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배후의 배후 (1)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만 더 묻자.”
“뭐든지.”
일로스테는 정말 뭐든 실토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제 시몬이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메르세데스 황녀와 알퐁스 백작가. 이 두 이름을 듣고 떠오르는 거에 대해서 전부 말해 봐.”
“알퐁스 백작가 말이오?”
“괜히 뺄 거 없어. 우리도 웬만한 건 다 알고 있거든. 그냥 확인차 묻는 거라고 할까?”
그래서 라니에리를 안으로 들인 것이었다.
물론, 일로스테의 증언만으로는 법적인 효력을 얻기 어렵다. 황녀가 알퐁스 백작가와 직결되어 있다는 객관적인 단서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시몬은 라니에리가 필요했다. 아버지인 드뇌브 후작을 설득하기 위해서.
라니에리가 일로스테의 자백을 듣고 그것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후작의 신임을 얻었고, 무엇보다도 시몬의 말은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뜻을 짐작한 듯 라니에리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일로스테의 말을 경청했다.
“자세히 들은 건 없소. 약에 취해 중얼거리는 것만 들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소?”
“최근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이 전쟁 직전까지 갔다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소.”
“그 배후에 있던 게 알퐁스 백작가라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
일로스테는 정말 깜짝 놀랐다.
만약 이 이야기를 다른 귀족들이 듣는다면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원래 사이가 좋지 않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전쟁은 필연적 결과다.
물론 그렇게 전개되었다면 황실 차원에서 중재안이 나왔을 테지만.
“그러니까, 두 가문을 이간질하려고 했던 게 알퐁스 백작가라는 것이오?”
“그래. 첩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아주 깨끗한 정보거든.”
회귀 전의 경험.
그것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시몬의 변심으로 미래가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회귀한 건 열병에서 회복된 직후야. 이미 그때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지.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래서 시몬이 이렇게 과감하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으음,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소.”
“읊어 봐.”
“외가의 힘을 빌려 남부를 평정하겠다는 말이었던 것 같소. 그때는 무슨 헛소린가 했는데, 지금 이야기를 들어 보니 공자의 가문과 연관되어 있었던 말인 것 같소.”
“남부의 대표적인 두 가문이 우리와 알데바란이니까. 그렇지?”
“맞습니다.”
라니에리가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일로스테는 자신의 기억에 확신이 없는 듯했다.
“그때는 나도 취해 있어서 기억은 정확하지 않소. 또 남부와 북부를 헷갈렸을 수도 있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네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설마 황녀를 법정에 세울 생각이오?”
“나는 지는 싸움은 하지 않아. 이기는 싸움만 하지.”
그럴 생각이 없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 말에 일로스테는 안도한 듯했다.
“아무튼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목숨을 보장해 주실 수 있는 거요?”
“정 안 되면 황도 생활을 접고 아크튜러스에서의 새 출발을 도와주도록 하지.”
전혀 나쁜 것 없는 제안이다.
다른 가문이라면 몰라도 아크튜러스의 가신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든든한 뒷배가 생긴다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고맙소. 이 은혜는…….”
“은혜를 갚을 생각 하지 말고 속죄할 생각을 해야지? 네가 황녀와 놀아난 건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과정만 놓고 본다면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거니까.”
“뭐든 하겠소. 공자를 위해서라면.”
그의 눈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이쯤이면 됐다, 생각한 시몬이 표정을 풀었다.
“당분간 손님 받지 말고 얌전히 지내도록. 가끔 와서 소식을 전하지. 일단 우리는 오해를 푼 걸로 하고.”
“고맙소. 공자.”
“밀실의 위치 좀 대충이라도 그려서 줘 봐.”
펜을 꺼낸 일로스테는 ‘엘 루나’ 모임이 열리는 밀실의 위치를 제법 상세히 그려 내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물론. 대충 어디인지 알 것 같아. 수고했다. 편히 쉬도록.”
시몬과 라니에리, 그리고 로빈은 저택을 나섰다.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도 일로스테 남작은 현관 앞까지 배웅을 나섰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남자라면 누구도 웃지 못했다.
“황도에는 얼마나 계실 예정이오?”
“적어도 금요일까지는 있어야 하니, 일주일 정도는 있다 가겠지.”
“알겠소. 몸조심하시오.”
“불안하면 먼저 이곳을 떠나도 된다. 가문에는 오늘 바로 연락을 넣어 둘 테니까.”
“아니오.”
의외의 말에 시몬이 흥미를 보였다.
“혹시 내 도움이 더 필요할 수도 있으니…… 공자가 떠날 때까지는 이곳에 있겠소.”
“생각보다 용기는 있었군.”
“살펴 가시오.”
시몬과 라니에리가 마차에 올랐다. 로빈은 말에 올라 마차를 호위했다.
“일로스테 경을 보면서 뭔가 느껴지는 거 없냐?”
“큰 부정을 저지른 대가치고는 양호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조심해라. 네 미래일 수도 있어.”
“적어도 여자 하나에 휘둘리는 공자님보다는 제가 나을 것 같습니다만.”
맞는 말이라 반박하지 못했다.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몬이 화제를 돌렸다.
“잠깐 내 전생 이야기 좀 들어 볼래?”
“해 보십시오.”
라니에리는 요즘 황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차원 이동에 관한 공상 소설을 접하는 것처럼 마음을 비웠다.
“전생에서는 결국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이 싸우게 돼. 황실이 제시한 중재안이 먹히지 않고 서로 총력전을 펼치게 되지.”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했다.
침략하고 침략당하는 전쟁이 이어졌다.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아크튜러스 가문이라고 해도, 전장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필연적으로 수많은 피해가 이어졌고, 죄 없는 영지민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전쟁이 되었겠군요.”
“결국 알데바란의 본성을 점령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피해는 걷잡을 수 없었지. 자연스레 가문의 힘이 약해졌고, 그때 치고 나온 게 알퐁스 가문이었어.”
“예전에 잠깐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님께서 계속 뒤를 캐고 계신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런데 좀 이상한 생각이 들더라고?”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라니에리는 안경을 슥 밀어 올렸다.
“이상한 생각이요?”
“알퐁스 가문이 메르세데스 황녀의 외가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그리고 알퐁스 가문도 나름 야망이 있는 곳이라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말이야. 그런데 황녀가 어떤 이득을 얻으려고 어부지리를 쓰려는 걸까?”
“그야…… 외척의 힘을 키우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황제 자리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데도?”
당연한 질문처럼 보였다.
그러나 라니에리는 그 평범한 물음에 숨은 함의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설마, 다른 사람이 황녀의 배후에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전생에서는 전후 피해 복구를 위해 자금난에 시달렸고, 전쟁 물자 보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챙긴 알퐁스 가문이 알데바란을 대신해 거대 가문의 지위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 가문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기존에 세웠던 ‘비밀 계획’은 다른 방향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이상하잖아. 알퐁스 놈들이 남부에서 힘 좀 쓰게 된다고 해도 황녀에게 조금도 도움이 될 일이 없단 말이지? 어차피 아크튜러스의 안주인이 되었으니까.”
“그렇긴 하지요. 야망이 있다면 모를까.”
“만약 오래전, 황태자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면?”
시몬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생각해 봐. 황녀의 일탈이 철저히 비밀로 유지될 수 있을까? 노쇠한 황제라면 몰라도 황태자는 다를 것 같은데.”
“입막음하는 조건으로 황태자에게 협력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더한 조건이 있을지도 모르지.”
전생을 떠올려 보면 말년에 일어난 대륙 전쟁에 아크튜러스 가문이 선봉에 서게 된다.
시몬은 그 사실에서 단서를 얻었다.
“다른 유력 가문을 제치고 왜 우리 가문이 대륙 전쟁에서 앞장섰어야 했을까?”
“전생에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선봉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적의 예기를 꺾는 중요한 전투일 테니까 말이죠.”
“나만 소드 마스터였던 게 아니야. 다른 친구들도 있었지.”
“메르세데스 황녀와 결혼했기 때문입니까?”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황태자의 체스 말로 사용됐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야.”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결국 대륙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부와 명예를 얻긴 하지만, 만약 패배했다면 멸문을 피하지 못했을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태자 전하를 이번 계획에 끌어들이려는 거군요. 이제야 조금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듭니다.”
“역시, 이래서 네가 마음에 든다니까?”
“저는 황녀께서 이런 일을 독단으로 벌인다는 것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책략은 확실한 누군가가 이득을 보는 방향으로 수립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죠.”
“내 말이.”
“그렇다면 결국 황녀님과의 싸움이 아닌, 태자 전하와의 싸움이 되는 것이겠군요.”
“싸움까지는 아니고. 뭐, 즉위하기 전에 좀 확실히 해 두고 싶으신 거겠지. 그 정도는 누구나 다 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터이니.”
“혼인부터 막아야 한다. 결혼 잘못하면 인생 끝장나는 거야.”
아무리 황립 아카데미 수석 출신이라고 해도, 그 말만큼은 라니에리는 공감하지 못했다.
“근데 황태자께서 어찌하든 공자님과는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공자님은 케나드 공자님이 가문을 잇기를 바라고 계시니까 말이죠.”
“네 똑똑한 두뇌를 비꼬는 것에 낭비하지 마라.”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대륙에 찾아올 위기는 앞으로도 많아. 케나드가 체스 말로 이용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해야지.”
“가끔은 무섭군요.”
“또 뭐가.”
“공자님의 픽션이 팩트가 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시몬은 웃고 말았다. 오히려 픽션이라고 생각해 주는 게 고마웠다. 굳이 입 아프게 해명할 필요 없으니까.
* * *
다음 날, 시몬은 황실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으로 입장했다.
리겔 제국.
대륙의 패자이며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절대 강자. 그들이 세운 황궁은 그 어떤 인간이 만든 건축물보다 화려했으며 웅장했다.
“이런 곳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공자께서 가문을 이으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괜히 영지민들 고생하게 만들 순 없지.”
문득 루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이너 마을에 묵었던 그 며칠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았다. 이런 화려한 궁전보다도 루아의 집처럼 작고 정겨운 곳이 훨씬 좋았다.
“루아 양에겐 소식 없었어?”
“없었습니다.”
“편지 하나 보내면 안 될까?”
“안 됩니다. 정확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상대와 검술을 겨룰 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행동일 겁니다.”
“…….”
“말씀이 없는 걸 보니 정확한 비유였군요.”
“그래. 니가 짱이다.”
마차가 멈춰 섰고, 시몬과 라니에리가 길게 깔린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리고 레드카펫의 끝엔 몇 명의 황족이 서 있었다.
메르세데스 황녀는 물론, 황태자인 카인도 함께였다. 전생에서 함께했던 모습이 겹치며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이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랜만이군요. 폐하.’
시몬이 그쪽을 향해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