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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47화 (47/120)

47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2)

일로스테 남작과의 만남은 급작스럽게 성사되었다.

‘거절할 수 없었겠지. 그랬다가는 본인의 죄를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

하지만 서로 만난다고 해서 일로스테 남작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추궁을 당할 것이고, 그것에 대해 변명해야 했으니까.

라니에리는 의문을 표했다.

“그래도 좀 의아합니다. 일로스테 남작이 공자님을 만날 이유는 전혀 없을 텐데 말이죠. 황녀님과의 일 또한 그저 흔한 염문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일 텐데요.”

“그게 진실이니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네가 정말 충성스러운 참모라면, 내가 매번 회귀했다는 이야기 좀 하지 않게 해 줄래?”

워낙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하는 터라 라니에리는 알겠다 대답하고 끝냈다.

시몬은 이번 사건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궁지에 몰린 거야. 고양이 앞의 생쥐 꼴이 된 거지. 혹시라도 하는 마음으로 만나겠다는 거다.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일로스테 남작이 공자님께 도움을 청한다는 말씀입니까?”

“나라면 그럴 것 같은데? 궁금하지 않을까?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까지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나름 논리가 있는 말이라 라니에리는 더는 반론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몬은 라니에리와 로빈을 데리고 일로스테 남작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남작 가문치고 으리으리한 내부가 펼쳐졌다.

‘어지간히 해 처먹어야지 이건 너무하잖아?’

일로스테 남작의 가문은 그리 유명한 가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대륙에서 이름난 상단을 거느리지도 않았다.

기사들의 수도 적고 사용인들의 수도 적다.

그럼에도 이런 부를 쌓을 수 있다는 것은 권력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관계가 오래 지속되어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서 오십시오. 시몬 공자님.”

집사가 굳은 표정으로 시몬을 맞았다.

“아크튜러스의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게 다야?”

“예?”

귀빈식 접대는 결코 아니었다.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 환대하는 그런 그림은 아니었으니까.

“이게 다냐고.”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광이라는 것치고 환영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아크튜러스 가문이었다면 딸랑 집사 하나 내보내는 식으로 손님을 맞지는 않아.”

“아, 그것이…….”

“뭐, 됐다. 분위기는 대충 알 것 같으니까.”

초상집 분위기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집사는 시몬을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일로스테 남작이 누워 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영 좋지 않은 곳을 당했나?’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불로 하반신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릿한 미소가 시몬의 입가에 걸렸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꼴이 안타깝게 됐네. 일로스테 경.”

“으으윽…….”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의 근처엔 두 명의 호위 기사가 근엄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시몬은 개의치 않고 가까이 다가가 이불을 확 들췄다.

“어딜!”

“그 손 놓으시오!”

기사들이 검을 뽑으려고 하며 위협했다. 하지만 시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크헉!”

“오, 오러가…….”

4서클의 오러를 개방해 기사들을 향해 쏘아 내었다. 기사들은 가슴을 쥐어짜며 고통에 신음했다.

“괜히 내 몸에 손대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나지막이 경고한 시몬은 이불 속을 들여다보았다.

약초 냄새가 그윽했다.

일로스테 남작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는데, 다리와 다리 사이가 허전했다. 응당 튀어나와야 할 그 부분은 붕대로 밋밋하게 감겨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잘렸군.”

“…….”

“누구의 짓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바람둥이의 결말치고는 너무 잔인한가?”

시몬의 조롱에 일로스테가 소리쳤다.

“이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좀 더 너한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애들 내보내. 어차피 허수아비들뿐인 것 같은데.”

“……모두 물러가라.”

명이 떨어지자 기사와 하녀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 시몬도 라니에리와 로빈을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이제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어떻게 알았나?”

“그게 궁금한 사람의 자세야? 좀 더 공손하게 지껄여야지.”

“흥, 듣던 것보다 오만한 놈이군.”

여전히 태도가 고쳐지지 않았다.

시몬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버릇처럼 검을 만지작거리며.

“이봐, 일로스테 남작.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험한 꼴 당한 마당에 또다시 험한 꼴 당하지 않으려면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네 궁금증을 해결해 주려고 귀한 시간 쪼개서 여기에 온 게 아니거든.”

“하! 이 꼴이 되었는데 더 살아서 무엇 하지?”

“그래? 그럼 이번엔 내가 모가지를 잘라 줄까?”

압도적인 한마디에 일로스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명분은 충분해. 결투를 안 받을 수가 없겠지. 나는 황녀와 혼인을 이야기하는 사이니까. 네가 저지른 그 파렴치한 짓을 만천하에 알린다면 모두가 너를 죽이라고 소리칠 거다.”

“…….”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일로스테가 몸을 일으켰다.

시몬의 말이 모두 맞았다.

이제는 자존심을 세우는 게 아니라 목숨을 구걸해야 할 때였다. 황녀의 변덕은 종잡을 수 없었다.

변덕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분명히 알게 되었다. 메르세데스 황녀는 미친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하하하하.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그런데 하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소. 공자.”

“내가 황녀와 너 사이의 부정행위를 어떻게 알았냐 하는 거?”

일로스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지.”

“그런 애매모호한 말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안 받아들이면 어쩔 건데?”

“…….”

“넌 배신당한 거야. 멍청아.”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쿵, 하고 움직이는 듯한 한마디. 시몬은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 지식을 토대로 위계를 펼쳤다.

“배신이라니?”

“너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먼저 깐 건 황녀라고.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격이지.”

“말도 안 되는……!”

“내가 괜히 열병으로 쓰러진 줄 알아?”

시몬은 뻔뻔하게 다그쳤다.

조금이라도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면 의심부터 했을 터. 그러나 일로스테는 모든 것을 잃은 불행한 사람이었다.

“다른 왕국의 왕족이라면 이해해. 뭐, 불어오는 봄바람에 잠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고작 남작 나부랭이와 몸을 섞었다고 하는데 눈이 안 돌아가겠나?”

“…….”

“이게 네가 알고 싶은 사건의 전말이다.”

“허무하군.”

귀족으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모든 것을 잃었다. 허탈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황녀의 눈 밖에 난 거지?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을, 결혼을 약속한 사람에게 말할 정도라면?”

“나도 모르겠소.”

“모든 현상엔 이유가 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조금이라도 걸리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봐.”

시몬의 압박이 거세지자, 무언가를 떠올린 일로스테 남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설마…… 그것 때문에?”

“뭔데?”

일로스테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한참 후에 그의 입이 열렸다.

“그…… 약을 먹고 잠깐 다른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소.”

“미친 새끼.”

시몬은 한숨이 나왔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이처럼 딱 어울리는 순간이 또 있을까.

“하지만 황녀가 알 수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지?”

스스로 묻는다 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몬이 대답했다.

“황녀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거 아냐? 황녀는 실력 좋은 수하들을 부리고 있지. 특히 제너릭 경은 수준급의 기사야. 그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나 또한 미행을 당할 정도였으니까.”

“으으…….”

“결국 끼리끼리 놀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는 거네. 지금이야 어디 하나 잘린 걸로 끝났겠지만, 다음은 목이 잘릴 거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중요한 부위가 잘린 것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택으로 들이닥친 제너릭 경은 무력을 사용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밖으로 새어 나갈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그러자 공포감이 확 몰려왔다.

“이, 이제 어찌하면 좋소? 시몬 공자. 날 좀 도와주시오! 제발!”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군.”

바로 그 절실함을 원했던 시몬은 의자를 끌어다 일로스테 옆에 앉았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면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야. 황녀의 치부를 잡아서 협박하는 거지.”

“협박이 통할 상대가 아니오.”

“그건 네 생각이고. ‘엘 루나’라는 모임, 알지?”

“……!”

잠시간의 침묵을 지켜본 시몬은 자신의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음을 직감했다.

‘역시 이자도 엘 루나의 멤버였군. 긴가민가했는데 내 기억이 맞았어.’

시몬의 입가에 악랄한 미소가 걸렸다.

“듣기로 아주 난잡한 모임이라고 하더라고. 서로 물고 빠는 건 기본이고 금지된 약까지 쓴다고 하던데, 맞나?”

“그게…….”

“목숨이 걸린 일이야. 제대로 대답해.”

“……맞소.”

시몬은 마치 이단심문관으로 빙의한 것처럼 철저히 그를 몰아붙였다.

“황녀야 황족이니 죄를 피할 수 있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붙잡히면 얄짤없이 모가지가 날아갈 텐데 간이 얼마나 부어터진 거냐?”

“화, 황녀가 괜찮다고 했소!”

“믿을 사람 말을 믿어야지.”

이제는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황녀는 정말 위험한 사람이라고.

“얼마나 자주 모이는 거야?”

“매주 금요일 밤.”

“금요일 밤이라…… 며칠 남지 않았군. 비밀 모임이 열리는 밀실, 어딘지 알고 있지?”

“알고 있소. 설마, 그곳을 사람들에게 공개할 생각이오?”

“그럴 리가 있냐. 그럼 협박을 못 하잖아.”

시몬은 미리 계획한 바를 말했다.

“이번 계획에 황태자를 끌어들일 거다.”

“황태자님을……?”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튀어나왔다.

오히려 이런 일이 있을 때 피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황족이었다.

제국의 황태자라면, 황제 다음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다간 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요!”

“걱정하지 마. 입막음의 대가로 네 목숨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할 거니까. 오히려 황실에서 유일하게 협상이 통하는 상대라고 봐야지.”

황태자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메르세데스 황녀를 정말 끔찍이도 아꼈다.

그래서 제국의 유력 가문인 아크튜러스와 다리를 놓아 준 것이기도 했다.

즉, 황녀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적극 변호할 권력자는 황태자밖에 없다.

“그런데 공자는 무엇 때문에 나를 돕는 것이오?”

“말은 제대로 해라. 돕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거지.”

“어쨌든!”

“파혼.”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많은 귀족들이 모인 연회에서 황태자는 시몬에게 혼인을 권했다.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린 건 아니지만, 황녀와 맺어진 건 모두 황태자 때문이다. 그러니까 책임을 지게 해야지. 안타깝게도 내 입으로 파혼 이야기는 할 수 없는 처지라서.”

“파혼이라…….”

“약에 쩔은 미친 여자와 결혼할 수는 없는 거잖아?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아랫도리에서 다시금 싸한 느낌이 올라왔다.

잠시 생각에 잠긴 일로스테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시몬 공자. 내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시오!”

“좋은 눈빛이군.”

하지만 시몬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일단 그는 밖에 대기하고 있던 라니에리를 안으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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