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배후의 배후 (2)
“어서 와라. 시몬 공자.”
황태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시몬을 맞았다.
통상적인 만남이었다면 조금은 움직여도 좋다. 하지만 그는 권위적이며 자신의 지위를 대단히 잘 활용하는 야심가였다.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와 분명한 격차를 보여 주려는 것.
물론 시몬에겐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황제로 모시던 남자였으니까.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병환은 좀 어떤가? 동생에게 듣기론, 상태가 꽤…… 좋지 않았다고 하던데?”
꽤 좋지 않았다는 말 하나에 굉장히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뒤에 붙은 말 줄임 때문에.
아무래도 황녀가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모양이다.
‘쉽지 않겠군.’
가장 좋은 전개는 황녀 혼자 파혼에 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이었다.
오만한 사람은 자신의 직감을 믿고 행동한다. 그 과정에서 실수가 나온다.
시몬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 ‘실수’.
하지만 여기에 황태자가 개입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뭐, 애초에 태자가 뒤를 봐주고 있었다면 바로 일러바쳤겠지. 이 새끼 미친 것 같다고.’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야 한다.
원래도 명석한 두뇌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전생의 기억까지 더해지니 방법은 금방 나왔다.
시몬은 해맑게 웃었다.
“이거 태자 전하께 심려를 끼쳐 드린 것 같습니다. 불충을 용서하시길. 저는 이제 완전히 나았습니다. 마음까지 다소 병들어 있었으나 이제는 괜찮습니다.”
“오, 그런가?”
“그러합니다. 알데바란에 가서 바람을 쐬기도 했고 말이죠.”
“그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가 전쟁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이쪽에서도 꽤 유명하거든.”
“황실의 신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견하군.”
이번엔 시몬이 황녀를 바라보며 근사하게 예를 취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거침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늘따라 더욱 눈부십니다. 창공에 떠오른 달보다 청명하게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황녀님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메르세데스 황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시몬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시몬은 회심의 한 수를 던졌다.
“영지에서의 일은 사과드립니다. 황녀님. 못난 저 때문에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고 황도로 돌아가셨지요.”
시몬이 고개를 들어 황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황녀는 태연히 웃었으나, 황태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괜찮답니다. 내 사랑.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니 정말 좋네요. 사실 이렇게 빨리 황도로 올 줄은 몰랐답니다.”
제대로 먹혔군.
그렇게 자신한 시몬은 다시금 공세를 취했다. 이번에는 좀 더 대담한 공격이 필요했다.
“제가 좀 오해를 했던 모양입니다.”
“오해요?”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일로스테 남작에게 찾아가 정식으로 사과했습니다.”
“……사과를 했다고요?”
“예.”
황녀는 내심 혼란스러웠다.
일로스테 남작에게 찾아가 죄를 묻겠다고 편지를 보낸 것은 시몬이었다. 그런데 황도에 올라오자마자 만나서 오해를 풀었다니?
시몬이 예상한 것처럼 황녀는 이미 대부분의 사실을 황태자와 공유하고 있었다.
시몬 공자가 변심한 것 같다고.
아크튜러스 가문의 충성심도 의심해 봐야 하는 상황이 왔다고.
가장 중요한 일로스테 이야기는 빼놓고 말이다.
‘거기가 아니라 목을 자르라고 할 걸 그랬나?’
제너릭 경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큼 황녀는 남 탓하기에 능숙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웃는 수밖에.
“아아, 다행이에요. 그와는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답니다. 이렇게 내 마음을 알아주시니 정말 행복해요.”
“무한한 영광입니다. 황녀 전하.”
“전하라는 표현은 어색하네요. 예전처럼 애칭으로 불러 주시겠어요?”
애칭이 뭐였더라.
퍼뜩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악랄한 전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몬은 연기 천재를 연기했다.
“예. 황녀님. 다만 태자 전하께서 계시는 자리인 만큼 나중을 기약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겠어요.”
“좋습니다.”
그제야 시몬이 몸을 일으켰다. 황녀는 시종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고, 황태자는 라니에리를 알아보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라니에리. 그대도 오랜만이군.”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자네만 보면 마음이 영 좋지 않단 말이지.”
황태자가 농담을 건넸다. 라니에리는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이 친구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늘 수석을 놓쳤어. 정말 얄밉게도 공부를 잘한단 말이야.”
“송구스럽습니다. 전하.”
“하하하. 이 사람, 정색하긴. 칭찬이야.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지. 덕분에 열심히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으니까.”
어린 시절 아카데미에 입학한 시몬과는 달리 라니에리는 조금 늦게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그 동기생 중 하나가 바로 카인 태자였다.
시몬은 이 두 사람이 동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매번 라니에리가 수석을 차지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시몬이 라니에리에게 은근히 시선을 보냈다.
― 왜 얘기 안 했냐?
― 저는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태자 전하와 동기지요. 그렇다면 태자 전하를 매번 이겼다는 말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굳이 얘기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요.
― 그래, 너 잘났다.
인사치레가 끝나자 황태자가 내궁 안쪽을 가리키며 직접 쉴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황궁은 외부만큼 내부도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정말 좋군요. 올 때마다 감탄이 나옵니다.”
바닥에 깔린 레드카펫은 밖에 깔린 것과 조금 달랐다. 가장자리에 황금색 실로 장식되어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흉부를 묘사한 조각상과 근사한 갑옷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 품격을 더했다. 투구로 표정을 가린 근위병들도 곳곳에 보였다.
“이번엔 좀 오래 머물다 갔으면 좋겠군. 그래야 메르세데스와 정을 좀 더 쌓을 수 있지 않겠나?”
“저도 그러길 소망합니다.”
“아까 알데바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예. 전하.”
“남부 지방의 상황은 어떠한가? 듣기로 오크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더군.”
알 거 다 알면서 이렇게 물어보는 뻔뻔함이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시몬은 그 정보의 출처가 궁금했다. 아마도 알퐁스 백작가일 터.
“오크족의 영웅으로 불리는 뮬라타라는 자가 모든 부족을 통합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옥한 땅이지요. 그래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찾아 북진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북진이라. 제국의 입장에서는 실로 좋지 못한 소식이로군.”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이 서로 협력하기로 했으니까 말입니다.”
“으음.”
“이미 연합군이 킬스톤 지방으로 출병했습니다. 곧 승전을 소식을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듣기에 아주 좋은 소리였다.
‘보통이라면 황실에 손을 벌릴 만한 상황이니까.’
오크족의 준동은 여타의 이종족이나 몬스터의 위협과는 차원이 다르다.
즉, 남부가 뚫리게 되면 제국의 안위 또한 그만큼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
그것을 빌미로 지원군이나 군비 물자를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아크튜러스 가문에서는 황실에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눈앞의 이익을 좇다가는 큰 걸 놓치는 법이지.’
다소의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이번 일을 큰 공으로 부풀려 황실에 빚을 지우겠다는 것이 시몬과 드뇌브 후작의 계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두 부자의 의견은 이 부분만큼은 일치했다.
“실로 든든하군. 폐하께서 친히 명을 내리시지 않았는데도 제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다니 말이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줄 압니다.”
“세상엔 도둑놈들이 많네.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남의 등이나 쳐 먹는 놈들이 많지.”
“곧 태자 전하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그때는 많은 것들이 바로잡힐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시몬이 은근히 비위를 맞추자 황태자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렇다고 방심할 시몬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아까 연합군이 출병했다고 했는데, 왜 자네가 사령관으로 참전하지 않은 건가? 내가 알기로 아크튜러스의 사령관은 자네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엔 동생에게 기회를 줬습니다.”
“동생이라면, 케나드 공자?”
“예. 지금까지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보냈습니다.”
“오크들은 흉포하기로 소문난 놈들인데, 경험치고 너무 가혹한 건 아닌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케나드의 경지는 저와 비슷합니다. 오히려 저보다 출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지요.”
황태자가 사뭇 놀랐다.
열병을 앓고 난 이후 처음 보는 자리였다. 과거에는 동생을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칭찬하니 이상할 수밖에.
“자네가 동생을 그리 띄워 주는 건 처음이군.”
“앞으로도 자주 있을 것입니다.”
“싫어하지 않았던가?”
“열병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더군요.”
“방심하지 말게. 아크튜러스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을 계속 쥐고 있고 싶다면 말이지.”
시몬은 대답 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주 자리를 잇지 않겠다는 말은 지금으로써는 불필요했다.
잠시 후, 도착한 방은 이곳이 황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매우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마음에 드는가?”
“평생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태자 전하.”
“며칠 정도 있다 갈 생각인가?”
“오래는 있지 못할 것입니다. 가능하면 영지에서 전황을 파악해야 좋을 것 같습니다.”
뒷짐을 진 황태자가 거만한 눈으로 시몬을 쳐다보았다.
“그 전에 하나 분명히 하고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온 김에 메르세데스와 약혼식을 치르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모두의 시선이 시몬을 향했다.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시몬은 덤덤히 웃었다.
“이미 구두로 혼인을 약조한 사이입니다. 급할 게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예식을 올리는 것은 저희 군의 사기가 저하될까 우려됩니다.”
“흐음, 그런가.”
“돌아가서 아버지와 함께 적당한 날을 찾아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네. 편히 쉬게.”
카인 태자가 방을 나섰다. 한숨 돌린 시몬은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흐아, 정말 힘든 하루로군. 사방에 함정이 깔린 기분이야.”
“잘하셨습니다. 전쟁 핑계는 정말 절묘했습니다. 당분간은 약혼식 이야기가 없을 것 같군요.”
“그 정도 파악도 못 하고 올라오는 건 자살행위지.”
“그것보다 의외였습니다. 황녀님께 오해를 풀었다고 하신 것 말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 황태자가.”
라니에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엘 루나는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커.”
“지금도 그 가능성은 유효하다고 봅니다.”
“그래도 해 봐야 하지 않겠어? 황녀의 방탕함이 먼저인지 황태자의 경계심이 먼저인지 저울질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금요일까지는 앞으로 이틀이나 남았다. 금요일 자정, 시몬은 황태자를 데리고 밀실을 공개할 계획을 세웠다.
“만약 엘 루나가 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밀실이 텅 비었으면 태자 전하와 술 한잔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의심하실 텐데요.”
“의심은 이미 시작됐어. 내가 황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말이지.”
시몬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황궁에서의 첫 밤이 조용히 지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늦은 밤.
작은 마차 하나가 황궁을 조용히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