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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자는 쉬고 싶다-44화 (44/120)

44화: 균열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이 동맹을 맺었다고?”

“정확히 말하면 동맹은 아닙니다. 일종의 군사적 협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게 그거 아냐? 서로 돕겠다는 거잖아?”

황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최근 아크튜러스와 알데바란 사이의 긴장이 극도로 느슨해지면서 접경의 병력이 철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전해진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이렇게 된다면 알퐁스 백작가를 움직여 어부지리를 취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지게 된다.

“미치지 않고서야 상대 군대를 영지로 끌어들이는 걸 허락해? 아무리 오크 놈들이 날뛸 준비를 한다고 쳐도 말이야.”

“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황녀님.”

“무슨 뒷거래가 있었던 걸까?”

“확인 중입니다만, 마땅히 걸리는 건 없었습니다.”

“지랄 맞네.”

거친 말이 서슴없이 쏟아졌다. 지금은 상관없었다. 제너릭 경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시몬 공자가 내 계획을 눈치챘을 리는 없고. 엘 루나 건 때문에 아예 정신이 나가 있었다고.”

황녀는 그때를 떠올렸다.

목숨을 앗아 갈 뻔한 열병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고 했다.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난잡한 비밀 모임에서 활동하고, 거기에 애인까지 있다고 하면서 절규했었다.

당연하게도, 메르세데스 황녀는 그것이 시몬의 만점짜리 연기였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도저히 지금 상황을 짚을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어. 아무래도 어디선가 정보가 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는데?”

“좀 더 입단속을 잘하라고 전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얌전히 지내라고 해. 괜히 어중간하게 건들다가 오크와 싸워야 하는 군대가 알퐁스 백작령으로 가게 되면 곤란하니까.”

“예.”

“시몬은 뭐 하고 있대?”

“저택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 같습니다. 특이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라니에리는 아크튜러스 저택과 본가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변장하고 돌아다니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도 있어 정보원을 몇 명 더 배치했습니다.”

다행히도 황녀와 제너릭 경은 시몬이 서부에서 로빈을 데려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 그렇지. 저택 내부에 첩자 심는 건?”

“곧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기대하겠어.”

그때 밖에서 손님을 아뢰는 목소리가 들렸다.

메르세데스 황녀는 들어오라고 명했고, 제너릭 경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 석상처럼 바로 섰다.

“황녀님!”

안으로 급히 들어온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협박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 남자는 황녀와 은밀히 정을 나누고 있던 일로스테 남작. 피부가 뽀얗고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유약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오, 내 사랑. 이리도 급하게 어쩐 일이에요? 내 품이 그리워서 그새 참지 못하고 달려온 걸까요? 후훗.”

“화, 황녀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이요?”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시몬 공자가 저에게 편지를 보냈단 말입니다!”

“편지?”

사랑스럽던 표정이 일순 차갑게 바뀌었다. 미간이 일그러졌다.

“뭐래요?”

“직접 보십시오.”

일로스테 남작은 편지를 건넸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곧 황도로 올라가 죄를 묻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오히려 짧은 말에 담긴 함축이 강하게 전해질 때가 있는데 지금 이 편지가 딱 그랬다.

“어떻게 시몬 공자가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겁니까?”

아크튜러스의 장남은 강하다.

만약 황도로 찾아와 결투를 신청한다면 너무나도 허무하게 목이 달아나거나 겁쟁이라는 조롱을 받을 것이다.

황녀는 일이 복잡하게 꼬임을 느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왜 그걸 나한테 추궁하듯 따지는 거지요? 먼저 연회장에서 날 유혹했던 건 그대일 텐데?”

“화, 황녀님!”

“설마 이번 일을 내 탓으로 돌리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그건 너무 남자답지 못한 일인데.”

사실과 다른 일이었다.

먼저 손을 내민 것은 황녀 쪽이었고, 대담히 옷을 벗은 것도 황녀 쪽이었다. 일로스테 남작에게 죄가 있다면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한 것뿐이었다.

“만약…… 만약 시몬 공자가 올라와 저를 추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친놈 취급하세요. 증거도 없이 따지는 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만약 증거가 있다면요?”

요염하게 웃은 황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로스테 남작에게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지며 뒤로 돈 황녀가 그를 껴안았다.

“으응, 내 사랑. 뭐가 그리도 걱정이에요? 시몬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예요. 증거가 있을 리가 있어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시몬 공자는 냉철한 사람입니다. 앞뒤 구분 않고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거 참 시끄럽네.”

“……헉!”

황녀가 밀치자 일로스테 남작은 볼품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 정도로 연약한 남자였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린아이처럼 질질 짜면 어쩌라는 거야? 정말 천박하군. 어째 요즘 얼굴도 안 비추더니, 고작 이 종이 쪼가리에 쫄아서 저택에 처박혀 있었던 거야?”

사아악!

살기가 퍼져 나갔다.

“흐, 히익!”

황녀가 내뿜는 살기가 아니었다. 바로 옆, 제너릭 경이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조금만 더 무례를 범했다가는 당장 목을 치겠다고.

“저. 저는 더 이상 이 만남을 이어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황녀님. 당분간은 보기 어려울 겁니다. 아뇨, 앞으로는 만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말 이대로 끝낼 생각이에요?”

“그 수밖엔 방법이 없습니다. 용서하시길.”

“일로스테 남작.”

황녀의 부름에 일로스테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마지막 기회를 줄 거예요.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정말 이대로 끝낼 생각인가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가 버렸네.”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댄 황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사내가 이리도 없다니. 미치지만 않았더라면 시몬이 정말 내 장난감으로는 딱이었는데.”

“오늘 일로스테 남작은 선을 넘었습니다. 처리할까요?”

“아니. 됐어. 요즘 사람 좀 많이 죽였잖아. 당분간은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히 오해받으면 피곤해지니까. 대신…… 손은 좀 쓸 필요는 있겠네.”

“하명하십시오.”

“남자구실을 못 하게 해 버려. 두 번 다시 비리비리한 면상 보고 싶지 않으니까.”

“명을 따릅니다.”

제너릭 경이 나가자, 황녀는 바닥에 떨어진 시몬의 편지를 주워 들었다.

“곧 황도로 오시겠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요? 시몬 아크튜러스.”

꽈아악.

신경질적으로 편지를 구긴 황녀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 * *

아크튜러스 저택의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던 라니에리가 로빈을 데리고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오, 잘 어울리는데?”

시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로빈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걸쳤고, 허리엔 중검을, 등엔 화살통과 활을 장비하고 있었다.

“무기고에서 적당한 장비를 좀 골라 주었습니다. 케나드 도련님께서 직접 도와주셨지요.”

“케나드가? 이야, 은근히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도련님께서 다음에 꼭 궁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 잘됐구나.”

첫인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무예에 언제나 갈증을 느끼고 있을 케나드라면 좋은 스승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로빈은 엄청난 속도로 가문 사람들과 친해지고 있었다.

‘실력이 좋으면 어딜 가나 호감을 얻는 법이니까. 게다가 나이도 어리고.’

가문에 나타나 처음으로 대결을 했던 게 가주인 드뇌브 후작이었다. 그 이상의 데뷔전은 치를 수 없다.

“잠시 자리 좀 옮길까?”

“예!”

“저쪽으로 가시죠.”

마침 적당한 곳을 봐 둔 라니에리가 두 사람을 테라스로 안내했다. 선선한 밤공기를 타고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조용한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시몬이 불평했다.

“여기는 네가 레이디들 꼬실 때 쓰는 곳 아니냐? 국정을 논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데.”

“공자님이 국정을 논하는 것은, 제가 레이디를 대하는 것과 같은 위상에 있습니다.”

“묘하게 설득력 있네.”

이번엔 시몬이 양보했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내일 군단 회의가 열릴 것이다. 파병 시기와 규모에 대해 논의할 거야. 나는 전선으로 가지 않을 거고, 대신 케나드를 추천할 계획이다.”

“그럼에도 공자님께서 전선으로 갈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제로다. 킬스톤에서의 상황이 나빠진다면 내가 가야겠지만, 케나드를 믿는다.”

“그럼 저희는 황도로 가게 되겠군요.”

“그렇게 되겠지. 안 그래도 편지 하나 보내 놨거든? 일로스테 남작에게.”

“뭐라고 보내셨습니까?”

“네가 한 짓 다 알고 있으니 얼굴 한번 보자고.”

“변화가 생기겠군요.”

역시 라니에리였다.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날 만나려고 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황녀가 그 전에 손을 댈 가능성도 있고. 그래도 한번 만나 보려는 게 내 계획이다.”

“편지는 좀 섣불렀다고 생각합니다.”

“왜?”

“애초에 공자님께서는 밀회 현장을 덮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편지를 보내면 밀회는 성립되지 않을 겁니다. 조심할 테니까요.”

타당한 반론이었다. 하지만 시몬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오히려 나는 일로스테 남작을 내 편으로 끌어올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보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일로스테 남작도 한 패거리야. 놈을 잘 구워삶으면 엘 루나가 내 손에 들어온다.”

“가능성이 너무 희박합니다. 정보를 넘긴다는 건 황녀님을 배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일 텐데요?”

“안 하고 구경만 하는 것보단 낫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가 보면 알아.”

그제야 시몬은 로빈을 돌아보았다.

“지금 우리가 한 얘기,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냐?”

“아뇨. 전혀…….”

“앞으로도 모른 척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황도로 가게 될 거야. 거기에서 해야 할 일은 라니에리를 지키는 것이다. 아마 실력 좋은 놈들이 따라붙겠지. 여차하면 우릴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을 좀 망설였다.

로빈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오러 유저가 아닌데 괜찮을까요? 전에 물리쳤다던 첩자는 오러 유저라고 들었습니다.”

“충분히 가능해. 너도 오러 유저가 되면 그만이니까.”

로빈은 잠시 묻고 싶었다.

‘오러 유저’라는 게 그렇게 마음먹는다고 쉽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면 좀 어렵지. 1서클을 2서클로 만드는 건 쉽지만, 서클이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하거든.”

“그런데 어떻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는 걸까요?”

“이미 네 심장엔 서클이 만들어질 자리가 충분히 만들어져 있다.”

“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몬은 이미 확인했다. 로빈의 심장에 서클이 들어설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만든 비약 먹고 수련 조금만 하면 온전히 네 힘으로 쓸 수 있게 될 거다.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님.”

“앞으로 감사할 일 많을 테니 고맙다는 말은 가끔씩만 하자. 안 하고는 못 배기겠다면 한 달에 한 번씩만 해. 명령이다.”

“예!”

“그럼 마저 즐기러 가자고? 친구들.”

시몬이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었다.

빛나는 무대가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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