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서부의 신궁 (2)
“떠오르는 신성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아이쿠. 이런. 술을 벌써 다 마셔 버렸군요.”
시몬이 빈 잔을 흔들거리니, 못 기다리던 남자 하나가 술을 더 시켜 주었다.
새롭게 잔을 받은 시몬은 마치 잘나가는 음유시인으로 빙의한 듯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아크튜러스 가문엔 실력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라는 말이오?”
“선생님들께서는 서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남자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시몬의 스토리텔링은 가히 예술이었다. 간지러운 부분을 바로 긁어 주지 않고 애를 태우게 했다.
“그…… 뭐냐. 오러를 쓰는 거 아니오?”
“맞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강함의 단계지요. 1서클부터 3서클까지는 소드 비기너, 4서클에서 6서클까지는 소드 익스퍼트, 그리고 7서클부터 9서클까지는 소드 마스터라고 불립니다.”
“복잡한 건 집어치우고 어서 본론만 말하쇼!”
“맞아!”
“이건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강한지 알아야 여러분들이 제 이야기에 납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지.”
시몬은 씨익 웃으며 건배를 제안했다. 남자들은 마지못해 잔을 부딪쳐 주었다.
“그분은 얼마 전까지 2서클의 오러 유저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재능을 각성해 3서클의 경지에 올라섰죠. 거기에 아크튜러스 검식의 살검까지 마스터한 아주 천재 중의 천재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누구냐니까?”
“얼른!”
“바로…… 케나드 공자.”
“뭣?”
사내들이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주된 대화 주제는 시몬 공자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믿을 수가 없군. 어떻게 케나드 공자께서?”
“아주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시몬 공자님은 3서클 오러 유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걸 케나드 공자께서는 단기간에 따라잡은 겁니다.”
“허허…….”
“그런 비밀이 있었다니.”
사실 시몬은 3서클로 알려져 있지만, 며칠 전 비약을 복용함으로써 4서클 오러 유저가 되었다. 물론 그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버지께서 들으시면 무척 서운해하시겠군.’
아크튜러스의 장남이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것은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야 할 자랑 중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검증 요구가 있기 전엔 말하지 않을 거다.’
먼저 알린다고 해서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문만 무성한 채 넘어가는 것이 후계위를 피하는 지름길이었다.
“케나드 공자님이 그렇게나 강했다니…….”
“금시초문이오.”
시몬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건방지게 말했다.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기사단 내부에서는 케나드 공자님의 재능과 노력을 아주 높이 사고 있지요. 밤낮으로 검을 쉬지 않는 분이 바로 케나드 공자십니다. 그런 분이 어찌 실력이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긴, 아주 부지런한 분이라고는 들었네.”
“그래도 장남은 시몬 공자님이신데…….”
“장남이든 차남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허! 자네 위험한 말을 하는군.”
시몬은 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하는 것으로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저는 케나드 공자님이 앞으로 주목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여러분께 전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믿고 말고는 선생님들의 자유고.”
사내들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잔과 잔이 부딪치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
“음, 확실히 도움이 되는 정보였소. 뭔가 시야가 탁 트인 듯한 기분인걸?”
“하긴, 노력이 최고의 재능이긴 하지. 노력해야 성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몬 공자님과 같은 오러 서클을 가지고 있다니…… 경쟁이 치열해지겠어.”
사내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꺼냈다.
특히 마지막 말이 인상 깊었다.
‘경쟁이 치열해질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 케나드가 후계를 이어도 크게 반감은 없다는 의미와도 같지.’
시몬이 신경 쓰고 있던 다른 요인은 바로 ‘민심’이었다.
그것은 명분과도 직결된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겠군.’
술이 얼근하게 올라서일까.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동생에게 독박을 씌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아크튜러스의 가주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동생도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좋아하지 않더라도 시킬 생각이었지만.
“아이고. 이거 안주가 떨어졌군요. 이번엔 좀 근사한 걸로 먹어 보고 싶은데…….”
“너무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군.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키게! 오늘 자네 뽕을 뽑아 버릴 거니까!”
“하하하. 바라던 바입니다.”
시몬은 술집에서 제일 비싼 안주를 시켰다.
그리고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아까 오크 놈들과 전쟁한다고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케나드 공자께서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신다는 거.”
“뭐라고? 시몬 공자님이 아니라?”
“예.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수도에서는 이걸로 말이 많습니다.”
“허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게!”
“빨리!”
시몬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 잔을 치우고 새롭게 채워진 잔을 받았다.
그날 늦은 밤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시몬의 의도는 성공했다.
여기 모인 네 명의 입이 가벼운 남자들은 케나드의 진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시몬은 이렇게 당부했다.
“오늘 이야기를 가능하면 널리 퍼트려 주십시오. 모르는 분들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물론 그래야지. 매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느라 돈 좀 썼는데, 이번에는 아주 크게 얻어먹을 수 있겠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전 이만.”
“좋은 밤 보내시게!”
저택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곳이었지만, 시몬은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오늘은 아주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 * *
“거기 앉아서 뭐 하고 있느냐?”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위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털이 듬뿍 달린 외투를 걸치고 있던 사냥꾼이 잡아 온 동물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덩치가 크고 매우 고집스럽게 생긴 남자였다.
그에 비해 소년은 다소 여린 감이 있었다.
과연 이 험악한 남자의 손에서 어떻게 자랐나 의문이 들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쯧! 얼마 전에 왔었던 귀족 나부랭이들 때문이지?”
“아, 아뇨.”
“괜히 잘 먹고 잘사는 사람 찾아와서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머리통에 화살을 박아 버리고 싶었다.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남자는 그날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아크튜러스 가문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아들을 데려가도 되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아들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훌륭한 인재로 소중히 키울 것이라고 말했으나, 남자에겐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마을에서 쫓아내었다.
“사냥꾼은 사냥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 거다. 누구의 개로 일하는 게 아니라 주체적으로 활을 쏘고 동물을 잡아야 한다는 거지.”
“알고 있어요. 아버지.”
“그런데 놈들이 어디서 소문을 들었을까? 네 활 실력에 대해 이야기하던데.”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두 부자가 머무는 것과 비슷한 천막은 딱 다섯 개였다. 다섯 가구가 임시로 마을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소문이 날 일도 없었고, 소문을 듣고 퍼트릴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크튜러스 가문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것도 아들의 재능을 높이 사면서 말이다.
“흐음. 여기에 있는 사람 중 외부와 접촉을 하는 사람들은 없을 터인데…….”
다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생사를 같이한 동료였다.
오히려 외부와 접촉하는 건 소년의 아버지 쪽이었다. 생필품이 필요할 때 잡은 사냥감과 가죽 같은 것들을 시장에 팔고 있었다.
“정말 희한하군.”
“별일 아닐 거예요. 그보다 사냥은 좀 어떠셨어요?”
“예전 같지 않아. 조만간 거점을 옮겨야 할 것 같구나. 가뭄이 들려는 건지 사냥감이 별로 없어.”
소년은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처음에는 거처를 계속 옮겨 다니는 것이 불안하고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한 지금은 묵묵히 아버지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사냥에도 재미를 들이고 있었다.
“활은 좀 쐈느냐?”
“다 과녁에 맞혔어요. 백 발 정도.”
“오, 잘했다! 역시 너는 나를 쏙 빼닮은 모양이군! 하하하하!”
사냥꾼은 아들이 남긴 흔적을 살폈다. 화살은 모두 회수되어 있지만, 박힌 자국은 과녁의 한가운데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나 활을 잘 쏘다니! 이대로라면 녀석은 아주 멋진 사냥꾼이 되겠어!’
무엇보다도 죽은 아내가 남긴 유일한 보물이 바로 로빈이었다. 절대로 귀족들에게 내어 줄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그때.
조용하기만 했던 그곳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남자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들려오는 이 진동은 보통 말이 낼 수 없는 소리라고.
“군마?”
잘 훈련된 군마가 낼 수 있는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말을 탄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로 시몬이었다.
“그대가 켈로그인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그러자 다른 천막이 하나둘 걷히며 사냥꾼들이 활을 들고 나왔다.
활촉이 시몬의 심장을 겨냥했다. 시몬은 두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표했다.
“나는 대화를 하러 온 거야. 너희들을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럼 어떻게 켈로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수배령이라도 떨어졌나?”
사냥꾼들이 시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시몬이 답했다.
“사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을 수배할 정도로 아크튜러스 가문은 한가하지 않아.”
“세금 문제가 있을 텐데!”
사냥꾼들은 떠돌이 생활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소속된 곳이 없고, 유랑민 대우를 받는다.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영지에서는 사냥꾼에게 현상금이 걸리기도 한다.
“물론 그런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문은 돈에 쪼들리진 않아서 말이야. 그쯤이야 눈감아 줄 수 있지.”
“우리 가문?”
“나는 아크튜러스 가문에서 온 시몬이다. 드뇌브 각하의 첫째 아들이며 아크튜러스 군단 사령관이기도 하지.”
“뭣……!”
그 말에 사냥꾼들이 깜짝 놀랐다.
전에 온 사람들은 그저 가문에서 파견한 심부름꾼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가 온 것이다.
유일하게 켈로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올 뿐이다.
“웃기지도 않는군. 네가 그 잘난 시몬 공자라고? 입증할 수 있나?”
“어떤 방법을 원해? 가문의 인장을 보여 줄까, 아니면 검술 실력?”
그러자 켈로그가 씨익 웃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당연히 실력으로.”
“나도 바라던 바다.”
스릉!
시몬이 ‘환영의 검’을 꺼냈다.
검에서 웅웅거리는 거친 공명음이 발산되기 시작할 무렵, 켈로그는 재빨리 활을 들었다.
두두둑!
시위가 당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