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협상 (2)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드뇌브 후작은 한탄했다.
열병을 앓고 난 이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도 많았으나, 마치 미래를 본 것처럼 영민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회귀를 했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믿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드님이 요즘 많이 힘드신가 봐요,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녀석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공헌분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으음, 전부 갖겠다고 했다면야 모르겠지만…….’
엄청난 발견을 해냈다. 그것도 특정 질병을 한 방에 고칠 수 있는 약이었다.
사실 드뇌브 후작은 약초학과 연금술에 나름 조예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이 개발됐던 약들이, 하나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험하는 도중 뜻밖의 이로운 작용을 발견하기도 하지. 부작용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긍정적인 작용을 할 때도 있고 말이야.’
즉, 미온의 병을 고친 그 비약을 다른 용도로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비약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고 알데바란의 이름을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반쯤은 농담이었습니다.”
“반쯤은?”
시몬은 씨익 웃어 보였다. 진심이 없지 않다는 것을 표정으로 보여 주었다.
“흐음, 그래. 좋다. 네 말도 일리가 있군. 얼마만큼의 돈을 원하느냐?”
“순이익에서 7할 정도를 가져가고 싶습니다.”
“7할이나?”
“순이익입니다. 매출이 아니고 순이익이요. 아크튜러스 상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3할이나 되는 돈을 차지하게 되는 거고 말이죠.”
“…….”
드뇌브 후작은 궁지에 몰렸음을 깨달았다. 시몬은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지 않았다.
“좋다. 그 건은 칼림 경과 한번 상의해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굳이 칼림 경의 이야기까지 들으셔야 합니까? 상단의 주인은 아버지이신데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만한 정보를 하나 더 드리지요. 케나드의 서클이 하나 더 늘어났습니다. 그 약을 먹고서 말입니다.”
드뇌브 후작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라고? 서클이…… 늘어?”
“그 비약은 원래 오러의 양을 늘릴 수 있게 해 주는 약입니다. 옆에서 혈맥을 좀 짚어 준다면 최대의 효과를 내줄 수 있지요. 마침 케나드가 3서클을 눈앞에 둔 상황이라 운이 좋았습니다.”
“허어…….”
시몬은 드뇌브 후작이 지나치게 기대하는 것을 염려해 현실적인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서클이 많을수록 효과가 떨어지는 약입니다. 오러가 없거나 이제 막 소드 비기너에 입문한 자들이 먹으면 효과가 좋지요. 익스퍼트에 접어들면 효과가 거의 없게 됩니다. 즉 초반용이라는 말입니다.”
“어쨌든 그 말은, 기사단의 전력을 한층 더 강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더냐?”
“제대로 보셨습니다. 그러니 순수익의 7할이라는 금액은 결코 큰 게 아니라는 말씀이죠. 어차피 가문 내에서 대부분 소비될 테니까.”
“대량 생산이 가능한가?”
“불가능합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소량만 만들 수 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외부로 파는 것보다 내부 독점으로 소비하는 게 더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오러를 늘리는 약을 함부로 팔았다가는 강해진 다른 가문에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
“그 약은 상단을 거치지 않고 우리 가문 내에서 직접 만드는 걸로 하지.”
“그럼 제 몫이 많이 줄 것 같은데요?”
“약 하나에 천만 실링을 주마.”
“그리 솔깃한 가격은 아니군요.”
“2천만.”
시몬은 건방지게도 고개를 갸웃했다.
“좀 더 쓰시죠? 5천만은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아비와 협상을 하겠다는 게냐?”
“가문의 기사들에게 복용시킬 생각이시죠? 그럼 결국 가문에 투자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많은 돈을 쓰신다고 해도 결국 다 아버지의 힘이 될 돈입니다. 그런데 협상이라고 하시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들어 첫째 아들과 대화를 하기 싫은 이유가 아무래도 뭔지 알 것 같은 후작이었다.
“……그래도 5천만은 너무 많다. 우리 가문에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정규 기사만 수백, 거기에 기사 양성 학교에는 천 명 이상의 인재들이 포진해 있다.
100명의 기사 후보자들에게 모두 약을 하나씩 먹인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50억 실링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셈이다.
물론, 아크튜러스 후작가의 자산은 1조 실링이 넘는다.
거기에 매년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하다.
기타 유무형의 자산을 따진다면 그것을 훨씬 상회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문제는, 한 번만 먹고 끝내는 비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케나드가 3서클에 들어섰다고 했지? 서클이 없는 기사가 3서클이 되는 데엔 몇 개가 필요하느냐?”
“제한적으로 잡아 다섯 개면 될 겁니다.”
“제한적이라는 의미는?”
“제가 맥을 짚어야 한다는 단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열 개를 먹어도 힘들 수도 있습니다. 타고나지 않은 이상에는.”
정리해 보면 기사 하나를 소드 비기너의 최종 단계인 3서클까지 올리는 데 드는 비약은 보수적으로 잡아 다섯 개 정도.
‘2억 5천만 실링은 생각해야 다음 단계인 소드 익스퍼트를 노려볼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그게 큰 지출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크튜러스 가문이기 때문에.
중소 규모 가문은 소드 익스퍼트급 기사를 보유하기도 힘들다. 많아야 비기너급 기사가 열 명 정도. 그만큼 달성하기 어려운 경지다.
그런데 2억 5천만 실링으로 비기너의 최종 단계에 들어설 수 있다면 아낌없이 지출할 가치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무를 숭상하는 가문이었으니까.
“알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지.”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살검의 묘리는 네가 가르쳤느냐?”
“예.”
이로써 킬스톤으로 가는 것은 케나드가 되었다.
미래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개당 5천만 실링이라는 돈은 어디에 쓸 생각이냐?”
“그중 절반은 재룟값입니다. 대량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는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 로이드 가문에 도움을 받아야 할 겁니다.”
“으음, 그렇지. 약초가 가장 중요할 테니.”
“인건비를 포함해 그쪽에 들어가는 돈을 제하면 저에게 떨어지는 건 많아야 2천만 실링 정도 되겠죠. 한 달에 열 개 정도 만들면, 2억 실링이군요.”
“그것도 많은 돈이라고 본다.”
“차라리 던전에 들어가 아티팩트를 구하는 게 더 싸게 먹히는 장사지요.”
한마디로 가문을 위해 희생한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한마디였다.
그래서 그 까다로운 드뇌브 후작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앞으로 인재를 좀 더 고용할 생각이라 돈이 좀 필요합니다. 이상한 데 가서 흥청망청 쓸 일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인재를 고용해?”
“예. 제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좀 모아 보려고 합니다.”
“가문을 잇지 않겠다면서?”
“시골 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아버지. 힘을 쓸 수 있는 사람도, 머리를 쓸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지요.”
“허…….”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다. 시몬은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말이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3억 실링만 용돈으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데바란에서 제법 많은 돈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 돈이 선행에 쓰였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나 보군요.”
사실 들었다.
하녀에게 1억 실링을 줬다는 엄청난 미담이 저택 전체를 감동시키고 있는데 드뇌브 후작이 듣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아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사실 별생각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건 그것 나름대로 위험한 일이겠지.”
“일단 서부로 가서 제가 눈여겨본 인재를 한 명 데려올 생각입니다. 그 이후에 황도로 가서 황녀님과 담판을 짓겠습니다.”
“서부? 누구더냐?”
“활을 아주 잘 쏘는 친구입니다. 얼마 전 미행이 붙었습니다. 라니에니가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미행이? 누가 감히 아크튜러스 가문에 미행을 붙인단 말인가?”
“대륙에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지 않습니까?”
가만 생각하던 드뇌브 후작이 흠칫 놀랐다.
“설마 황실에서?”
“그럼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할까요? 알데바란? 터무니없습니다. 이미 그쪽은 아니라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시몬은 얼마 전 제거한 첩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드뇌브 후작은 분노하면서도 황실에 대한 의혹을 떨치지 못했다.
“이는 나아가서 우리 가문을 감시하려는 황실의 책략일 수도 있습니다.”
“황실이 귀족 가문을 감시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었지.”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나 명백한 증거도 없이 황실을 의심하는 것은 제국의 귀족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기다려 주십시오. 시간문제일 겁니다.”
“너는 왜 그리…….”
자신만만하냐는 질문이 채 목구멍을 넘지 못했다.
시몬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회귀.
“넌 이번 일의 배후를 알퐁스 백작가로 지목했었지?”
“예. 하지만 그쪽이 붙인 사람은 아닐 겁니다.”
“이유는?”
“의심 가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황실근위대의 제너릭 경.”
낮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드뇌브 후작은 제너릭이라는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실로 음험한 자였지. 황녀님이 데려온 기사이기도 하고. 많은 것이 베일에 싸인 인물이기도 하다. 알려진 게 없다는 말이다.”
“저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음험하고 위험한 자죠.”
제국의 유력 귀족들이 의문사를 당한 일이 종종 벌어진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대개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책략도 뛰어나지만 본인의 무력도 상당한 자였다.
그래서 안심하기는 이르다.
“아무튼, 약속대로 케나드를 살검의 경지에 들어서게 했으니 곧 황도로 가서 결정적인 증거를 가져오겠습니다. 또한 황녀님과의 파혼 소식도 함께 가져오도록 하지요.”
“뒷감당을 할 수 있겠느냐?”
“비약을 먹는 기사들의 혈맥은 제가 직접 짚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뒷감당은 문제도 아니지.’
가문이 통째로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도록 힘을 보태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나아가서는 우리 아크튜러스를 황실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가문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럴 바에는 네가 가주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킬스톤에서의 전투가 아버지의 생각을 많이 바꿔 놓을 겁니다. 장담하지요.”
킬스톤이라면, 전에 아들이 말했던 오크와의 접전지가 될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케나드의 재능이 개화한다고 주장했었다.
‘설마…… 이번에도 녀석의 뜻대로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미래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몬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일들을 해결해 나갔다.
알데바란과의 전쟁을 막았고, 미온의 병을 치료했으며, 케나드의 경지를 소드 비기너 마지막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그것도, 아주 올바른 형태로.
‘기대되는군.’
처음이었다.
드뇌브 후작이 시몬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