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약속의 밤 (2)
해가 저물 무렵, 시몬은 로빈을 불렀다.
얼마 전 숙성을 위해 창가에 놓아둔 비약이 아주 잘 무르익었다.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구나. 로빈.”
그의 손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쥐여 있었다. 그것을 본 로빈은 오러 서클을 만들기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났음을 직감했다.
“저, 공자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약을 먹을 자격이 제게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좀 더 좋은 곳에 쓰여야 하는 게 아닌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코웃음을 친 시몬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달빛처럼 은은히 빛나는 단약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희 아버지 앞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 안 나나? 너를 사냥개처럼 쓰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소중히…… 아니, 이건 됐고.”
바로 옆에 라니에리도 있었다. 차마 본인이 있는데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표현을 하기가 좀 그랬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나중에 약점을 잡힐까 걱정이 되었던 것.
라니에리 정도의 수재라면 10년은 두고 놀릴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드비안느에게 소문을 내면 양쪽에서 놀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너는 아크튜러스 가문이 선택한 가신이자 기사다. 네가 먹지 못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
“작위를 받은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해요. 이 약은 역시 공자님이 드셔야 좋지 않을까요?”
걱정할 필요 없었다.
어차피 지금 단계로서는 비약을 먹는다고 해도 오러 증가 효과가 미미하다. ‘영약’급의 약을 먹어야 효과가 생긴다.
“어차피 기사들도 다 먹게 될 거다. 순서의 문제야. 며칠 더 빨리 먹는다고 뭐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 더는 거절하지 말도록.”
그제서야 로빈은 시몬이 건네는 단약을 받아 들었다.
먹기 전, 시몬이 설명했다.
“서클이 처음 생길 때는 굉장히 큰 고통이 발생한다.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통증이지. 거기에 환각까지 보일 수 있어. 도중에 미쳐 버리거나 하면 곤란한데, 괜찮겠지?”
“뭐든 참을 수 있습니다!”
“씩씩해서 좋네.”
일단 로빈을 바닥에 앉게 했다. 시몬이 일일이 자세를 교정해 주니, 가부좌를 틀고 차분히 명상하는 자세가 완성되었다.
“고비를 넘기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해라. 네 몸에 오러가 없기 때문에 저항하는 힘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다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라. 두 손을 모아 물을 떴을 때, 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지 않게 신경 쓰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예. 공자님.”
“결론적으로 오러 서클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내가 도와줄 것이니 통증만 잘 참아 봐.”
이윽고 단약이 로빈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지이이잉!
신비한 기운이 배 속에서 태동하더니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환각?’
어두컴컴한 저편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고요한 파도.
그냥 파도가 아닌, 황도 전체를 집어삼킬 만한 거대한 파도였다.
“으아!”
로빈은 아찔한 공포를 느꼈다. 도망칠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 샘솟았다.
이대로라면 파도에 쓸려 갈 것 같았다.
‘이겨 낼 수 있다. 공자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했으니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로빈의 정신력이 굳건해졌다. 동시에 몸 전체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고비를 넘긴 것이다.
시몬은 즉시 로빈의 등 뒤에 손을 대고 자신의 오러를 쏟아 냈다.
그리고, 손을 천천히 움직여 태동한 오러를 심장 쪽으로 유도하기 시작했다.
“끄억!”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허억, 헉!”
톱으로 가슴을 썰어 내는 것 같은 잔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로빈은, 노련한 사냥꾼의 후예답게 몰아치는 통증을 잘 참아 내었다.
이윽고.
“됐다.”
시몬이 손을 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심장에 영롱한 서클이 하나 박힌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하지만, 로빈은 아니었다.
“……어라?”
로빈은 자신의 맨손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지?”
“예. 뭔가 몸이 되게 가벼워진 거 같은 느낌은 드는데, 오러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평온한데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울 동안 숙제를 하나 내 주지.”
시몬은 한쪽에 놓여 있는 단검을 가져와 로빈에게 건네주었다.
“여기에 오러를 불어 넣는 연습을 해 보는 거다. 오러 수련법의 일종이라고 할까.”
“활에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좋은 발상이군. 하지만 처음부터 활에 오러를 주입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 한 손에 꼭 들어가는 이 정도의 단검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로빈이 오른손으로 검을 받았다.
시몬의 말대로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이전엔 느낄 수 없던 묘한 기운도 느껴졌다.
“심장은 피를 온몸에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오러 서클은 심장에 자리하고 있지. 즉, 심장에 있는 오러를 이용하려면 혈맥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해. 심장에 있는 피를 쥐어짜서 손바닥으로 보내는 느낌을 살려 봐라.”
로빈은 대강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방금 느껴진, 묘한 기운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움직였다.
“으으읍…….”
힘을 주니 로빈의 얼굴에 피가 몰려 새빨개졌다. 곧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지이잉!
아주 얇은 오러가 단검에 덧씌워지기 시작한 것.
그것을 목격한 시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역시 재능이 있었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로빈은 애초에 오러 서클이 들어설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은, 이미 그의 혈맥이 오러를 받아들일 준비를 끝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그것을 단번에 느끼는 것은 다른 영역이긴 하지만, 로빈이 해낼 줄 알고 있었다.
“우와, 정말 신기하네요…….”
“신기할 거 없다. 이제 오롯이 네 것이니.”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님.”
넋 놓고 오러를 바라보는 로빈에게, 시몬이 진지하게 물었다.
“너는 평범한 사람이 얻을 수 없는 힘을 얻게 됐다. 그 힘을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 생각이지?”
“어……. 그게요. 공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는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어요.”
“굳이 오래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좋아.”
로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하는 것만이 답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아버지도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터.
“저도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이 힘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뻔하지만, 좋군. 원래 그런 단순한 목표가 더욱 가치가 있을 때가 있지. 그 마음가짐을 평생 잊지 말도록.”
“예!”
“그럼 나는 라니에리와 잠시 외출할 테니 기다리지 말고 이곳에서 연습해. 쉬엄쉬엄해라. 괜히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시간이 됐음을 확인한 시몬이 라니에리와 함께 방을 나섰다. 일단은 황태자의 거처로 가 그를 밀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야 했다.
“태자 전하께서 순순히 말을 들어 주실지 걱정이군요.”
아까부터 라니에리는 오늘 자정에 예정된 ‘엘 루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과연 황녀가 예정대로 일탈을 할 것인가.
아니면 몸을 사릴 것인가.
“궁금해서 못 견딜걸? 내가 굉장한 곳이 있다고 말해 뒀거든.”
“어차피 한통속이라면, 모임이 열리는 위치도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반응을 좀 보려고. 처음 보는 곳인지 아닌지 대충은 알 수 있으니까.”
시몬은 전생의 경험을 통해 통찰력을 얻었다.
정말 극의에 도달한 사람이 아닌 이상, 표정을 숨기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 찰나의 순간 나타나는 미묘한 이질감.
그것을 포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만약 모임이 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비밀이라니까?”
“상대가 제 표정도 읽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셔야지요.”
“뭐 어떻게 하겠어? 그냥 거기에 자리 깔고 찐하게 한잔하면 되지.”
시몬의 말투에서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라니에리는 일단 걱정은 접어 두고, 시몬에게 운명을 맡겼다.
곧 두 사람이 황태자의 거처로 들어섰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라. 기다리던 참인데 딱 왔군.”
카인 태자는 이미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굴이 불긋한 게 조금 취한 듯 보였다.
테이블엔 술잔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안주들이 깔려 있었다.
‘움직이지 않겠다는 심산인가?’
그 모습을 보니 황태자와 황녀가 서로의 치부를 가려 주고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일이 점점 어렵게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몬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시작하셨군요.”
“아아, 뭐 밤늦게 한잔하는 건 습관이라서.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앉지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좋은 자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황태자인 내가 머무는 이 거처보다 더 좋은 자리가 있다고?”
카인은 은근히 황실의 권위를 내세웠다. 그러나 아크튜러스 가문도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물론이죠. 아주 은밀한 곳이기도 해서요. 태자 전하와 이렇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흔한 기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시몬은, 남들이 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라도 감추고 있는 사람처럼 은밀히 말했다.
황태자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 가 볼까?”
“이쪽으로 오시죠.”
“내가 모르는 비밀 공간은 없는데,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매우 궁금하군.”
시몬이 앞장서 황태자를 밀실로 안내했다.
‘엘 루나’가 열리는 밀실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시몬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돌아 기둥 뒤의 벽을 툭 건드렸다.
쿠쿵!
한 면처럼 보이던 벽이 놀랍게도 입을 벌렸다.
‘빙고.’
안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말은, 누군가 이미 판을 깔아 놓고 있다는 이야기.
“호오, 이런 곳에 밀실이 있을 줄이야.”
“모르고 계셨습니까?”
“처음 온 곳이군. 자네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황녀 전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뒷말은 일부러 생략했다. 애정을 나누기 위한 곳이라는 말은 실례에 가까웠으니까.
“자, 그럼 들어가시죠.”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복도가 이어졌고, 그 끝에 내부 공간이 뚫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오실 줄 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황녀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테이블 위엔 고급스러운 음식과 술이 잔뜩 깔려 있었다. 누구도 손을 대지 않은 것처럼 새것이었고, 깨끗했다.
게다가 밀실엔 황녀 혼자였다.
‘당했군.’
시몬은 라니에리를 응시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상했던 두 가지 경우의 수 중, 가장 좋지 않은 쪽이 전개된 것이다.
‘엘 루나’는 열리지 않았다.
“어머,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두 분이 여기에 오실 줄 알고 이렇게 미리 준비해 놨답니다. 라니에리 경까지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죠.”
“실례했습니다. 저는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아뇨. 같이 들어요. 라니에리 경이 오라버니의 아카데미 동기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매번 수석을 차지했다던데, 그 비결을 좀 알고 싶은데요?”
남자라면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지만, 딱히 황녀의 말을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공자님도 앉으시죠?”
시몬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 와중에 은근히 황태자와 황녀의 반응을 살폈다. 두 사람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시몬은 확신했다.
‘황태자도 한통속이군.’
오히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시몬은 준비해 놓은 한 수를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술병을 들었다.
“오늘은 왠지 취하고 싶군요. 자,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