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서부의 신궁 (1)
드뇌브 후작과 면담을 마친 시몬은 즉시 드비안느를 거처로 불렀다.
“별일 없으셨어요? 아까 분위기 완전 살벌하던데요.”
“살벌할 것까지야. 둘째어머니께서 건강을 회복하셨는데 설마 혼내시기라도 하시겠어?”
“다행이네요.”
드비안느도 미온이 정원을 거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그 배경에는 시몬이 만든 비약이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가 대단해 보였다. 예전부터 천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은 검술에 한정해서였다.
“아까는 잘 이야기했다. 사업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좀 복잡해질 뻔했어.”
“굳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왜?”
“거기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 저희 가문에도 좀 떨어지는 게 있으니까요. 저도 나름대로 살 궁리를 한 거라구요?”
과연 드비안느다운 말이었다. 시몬은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 가문은 앞으로 부자가 될 거니까.”
“그것보다 황녀님하고 좀 어떻게 화해 안 될까요?”
“절대 안 돼.”
드비안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문이 부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황도에 진출하고 싶었던 게 그녀의 속마음이었다.
왕족의 시녀가 될 수 있다면 정말 인생 활짝 피는 건데, 하고.
“그보다 왜 부르신 걸까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것부터 들을래?”
“라니에리 경에게 이상한 걸 배워 오셨군요.”
“…….”
시몬은 입맛을 다셨다. 좋은 걸 배웠나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줄이야.
“그럼 본론부터 말하지. 안타깝게도 내가 만든 약을 상단에서 팔지 않기로 결정됐다.”
“뭐라구요? 그럼 저희 가문이 부자가 될 수 없잖아요?”
“판매 조건이 좀 바뀌었지.”
“조건이요?”
시몬은 드뇌브 후작과 협의한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다. 비약을 하나 넘길 때마다 5천만 실링이라는 거금을 받기로 했다고.
그 작은 비약이 5천만 실링이나 한다는 사실에 드비안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그렇게 비싼 약이었어요? 구하기 힘든 약초이긴 했지만 그 정도의 가치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약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만든 사람이 아니라 먹는 사람이다.”
“하긴, 맞는 말씀이네요.”
“그 정도는 받아야 성공한 은퇴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거고.”
“휴, 정말 못 말리겠네요. 아직도 포기 안 하셨나 봐요.”
“그중 절반은 너희 가문에 주려고 한다.”
개당 2500만 실링이면 로이드 가문이 한 달을 넉넉히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었다.
의외로 드비안느는 부담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솔직히 너무 많아요.”
“약초 구할 때 힘들지 않았어?”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 정도의 가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희한한 녀석이네. 보통이라면 더 달라고 어떻게든 머리를 굴릴 텐데 말이지.”
“욕심이 지나치면 벌 받는 법이니까요.”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경험을 보더라도 과욕을 부려 패가망신한 일이 결코 드물지 않았으니까.
“다 이유가 있다. 약을 하나만 만들고 끝낼 게 아니거든. 지속적으로 약초를 구해야 해. 그러려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겠지.”
“지속적이라면, 얼마나요?”
“평생?”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간단히 몇 개 만들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한 달에 몇 개나 만드실 생각인데요?”
“일단 10개씩? 약초 수급이 원활해지면 양을 좀 더 늘려 보고. 어차피 만들 수 있는 양은 거의 정해져 있거든.”
비약을 숙성시키기 위해서는 보름달의 정기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보름달은 매번 뜨는 게 아니다.
게다가 날씨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정말 운이 나쁘면 한 달에 한 번도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
“10개라면 확실히 많은 돈은 아니겠어요. 사람을 더 써야겠는데요.”
“보관할 곳을 만드는 데도 돈을 써야 할 거다. 약초는 신선함이 생명이니까.”
“으으음…….”
“괜히 머리 쓰지 마.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다.”
“하아, 일단 아버지께 말씀은 드릴 텐데 아마 하신다고 할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약초를 어떻게 배합시키는지 엄청 궁금해하셨거든요.”
“배합법은 나중에 알려 주마. 생산이 안정화되면 아예 너희 가문에 맡길 생각이니까.”
“그럼 그렇게 전해 드릴게요.”
드비안느가 예를 취한 뒤 밖으로 나갔다.
시몬은 다시금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려 했으나,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미온과 이올린이었다.
시몬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어머니.”
“쉬는 데 방해했구나.”
“아닙니다.”
미온은 하녀에게 손짓했다. 하녀의 손에 들린 접시엔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오랜만에 솜씨 좀 내 보았다. 네가 이런 걸 좋아한다고 해서 말이다.”
“오, 마침 출출하던 차였는데 잘됐군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이올린. 너도 하나 먹을래?”
“네!”
시몬과 이올린은 샌드위치를 하나씩 나눠 먹었다. 아삭거리는 채소와 달콤한 드레싱, 그리고 고소한 빵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정말 맛있습니다. 어머니.”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구나.”
약간은 불순한 이유로 단기간에 빵 전문가가 된 시몬은 빵에 주목했다.
“특히 이 빵은 어디선가 먹어 본 맛이군요.”
“마이너 마을에서 온 거란다. 네가 사업을 하려는 그 빵집에서 납품한 빵이라고 들었단다.”
“그렇습니까?”
어쩐지 맛이 익숙하다 싶었다. 괜히 반가운 마음에 시몬이 은근슬쩍 물었다.
“빵을 가져온 자는 누구입니까?”
“그거까진 모르겠구나. 집사장이 알고 있을 테니 한번 물어보렴.”
쪽지를 남긴 이후 루아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따로 연락할 만큼 뭔가 관계에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라니에리의 말대로 갑작스러운 이별이 그리움으로 쌓여 가고 있었다.
“앞으로 종종 만들어 주마. 그래도 가끔은 식당에 가서 식사하는 게 줗겠구나. 다들 걱정하는 것 같으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시몬은 접시에 있던 샌드위치를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이올린에게 하나 더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시몬은 홀로 장비를 챙겨 서쪽으로 말을 몰았다.
* * *
드뇌브 후작과의 협상은 잘 끝났다. 용돈으로 3억 실링을 타내는 것에도 성공했다.
황녀의 선물을 산다는 핑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비싼 걸 사서 건넬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구색 맞추기는 해야겠지.’
시몬은 로빈을 등용하는 즉시 황도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그 경험 자체가 로빈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말에 오른 채로 기감을 끌어올린 시몬.
‘아직 따라붙는 놈은 없군.’
시몬은 틈틈이 오러를 사용해 추적자가 있는지 살폈다. 그러나 저택에서 나설 때부터 지금까지는 아무도 붙지 않았다.
‘몸놀림이 민첩한 부하도 한 명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은 몇 개 있었다. 추적이나 암살에 특화된 사람들.
‘문제는, 그런 놈 중에 뒤가 구리지 않은 놈들이 없다는 거지.’
전생의 시몬이었다면 배경이나 인성을 보지 않고 바로 등용했을 것이다. 능력이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생은 좀 달랐다.
가능하면 악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쪽에 특화된 인재를 키우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시몬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진에게 연락 한번 해 봐야겠군. 그쪽에 인재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런 생각을 이어 가다 보니, 말이 어느새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수도에서 반나절 정도를 달리면 나오는 플로란 마을이었다.
인구 몇백 남짓의 작은 마을.
그래도 수도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에 오가는 사람들은 제법 있었다.
‘야영은 좀 그러니 마을에 들러야겠어. 겸사겸사 민심을 좀 살펴볼까?’
이미 시몬은 변장을 끝낸 뒤였다. 게다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 누구도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여관 근처에서 내린 시몬은 말을 맡기고 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모험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적당한 자리에 골라 앉은 시몬이 맥주를 주문했다.
바로 그때.
“오크 놈들이 쳐들어올 모양이야. 알데바란 쪽에서 온 상인에게 들었는데 벌써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더군.”
“뭐야? 오크들이 왜?”
“사람 쳐 죽이는 거 좋아하는 놈들이잖나? 언제든 쳐들어와도 이상할 게 없지.”
“그럼 이쪽도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사람들이 오크족의 침공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때 술이 먼저 나왔고, 시몬은 맥주를 홀짝이며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네만, 우리 영지와 알데바란이 동맹을 맺은 모양이야. 같이 오크 놈들을 물리친다고 하던데?”
“오! 그게 정말인가?”
“시몬 도련님께서 큰일을 하셨다더군. 알데바란으로 군사를 통행시킬 수 있는 권리인가 뭔가를 얻어 냈다고 하던데?”
“과연…… 시몬 도련님이야말로 아크튜러스의 제일가는 영웅이 아닌가?”
“옳은 말일세.”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잔을 비우고 말았다.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럼 시몬 공자님이 오크 놈들을 물리치러 가시는 겐가?”
“당연히 그렇겠지! 케나드 공자님도 계시긴 하지만, 역시 시몬 도련님이 제일 아닌가?”
“하하하하! 맞는 말일세. 공자님을 위해 우리 건배나 한번 하지!”
“건배!”
한 무리의 남자들이 잔을 거칠게 부딪쳤다. 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몬은 입맛이 썼다.
결국 잔을 든 시몬이 자리를 옮겼다.
남자들이 있는 테이블로.
“합석해도 됩니까?”
“……누구요?”
“아크튜러스 상단의 사이먼이라고 합니다. 듣다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아서.”
“아크튜러스 상단?”
사내들이 짐짓 놀랐다.
아크튜러스 상단이라면 가문과 연관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만약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와전되어 아크튜러스 본가로 들어가게 된다면 목이 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몬이 먼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선생님들 말씀을 어디로 퍼트리거나 하려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다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수도에서 들은 따끈따끈한 정보를 좀 나눠 드릴까 싶어서요.”
“오! 수도에서 오는 길이시오?”
“그렇습니다.”
그들은 플로란 마을의 토박이들이었다. 그래서 상인들에게 정보를 듣는 것이 일상의 낙이기도 했다.
“어서 앉으시오!”
“좀 떠드는 대신에 안주 좀 먹어도 됩니까?”
“얼마든지! 플로란의 인심은 그렇게 모질지 않다네.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술까지 내가 사지.”
“하하하하!”
시몬과 네 명의 남자들이 잔을 들고 건배했다.
포크로 돼지고기를 집어 입에 넣은 시몬에게 한 남자가 물었다.
“그래서. 수도에서 뭐 재미있는 소식이라도 있었소?”
“아까 얼핏 들으니 시몬 공자님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렇지. 정말로 멋진 분 아닌가? 알데바란 놈들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해 줬다고 들었네.”
그 정도는 아닌데?
뭔가 소문이 잘못 퍼지고 있는 듯했다.
“맞습니다. 시몬 공자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검술이면 검술, 인품이면 인품, 외모면 외모. 빠지는 게 하나도 없으십니다.”
“옳지!”
“그분이야말로 아크튜러스 영지의 미래일세!”
“하지만 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 싶군요.”
“다른 이야기라면……?”
남자들이 귀를 기울였다. 시몬은 새로 나온 잔으로 목을 축이며 뜸을 들였다.
“아크튜러스 가문에 떠오르고 있는 신성에 대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