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약속의 밤 (1)
마차가 멈춰선 곳은 일로스테 남작의 저택이었다. 늦은 밤 등장한 마차에 집사가 긴장했다.
곧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메르세데스 황녀였다.
그리고 마차를 몬 사람은 제너릭 경이었다.
“허헉!”
집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낫을 든 영혼수확자가 나타난 것보다 더욱 무서운 장면이었다.
제너릭 혼자 왔을 때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거기에 황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가문이 몰락하려는 징조인가 싶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빨리 사표를 쓰는 건데.
“뭘 그리 놀라? 시몬 공자가 왔다 갔다면 내가 올 거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나?”
“화, 황녀님을 뵙습니다…….”
“안에 고자 있지?”
고자라는 표현에 다시금 흠칫 놀란 집사가 두 사람을 저택 안으로 들였다.
일로스테 남작은 여전히 병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시몬이 다녀간 이후로 총기를 되찾았다. 절망적이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지금은 묘한 자신감마저 보이고 있었다.
황녀가 들어오자 남작이 몸을 일으켰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뭐야?”
“무엇이 말입니까?”
“너무 평온하잖아.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나한테 달려들 줄 알았는데? 장사 밑천이 순식간에 사라진 충격이 좀 크지 않았어?”
“아아.”
일로스테는 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모든 섭리를 망라한 은자처럼.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세상을 살다 보면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는 거고, 그때 깨닫는 것도 있는 법이지요.”
“현자처럼 굴지 마. 당장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송구합니다. 시몬 공자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래.”
제너릭 경이 한쪽에서 의자를 끌어다 주었다. 메르세데스 황녀가 편히 앉았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랬다가는 이번엔 모가지를 잘라 버릴 테니까.”
“말씀하십시오.”
“오늘 시몬 공자가 입궁했어. 듣기로는 대판 싸웠다던데?”
“싸웠다고요? 이상하군요.”
일로스테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히려 시몬 공자는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말이죠. 오해는 잘 풀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지요.”
“정말이야?”
“어찌 제가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이제 남은 거라곤 목숨줄 하나뿐인데 말입니다.”
“흐응…….”
뭔가 이상했다.
분명히 아크튜러스의 시몬이라는 사람이라면 검을 들고 날뛰어야 했다.
그가 편지를 보냈고, 더는 만남을 이어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을 때 죽이지 않은 이유는 굳이 손에 불필요한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차피 황도로 올라온 시몬이 일로스테 남작을 죽여 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헛소리하지 말라구? 시몬은 자존심이 강해. 다른 것도 아니고 애인을 뺏겼는데 가만히 있었다고?”
“솔직히 탄복했습니다. 마음씨가 얼마나 깊은지 가늠조차 되지 않더군요.”
“그럴 리가 없다니까?”
“대체 무슨 말씀이 듣고 싶은 겁니까?”
일로스테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황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뭐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더니, 지렁이였어?”
“더 이상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어쭈?”
제너릭 경이 검을 꺼내 들려고 했다. 그러자 황녀가 손을 뻗어 그를 말렸다.
“이대로 죽이면 재미없지. 사교계에 고자라는 소문을 퍼트릴 거야. 그 굴욕감을 맛보면서 천천히 죽어 가라구?”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뭐야, 그 태도. 진짜 마음에 안 드네.”
“그보다 황녀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엘 루나에 다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뜻밖의 이야기였다. 황녀는 흥미가 돌았는지 눈이 살짝 커졌다.
“엘 루나에 와서 뭐 하게? 휘두를 무기도 없는데 말이지?”
“……다른 건 몰라도 약을 하지 못하는 건 참기가 어렵더군요. 조용히 있겠습니다. 시키는 모든 일을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받아 주십시오.”
“이야, 약이 무섭긴 무섭나 봐. 이렇게 중독성이 강할 줄은 몰랐네.”
황녀는 마치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황녀도 약에 깊이 중독되어 있었다.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우연히 접하게 된 약이 그녀를 순식간에 수렁으로 빠트리고 말았다. 다소 허영심은 있었으나 이 정도로 악랄한 여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밝고 명랑한 축에 속하는 아이였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황녀는 약에 중독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기도 했다.
그래서 황태자와 거래를 했다.
자신의 일탈을 보호해 달라고.
대신 황태자는 남부 지역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크튜러스 후작가의 장남과 혼사가 성립된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좀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으려나? 네가 시몬 공자와 짜고 나를 엿 먹이려는 걸 수도 있잖아?”
“뭐든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흐응, 그럼 일단 구두부터 핥아 볼래? 먼지가 좀 묻어서 말인데.”
황녀가 빨간 구두를 슥 내밀었다. 일로스테는 지체 없이 무릎을 꿇고 기어갔다.
“진짜 한다고?”
황녀는 깜짝 놀랐다.
일로스테 남작은 자존심이 센 남자였다. 그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구두를 핥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외려 그래서 기분이 나빠졌다.
“저리 꺼져! 더러운 침 뭍이지 말고.”
“황녀님…… 제발…….”
“알았어. 네 딱한 사정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니 좀 더 고민해 볼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어떻게 할까나~”
메르세데스 황녀가 제너릭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너릭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를 더 이상 끌어들이면 안 된다는 신호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목을 치고 싶었다. 황녀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살려 두고 싶지 않았다.
“제너릭 경은 안 된다고 하는데?”
“황녀님! 저는 황녀님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풉. 옛정? 무슨 정?”
황녀가 비웃었다.
“넌 그냥 내 노리개였을 뿐이야. 너 같은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네가 모르는 남자들도 어마어마하게 많다고?”
“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분명 제가 유일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 마음은 원래 갈대 같은 거야. 다다익선이라는 말도 모르니?”
“황녀님!”
황녀는 배시시 웃으면서도 금방 싫증을 느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줏대가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때 머리가 띵해진 황녀가 품에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여니 곱게 갈린 하얀 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황녀는 손으로 살짝 덜어 그것을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주 적은 양.
그럼에도 믿을 수 없는 쾌락이 온몸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성은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아아…… 아무튼 잘 알았다구. 시몬 공자와 오해를 풀었다니…… 다행이네. 의외로 멍청한 구석이…… 있었단 말이지?”
“황녀님. 저도 좀…….”
“꺼져.”
피식 웃은 황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엉거주춤 일어난 일로스테는 매서운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분노에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약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하나 생겼다.
‘반드시 네년을 파멸시키겠다!’
책상에 앉은 일로스테는 즉시 종이를 꺼내 시몬에게 보낼 밀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뭐 하십니까?”
늦은 밤, 거처로 들어온 라니에리가 질문을 던졌다. 시몬은 턱을 괴고 창틀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약 숙성 중.”
“로빈 경에게 먹일 약입니까?”
“약속한 대로 오러 서클을 만들어 줘야 하니까. 그런데 로빈 경은?”
“좀 더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이 자식이, 내가 화장실 갈 때도 따라다니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제가 허락한 일입니다.”
시몬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다소 삐뚤어졌어도, 라니에리는 이렇게 챙겨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도서관은 어땠어?”
“환상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은퇴하면 이곳의 사서 자리를 좀 알아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딜 도망가려고 해? 내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야 한다는 거 몰라? 네가 없으면 소는 누가 키워?”
“그건 좀 잔인한데요. 나이 지긋이 먹으면 좀 놔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라. 황립 도서관보다 훨씬 더 대단한 곳을 만들어 주지.”
왠지 허언인 것 같지는 않아, 라니에리는 반문하지 않았다.
시몬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는 일로스테가 보낸 밀서를 건넸다.
“일로스테 경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 전한 편지입니다.”
“보나 마나 뻔하지.”
시몬은 편지를 열어 보았다. 대충 훑어보곤 편지에 불을 붙였다.
“황녀 성격상 가만히 앉아 있을 리는 없거든. 찾아가서 추궁했겠지.”
“일로스테 경이 잘 대처한 모양이군요. 밀서를 보냈다는 건 숨이 붙어 있다는 증거니까요.”
“그러게.”
“뭐라 적혀 있었습니까?”
“엘 루나에 다시 초대해 달라고 청했다는군. 구두까지 핥았단다.”
사실 시몬이 떠나기 전에 흘린 한마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일단 오해를 푼 것으로 하자고.
“문제는 평소대로 모임이 열리나 하는 것일 텐데…….”
“태자 전하의 일정은 괜찮습니까?”
“다행히 괜찮다고 하시더군. 오랜만에 술 한잔하자고 말씀드리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괜찮다면 너도 같이 오라고 하시던데?”
일단 금요일 밤에 밀실을 덮치는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시몬이 말한 대로 ‘엘 루나’가 열리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피어오르는 꺼림칙한 느낌을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일이 너무나도 잘 풀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번 일은 내가 전생에서 경험하지 못한 일이야.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을 뿐.’
두 번 사는 인생이라고 해도, 지금부터는 모든 게 처음인 일들이었다.
시몬이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확률은 반반입니다. 그래도 한쪽을 꼽으라면, 저는 황녀가 몸을 사릴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태자 전하가 개입한 문제라면 더욱 조심하겠지요. 게다가 아끼던 인형이 불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역시 그런가.”
시몬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황태자를 데리고 밀실로 향한다. 보기 좋게 문을 열었는데, 안은 텅 비어 있다.
결국 빈손으로 아크튜러스 영지로 돌아가게 되고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라니에리가 일로스테 남작에 관한 걸 증언해 준다고 해도 명분이 세워지지 않아.’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시몬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 라니에리는 방해하지 않고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회심의 미소가 시몬의 입가에 걸렸다.
“그래. 그런 방법이…… 좋은 계획이 생각났다. 현장 증거 확보에 실패해도 이 결혼을 물릴 방법을.”
“무엇입니까?”
“당연히 알려 줄 수 없지. 네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할 게 뻔하거든.”
“위험한 일이군요.”
“어. 상당히.”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됐지만, 라니에리는 확인차 묻기로 했다.
“자발적으로 일로스테 경의 뒤를 이으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시몬의 눈에 경멸이 서렸다.
“미쳤냐? 그랬다간 루아가 슬퍼할 거야.”
“마치 연인이 된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설레발은 필패라고 하신 건 공자님이십니다.”
“뭐, 시간문제지.”
시몬의 미소가 짙어졌다. 라니에리는 다소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약속의 금요일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