈 병이 바닥에 제법 쌓여 있었다.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매일매일 새로운 고민이 생기는 자리라네. 황태자란 말이지. 제국을 이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러셨군요.”
쪼르륵!
시몬이 황태자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현 황태자 카인은 동생들과의 암투 끝에 황태자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동생들은 누명을 쓰고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노쇠한 황제는 카인의 행보를 막을 힘이 없었다.
그나마 지금은 안정을 되찾았고, 황태자의 다음 고민이 시작되려던 찰나였다.
“말썽꾸러기들을 잠재우고 나니 이제는 다른 문제들이 생기더군. 아주 골치가 아프던 차였지.”
“지방 귀족들 말씀입니까?”
“어떻게 알았나?”
“이런 말씀 드리기 대단히 죄송스럽지만, 저도 나름 후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대강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알 수 있겠더군요.”
“하하하! 역시 우리는 통하는 게 있다니까?”
기분이 좋아진 카인이 시몬과 잔을 부딪쳤다. 쨍, 하는 맑고 투명한 소리가 들렸다.
“북부의 변경백은 지금까지 충성을 보인 자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 열심히 이민족을 막아 주겠지. 서부는 최근에 나에게 충성을 맹약했고, 동부도 곧 그렇게 되겠지.”
황태자는 남부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 그리고 알퐁스 백작가가 위치한 곳이다.
그 뒷말은 네가 직접 완성하라는 황태자의 명령이기도 했다.
“혹시 태자 전하께 심려를 끼치고 있는 것이 저희와 알데바란 가문입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북부와 서부, 동부가 모두 태자 전하께 충성을 맹약했다면 남은 것은 남부밖에 없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시몬은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은밀히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황녀와 라니에리도 이때만큼은 말을 멈추고 시몬을 주목했다.
“알데바란과 알퐁스는 태자 전하께 충성을 맹약할 것입니다. 장담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군. 아크튜러스의 이름은 왜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거지?”
황태자가 씨익 웃으며 추궁했다. 시몬은 다소 뜸을 들였다. 뭔가 사정이 있다는 듯.
“설마 딴마음을 품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요.”
“무엇을 숨기고 있나? 가끔 이런 생각이 들더군. 시몬 자네는 나에게 숨기는 게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이지.”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동생인 메르세데스 황녀에게 파혼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황군을 이끌고 아크튜러스의 흔적을 지워 버리고 싶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황궁에 입궁한 지 꽤 되었는데도 그런 이야기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열병을 앓기 전까진 사소한 것이든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떨어져 있을 때는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은 편지를 보내곤 했었다.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지. 얼마나 속이 시커먼 거냐? 시몬 아크튜러스.’
하지만 황태자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시몬이 회귀했다는 것.
메르세데스 황녀가 쓰고 있는 가면이 얼마나 두꺼운지와, 아크튜러스 가문을 체스말로 이용하려는 황태자의 계략을 인지한 상태라는 것을.
“태자 전하. 자리가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독대를 청하고 싶습니다만.”
씨익 웃은 황태자가 메르세데스 황녀에게 손짓했다.
“너는 이만 나가 보거라.”
“예. 오라버니.”
황녀는 미련이 남은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으나, 명령은 거둬지지 않았다.
“제가 거처까지 모시겠습니다. 황녀 전하.”
“어머, 자상하기도 하셔라.”
라니에리가 황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황태자의 태도가 변했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더니 턱을 괴었다. 그뿐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매섭게 시몬을 노려보았다.
“너, 대체 무슨 속셈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생이 그러더군. 혼인을 깨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말이야. 내 동생이 아크튜러스 가문와 어울리지 않다는 엄청난 말을 했다지?”
황태자의 전략이 바뀌었다.
하지만 오히려 시몬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빨라질 테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엘 루나에 대해 들으셨겠군요. 일로스테 남작에 대한 것도.”
“예정대로였다면 이곳에서 정기 모임이 열렸었겠지.”
황태자가 황녀의 일탈에 협조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카인은 시몬이 당황할 줄 알았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태연했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일로스테 남작 건도 그래. 결혼 전에 애인을 사귀는 게 뭐 문제라도 되나? 까놓고 말해 네 부친도 둘째 부인에 첩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나? 도덕적인 잣대가 유연한 건가, 아니면 속된 말로 내로남불이라도 하려는 건가?”
“음, 이해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로스테 남작과는 오해를 풀었습니다. 또한 엘 루나도 소소한 일탈이라고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황태자는 궁금해졌다. 과연 그것 말고도 숨기고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전하께서 흉금을 터놓으신 것처럼 저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아까 암시하신 것처럼…… 전하께서는 제국 남부의 지배권을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 점에서 메르세데스 황녀님과 제가 맺어지는 건 아주 좋은 일이었지요.”
“귀족이라면 누구나 아는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최근에, 예상 밖의 일이 하나 벌어졌지요. 알데바란과의 평화 협정.”
순간 황태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몬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
“태자 전하께 미리 여쭙지 못하고 진행하게 된 점, 대단히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왜 송구하다고 말하나? 두 가문이 평화롭게 지낸다면 좋은 거지. 게다가 명분이 분명하지 않았던가? 오크족의 침입에 대비한다고 말이야.”
“솔직히 말해 알데바란이 눈엣가시 아니었습니까? 태자 전하의 입장에서는 말이죠.”
“…….”
황태자는 말없이 술로 목을 축였다. 시몬이 말을 계속 이었다.
“전에 태자 전하를 뵐 때도, 제가 견제를 약속했던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건 됐네. 남부의 평화를 위한 일이니. 어쨌든 자네가 메르세데스와 혼인을 하게 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야. 남부의 패자는 아직까지 아크튜러스 아니던가?”
“그 부분에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개인적인 문제입니다만…….”
“무슨 문제?”
“후계는 제 동생인 케나드에게 양보할까 합니다.”
그 말에 황태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나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후계를…… 양보한다고?”
“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농담이 지나친 것 아닌가? 아니면 너무 취한 것인가?”
“둘 다 아닙니다.”
“둘 다 아니라면 대체 뭐냔 말이다!”
황태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시몬은 침통한 표정을 연기했다.
“이기적이게도 저는 파혼의 명분을 황녀 전하에게 찾았습니다. 사실은 저에게 있음에도 말이죠. 제가 가문을 잇지 못한다면, 이 정략혼은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합니다. 특히 태자 전하의 남부 장악력에는 악영향을 끼치겠지요. 조커를 그냥 버리는 셈이니까 말입니다.”
황녀가 아크튜러스 가문과 맺어지는 이유는, 시몬이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후계가 아니라면 황녀가 결혼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진다.
시몬이 준비한 최후의 카드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와 라니에리에게만 공유했던 한마디.
가문을 잇지 않겠다.
“무슨 일이 있었나? 드뇌브 후작이 승인한 일인가? 그쪽에서 별다른 보고는 받지 못했는데?”
“충분히 해명하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은 거두어 주십시오.”
“후우…….”
“대대로 아크튜러스 가문은 강한 자가 가문을 잇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케나드에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검술의 천재이자 아크튜러스 검법을 보다 진보시킬 만한 그릇인 셈이죠.”
황태자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득 채워져 있던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런 이야기는 지금까지 없지 않았나? 대체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군.”
“그걸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동생은 이미 제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이번 원정을 마치면 더욱 강해져 돌아오겠죠. 후계위를 결정짓는 결투가 벌어진다면, 저는 동생을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쨍그랑!
황태자가 잔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의 분노는 좀처럼 풀리지 않을 듯했다.
“지금까지 네가 지껄인 말이 모두 사실이더냐?”
“모두 사실입니다. 라니에리 경이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이미 동생은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를 앞두고 있습니다.”
“젠장!”
황태자는 화를 숨기지 않았다. 잔뜩 취한 탓도 있으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파혼하려 했던 것입니다. 너무 제 입장만 생각한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그럼에도 황녀께서 저를 선택하신다면, 저는 기쁘게 혼인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황녀님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없더라도 말이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이 군사 동맹을 맺었다는 말에 심기가 불편했었다.
게다가 동생이 파혼 이야기를 듣고 왔고, 알퐁스 가문을 통해 어부지리를 취하려던 계획이 모두 중단되었다.
당연히 이대로는 혼인을 진행할 수가 없다.
결국 황태자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케나드는, 네 동생은 약혼자가 있던가?”
“있습니다.”
“어디의 누구인가?”
“카펠라 공작가의 차녀인 모니카 공녀입니다.”
카펠라 공작가는 서부의 지배자로, 아크튜러스 가문보다 역사와 전통이 긴 곳이었다.
군사력 자체만 놓고 본다면 아크튜러스보다 약하긴 하나, 과거에 성립된 혼사가 두 가문에 시너지를 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카펠라 공작가는 황실에 끼치는 영향력도 커서, 혼약을 취소할 수는 없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황태자는 다시금 언성을 높였다.
“자네는 남부를 평정하고 내게 충성을 바치겠다 맹세했다. 감히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인가!”
“최근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알퐁스 백작가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지금까지 수세에 몰려 있던 시몬의 기세가 확 변했다. 고개를 반듯이 들고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다른 마음을 품고 계셨던 것은 태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아크튜러스의 안방을 점령하고, 외가를 이용해 남부의 지배권을 좀 더 다르게 가져가려는 계획 말입니다.”
지난한 세월을 거쳐온, 아크튜러스의 진정한 후계자가 본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사실은 저희 아버지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명예로운 아크튜러스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경우라도 말이죠. 그러니, 저희의 충성을 더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완전히 마음을 읽히고 말았다.
그래서 화조차 낼 수 없었다. 오로지 이 생각만이 머릿속을 감돌았다.
‘빌어먹을 놈들.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황태자는 시몬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한참이나 고민했으나, 결국 원하는 답을 찾진 못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시몬은 아무런 통보 없이 황궁을 나서 아크튜러스 영지로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