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거절할 수 없는 제안 (1)
“뮬라타는 왜 생포하라고 하신 겁니까?”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라니에리가 물었다.
“가능하다면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아, 이럴 땐 내 오크라고 해야 하나?”
“위험합니다. 야만적인 놈들이니까요.”
“놈들도 지성이 있고 문명을 이루고 있어. 너무 편향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설마 힘이 세니 밭을 잘 갈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지요?”
“하하하. 설마 그러겠냐?”
그래도 한번 이야기는 나눠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몬은 오크어를 할 줄 안다. 전생의 기억 덕분이었다.
오크는 야만적이고 호전적이며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선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간들의 평가였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종족이기도 하지. 특히 뮬라타는 은원을 중시했었어.’
가장 좋은 건 등용하는 것이다.
아크튜러스의 기사로 편입시켜 호위나 신병 훈련 등의 주요 임무를 맡기는 것.
라니에리에겐 로빈을 배정해 주었으나 정작 자신은 아직 호위를 구하지 못했다.
게다가 오크족은 전투에 통달해 있다.
병사나 기사의 기초 전투술을 가르친다면 분명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터.
‘다른 오크라면 몰라도 뮬라타라면 거절할 거야. 포부가 큰 남자니까. 누군가의 밑에서 일할 만한 타입은 아니지.’
그래서 잡아 오면 그의 목숨을 한 번 살려 줄 생각이다. 그렇다면 뮬라타는 시몬을 은인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 은원은 나중에 긴히 쓸 일이 있을 거고.’
시몬의 표정이 점점 사악해지자 라니에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또 흉계를 꾸미시는 겁니까?”
“흉계라니? 무슨 섭섭한 말씀을.”
“오크를 부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도 생각하셔야지요.”
“내 사람을 만든다는 게 꼭 내 옆에 둔다는 건 아니다. 진 경을 봐. 내 옆에 없어도 열심히 내가 시킨 일 하고 있잖아?”
“진 경이 공자님의 사람이었습니까?”
“반쯤은.”
라니에리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꼬박꼬박 해약을 보내 줘야겠군요.”
“그건 안 돼. 일을 잘했을 때 보내 줘야지. 미리 챙기면 버릇 나빠진다.”
“알겠습니다.”
시몬은 그길로 드뇌브 후작을 만나러 갔다. 군단 사령관으로서 회의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라니에리는 좋은 걸 보여 준다며 로빈을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시몬은 부디 그것이 어른의 세계가 아니기를 바랐다.
“이렇게 빨리 회의가 끝났다고? 어찌 되었더냐?”
“제1기사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한스 경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시몬은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선뜻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결정하셨을까요? 어떤 기사단을 파견할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야 지금까지의 전공과 가능성을 생각했겠지. 지리적으로 좋지 않은 곳이니 전술 이해도도 중요하겠고.”
“그렇군요.”
“그 모든 것을 고려해서 결정한 결과더냐?”
“아닙니다. 주사위를 굴렸습니다.”
“……뭐라?”
드뇌브 후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
남부 대륙의 안정, 나아가서는 제국의 안위에도 영향을 끼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랜 숙적이었던 알데바란 가문과 평화 협정을 맺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그 명운이 걸린 전쟁에 주사위를 굴렸다니, 잠시간 할 말이 없어질 수밖에.
“설명, 아니. 해명이 필요한 일이로구나.”
“저는 두 기사단 모두 동등한 전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은 차이는 운이라고 생각했죠. 전쟁에서도 운이 크게 작용하지 않습니까?”
“기사들의 반발은?”
“전혀 없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주사위의 숫자 차이가 7이 났기 때문에 오히려 반발이 적었다. 행운의 숫자이자 치욕스러운 숫자였기 때문에.
“이상한 일이로구나. 다들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어쨌든 결론은 금방 나왔습니다. 대응 전략도 전달했고 내일 출병만 하면 끝입니다. 전쟁은 반드시 우리가 승리할 겁니다.”
“으음.”
여전히 수상쩍었다.
하지만 드뇌브 후작은 끝내 납득했다. 열병을 앓은 이후로 시몬은 변했다. 좀 더 긍정적으로.
그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케나드는 내일 출병할 테고, 이제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저도 바로 황도로 올라갈까 합니다.”
얼마 전 시몬이 드뇌브 후작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황도로 올라가 담판을 짓겠다고.
“계획은 세웠느냐?”
“우선 일로스테 남작을 좀 만나 보려고 합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지 한번 확인해야 하거든요.”
“목숨은 왜?”
“제가 얼마 전 편지를 보냈습니다. 곧 황도로 올라가 죄를 묻겠다고 말이죠.”
“증거도 없이 그렇게 보냈다고?”
“답장이 없더군요.”
시몬이 씨익 웃었다.
“아마 편지를 받자마자 황녀에게 달려갔을 겁니다. 천성이 유약한 자라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겠죠. 어쩌면 만남을 청산했을 수도 있고.”
“그게 목숨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메르세데스 황녀의 성격상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질질 짜는 남자는 혐오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자연사로 위장하든, 아니면 어딘가를 잘라 버리든 조치했겠지요.”
“마치 경험해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질리도록 경험했지요.”
후작은 침음을 흘렸다.
만약 시몬이 보낸 편지가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면 가문 차원에서 항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답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확실한 심증이 서는 일.
“황도에 가서는 어디서 머물 생각이더냐?”
“황궁에서 머물 생각입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황녀와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쪽에서도 별말 하지 못할 겁니다.”
“굳이 황궁에 머물 필요가 있느냐?”
“증거를 잡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가서 황금보다 더욱 근사한 증거를 잡을 생각입니다.”
전생의 기억은 실로 큰 도움이 되었다.
대륙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시몬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황궁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얻는다.
황궁엔 수많은 밀실이 존재한다.
메르세데스가 난잡한 모임을 하는 공간도 그곳 중 하나임을, 특권을 행사하는 도중 알게 되었다.
‘찾아서 까발려 버리면 그만이지.’
황녀의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져야 했다. 그래야 파혼 이야기의 명분이 선다.
하지만 시몬은 좀 더 근사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문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하거라. 알겠나?”
“오히려 이번 일로 세상 사람들은 아크튜러스 가문의 위대함을 다시금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만만하구나.”
“언제 제 말이 틀린 적이 있었습니까?”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드뇌브 후작은 나가라고 손짓했다. 꾸벅 예를 취한 시몬은 황도로 갈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 *
아크튜러스의 후계자가 황도에 들른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것은 황도의 사교계였다.
자식을 자랑하기 위해, 혹은 가문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연회를 준비했던 귀족들은 서로 약속한 것처럼 일정을 뒤로 미뤘다.
그리고 시몬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귀찮군.”
시몬은 근사한 글귀로 쓰인 초대장을 휙휙 넘겨 보았다. 저마다 핑계는 좋았다.
“초대장이 몇 개나 온 거야?”
“오늘만 열 개입니다. 내일은 더 오겠지요.”
“귀찮긴 한데 기분은 좋네.”
시몬은 초대장을 다 읽지도 않고 테이블로 던졌다. 그리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곳은 부유한 사람들만 묵을 수 있는 초호화 호텔이었다.
1박에 무려 500만 실링이나 하는 곳.
그래서인지 내부 장식은 호화찬란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물론 뜻밖의 활쏘기 시합으로 얻은 4억 실링이 있었기 때문에 시몬은 돈을 쓰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보다 황실에서 사람이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네.”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 공자님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말이죠.”
“미운털 박힌 건가?”
“그래도 할 말은 없을 겁니다.”
만약 황녀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길로 파혼 통보를 했을 거다. 아크튜러스 영지까지 찾아온 사람을 채 한 시간도 만나 주지 않고 돌려보냈으니까.
그것 자체로도 황실에 대한 큰 무례다.
하지만 시몬은 당당했다.
“먼저 돌아간 건 황녀 쪽이라고. 내 잘못이 아니지. 기껏 저녁 연회도 준비했는데 본 척도 안 하고 돌아가 버렸잖아? 우리도 손해가 막심했다고.”
“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만, 공자님의 특정 태도가 황녀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넌 누구 편이냐?”
“저는 명예로운 아크튜러스의 편이지요.”
“하, 진짜.”
시몬의 타깃이 바뀌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로빈에게 꽂혔다.
“로빈 경. 대강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지?”
“아, 예…….”
“파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로빈은 두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질문이 날아왔다.
하지만 로빈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라니에리의 조언을 떠올렸다.
귀족이면 귀족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파혼의 이유가 분명하다면 공자님께서 마음먹으신 대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역시. 황립 아카데미 졸업생보다 사냥꾼의 후예가 훨씬 낫구만.”
“아, 그런 건 아니고요…….”
“부끄러워할 것 없다. 너는 자랑스러운 아크튜러스의 기사니까. 쟤는 기사 작위도 없다고. 팔 힘도 없어서 시위도 못 당길걸?”
하지만 전혀 대미지가 들어가지 않았는지 라니에리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중간에 껴서 곤혹스러운 것은 로빈뿐이었다.
바로 그때, 노크가 들렸다.
로빈이 직접 나가 문을 열었다. 매우 고급스러운 의복을 걸친 남자가 머리를 조아렸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시몬 공자님. 황녀님께서 보내셔서 찾아뵈었습니다.”
“들어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가 보내서 왔다고 했는데도 시몬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시몬 공자님. 황녀님께서 공자님을 초대하셨습니다. 이런 허름한 곳에 묵는 것보단 황궁에서 머무시는 것이 어떠실지요?”
“아아, 황궁, 좋지. 그런데 어쩌나. 보다시피 이렇게 초대장이 많이 와서 말이야.”
시몬은 테이블에 널브러진 초대장을 가리켰다. 남자가 살짝 당황했다.
“오,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래도 공자님께서는 황녀님과 혼인을 약속한 사이가 아니십니까? 마땅히 황궁에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황녀님께서 그렇게 전하라고 하셨나?”
“예. 가능하면 지금 바로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사자가 한 말에서 황녀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다.
‘아직 여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재미있는 일이었다. 시몬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줬으면 좋겠는데.”
“언제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일로스테 남작과 선약이 있어서 말이지. 황녀께 고하면 이해해 주실 거다.”
시몬은 굳이 일로스테 남작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그에게 흘렸다.
이제 일로스테 남작은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될 터.
“그렇다고 황녀님의 성의를 저버릴 순 없으니 내일 낮에 입궁하는 것으로 정리하지.”
“알겠습니다. 미리 가서 준비해 놓겠습니다. 공자님.”
사자가 방을 나가자 시몬은 기지개를 켰다. 이어 라니에리에게 명했다.
“일로스테 남작한테 연락해. 오늘 밤에 면상 좀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